[사라지는 고달픈 삶의 흔적, 회원동 500번지] (1) 하모니카촌을 아시나요 - 형성
일본군 마구간 있던 곳, 귀향한 동포·노동자…서민 모여들어 동네로
"집 줄지은 모습이 닮아 하모니카촌이라 불려"

회원동 재개발 지역 철거가 한창입니다. 회원동은 마산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동네가 만들어진 까닭에 골목이 복잡하기로 유명했지요. 최근까지도 동네 공용 화장실을 쓰는 집이 있었습니다. 근대 회원동 역사는 일본군 마구간에서 시작됐습니다. 일명 '회원동 500번지'란 곳입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는 이제 중년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동네였던 만큼 고생도 많았지만 추억도 많을 것입니다. 그 추억을 담은 풍경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겠지요. 그래서 늦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회원동 500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떠나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회원동 500번지의 오랜 풍경을 차곡차곡 남기려 합니다.

"우리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다닌 곳이기 때문에, 눈 감고도 갈 수 있어요."

일부 철거가 시작된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 2구역 재개발 지역. 얼기설기 좁은 길을 지나 예전 살던 집을 찾아가는 허정도(64·건축사·창원대 겸임교수) 씨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골목마다 붉은색 페인트로 '철거'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허 씨는 회원 2구역 재개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다 보내고 성년이 됐다. 결혼을 하고 자식들도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건축사 시험에 합격한 것도 이곳에 살 때였다.

재개발 철거가 시작된 회원2동 모습. 회원동 500번지라 불리던 이곳은 마산에서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유희진 인턴기자

"그때는 건축사 시험이 아주 어려웠어요. 합격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했다더군요."

◇일본군 마구간에서 시작한 동네 = 연배가 있는 이들에게는 회원2동보다 회원동 500번지란 명칭이 더 익숙하다. 다른 말로 회원동 나래비촌, 하모니카촌으로도 불렸다. 이름만 보면 허름한 판잣집이 촘촘하게 이어진 모습이 떠오른다. 그럴 만큼 지지리도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동네였다.

원조 회원동 500번지는 정확하게 회원초등학교 앞 새한아파트 주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기마대 마구간이 있던 자리다. 해방 직후 미군이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회원초등학교 앞으로 길쭉하고 큰 건물 세 동이 나란히 있는데, 이곳이 마구간이다. 건물 위쪽으로 보이는 옹기종기 집들이 모인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있던 '회원리'다. 나머지 지금 회원2동을 이루는 지역은 대부분 논이었다. 1945년 해방 후 주로 일본에서 귀국한 경남 사람들이 그나마 번화했던 마산에 터를 잡는다. 가난한 고향에서는 삶을 꾸리기 어려워서다. 일찍 귀국한 이들은 일본인들이 살던 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늦게 마산 땅에 도착한 이들은 일본군 창고와 노동자 숙소 같은 곳에서 난민처럼 살았다. 그중 한 곳이 회원동 500번지 마구간이다.

"사람들이 가마니나 함석 같은 걸 가져다 바둑판처럼 한 칸씩, 한 칸씩 나눠서 가구를 구분했어요. 천장이 높아서 벽만 있는 구조였지요. 그렇게 줄지어 지은 모습이 하모니카를 닮아 하모니카촌이라 불렀어요. 귀환 동포였던 부모님도 이곳에 자리를 잡으셨고요."

허정도 씨가 태어난 곳도 이 마구간 하모니카촌이다. 정확하게는 현재 회원2동 우물이 있는 곳 근처다.

건축가 허정도 씨가 재개발로 곧 철거될 '회원동 500번지' 옛 자신의 집앞에 섰다. 그는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결혼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았다. /이서후 기자

◇서민들 모여들며 커진 동네 = 허 씨가 두 살이 되던 1954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회원동 472-31번지, 현재 회원2동 한가운데로 이사를 했다. 굳이 새집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동네 중심에 지은 이유가 있다.

"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 논밭 있는데다가 우리가 집을 제일 먼저 지었다고 해요. 먼저 줄을 쳐놓고 지으니까, 그 옆에 바로 이어서 집을 계속 짓더래요. 대문으로 가는 길은 열어둬야 하니까 좁은 골목이 삐뚤삐뚤 그렇게 생겼죠. 그래서 우리 집으로 가려면 직선거리는 가까운데 한참을 빙빙 돌아서 가야했어요."

이런 식으로 회원2동 판자촌이 형성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과 함께 마산으로도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이 중 일부도 회원동 판자촌으로 들어왔다.

1960년대는 마산 경제에 큰 변화가 있는 시기였다. 한일합섬, 한국철강, 수출자유지역 등이 들어서며 공업이 주도하는 경제구조로 바뀐 것이다. 일자리가 넘쳐났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회원동 500번지 주변 판자촌은 빈집이 없을 정도였다.

1970년대를 지나며 마산 시내에는 논밭이 거의 사라졌다. 이 시기 회원동 회산다리 주변으로 회산시장이 형성됐다.

"진주, 함안, 군북 등 인근지역으로 가는 기차가 운행됐던 철길에는 많은 사람이 지나다녔고, 자연스레 그 주위로 시장이 생겼어요. 한창 기차가 다닐 때는 호루라기 신호에 맞춰 노점들이 물건을 싹 치우는 기가 막힌 광경도 볼 수 있었지요."

1950년대 회원동 500번지 일대 항공사진. /국토지리정보원

◇가난한 시절, 따뜻한 추억도 사라질까 = 지금도 철길시장은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철길 아래 굴다리는 지금까지도 회원2동 주민과 상인들이 동네로 들어가는 주 통로다. 그래서 굴다리 기둥에는 전·월세 전단 등 온갖 동네 정보가 가득 붙어 있다.

"지금은 통로가 둘인데, 원래는 오른쪽 길만 있었어요. 왼쪽 길은 시장이 활성화되고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니까 생겼지요. 이 길로 학교도 다녔고, 아내가 여길 지나 시집오고, 아버지 장례 행렬도 이곳으로 빠져나갔죠."

회원동 500번지 주변 동네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그래서 마산에서 가장 낙후된 곳, 부랑자 동네라는 인식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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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회원동 500번지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 사진.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모여들어 악다구니가 끊이지 않았지만, 신혼부부와 아이들도 많았기에 골목마다 웃음 소리도 자주 들렸다. /건축가 허정도

"아내가 시집올 때 처가 언니들이 처음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좁은 골목을 빙빙 돌아들어 오다가 우리 집 낡은 화장실 앞에서 소리 죽여 울더군요. 우리 막내가 이런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다니, 하면서요. 그때는 다들 참 가난했어요."

한참을 걷던 허 씨가 파란 대문 집 앞에 섰다. 회원동 472-31번지. 이제는 문이 굳게 잠긴, 작고 낮은 집이다.

"여기 살 때가 그립네요. 일 년에 몇 차례씩 이곳에 와보곤 합니다. 이 집도 곧 철거될 테죠. 그 생각하면 아주 서운해요."

허 씨는 아직도 회원동 주변에 살고 있다. 그는 동네가 아주 낡아 정비가 필요한 건 맞다고 했다. 하지만, 추억이 철거되는 풍경 앞에서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건 그도 어쩔 수가 없다.

[참고 문헌]

<마산창원 역사 읽기>(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 불휘, 2003)

<간추린 마산역사>(이학렬 엮음, 도서출판 경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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