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의 산 : 도시와 사람 끌어안은 넉넉한 품
마무리 : 삶터를 지키는 진산

도시와 사람 끌어안은 넉넉한 품

창원의 산

창원(昌原)은 옛 의창(義昌) 고을과 회원(會原) 고을에서 유래했다. 현재의 창원시는 지난 2010년 7월 1일 창원·마산·진해시가 통합되면서 완성된 경남 최대의 도시다. 통합 전 마산은 무학산, 창원은 정병산, 진해는 장복산을 대표 산으로 꼽았다. 통합 창원시의 대표 산은 어딜까. 서로 다른 주장이 있지만 높이만 놓고 비교하면 불모산이 가장 높다. 유일하게 해발 800m가 넘는다. 오랫동안 마산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무학산을 창원 제일의 산이라고 여길 것이다. 수려한 산세에 다양한 접근성, 고운 최치원 선생의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산림청 선정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산이라는 점도 그런 주장에 힘이 실린다.

창원의 산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김해 신어산을 거쳐 낙동강으로 떨어지는 낙남정맥(洛南正脈)과 함께 한다. 함안군과 경계에 있는 서북산~봉화산~삿갓봉~광려산~대산~대곡산~무학산~천주산~정병산~용지봉~대암산~비음산 등이 낙남정맥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더해 불모산은 진해 쪽 웅산과 천자봉을 잇는다. 장복산도 함께 흐른다. 바다를 마주 보며 도심을 품은 산세가 창원 산의 특징이다. 겨울철 몰아치는 삭풍을 온몸으로 막아 온화한 날씨를 보이는 것도 모두 병풍처럼 두른 산이 있기에 그렇다. 또 그저 바라보는 산이 아니다. 어느 곳을 택하더라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기에 정겹고 부담이 없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점점이 떠 있는 남해의 크고 작은 섬, 손에 잡힐 것 같은 바다는 창원 산이 덤으로 주는 혜택이다. 여기에 산허리를 따라 조성된 둘레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품는다.

123.jpg
▲ 불모산에서 웅산 가는 길에서 본 창원 풍경. 가운데 산줄기가 장복산이다. / 유은상 기자

마산·창원·진해 잇는 '환상적' 산줄기 라인

포털 사이트 지도 서비스에서 창원시 주변 위성 지도를 살펴보자. 마산, 진해를 포함해 창원 도심을 둥그렇게 둘러싼 산이 보일 것이다. 대곡산(517m)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무학산(761m), 천주산(639m), 구룡산(432m), 정병산(566m), 대암산(675m), 불모산(801m), 웅산(710m), 천자봉(506m)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원형 산지. 그리고 그 원 가운데 장복산(593m)이 있다. 이른바 마산-창원-진해 환상구조다. 창원 주변 지형을 눈여겨본 연구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환상구조는 산지가 고리모양으로 분지를 둘러싼 것을 말한다. 이는 칼데라(Caldera) 지형과 거의 비슷하다. 화산활동으로 마그마가 빠져나간 이후 분화구 주변 땅속이 비면서 넓게 푹 꺼지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형성된 냄비 같은 분지가 칼데라다. 마산-창원-진해 환상구조 역시 백악기 창원 도심에서 엄청난 화산 활동이 있었다는 걸 증명한다는 게 연구자의 생각이다. 물론 현재 이 지역을 칼데라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 단층운동과 침식 등 다양한 지질활동을 통해 지금 같은 모습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악기 창원지역 주요 산줄기를 형성한 거대한 화산활동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 있는 가설이다.

창원 분지를 둘러싼 전단산맥

환상구조에서 가장 넓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창원 분지다. 이곳의 중심 산은 경남도청, 경남도의회, 경남지방경찰청 등 주요기관을 산자락 아래 펼쳐둔 정병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단산, 그냥 단산이라고도 했다. 조선 지리서에 빠지지 않고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옛사람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병산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길쭉한 뻗은 지맥을 전단산맥이라 한다.

정병산은 한자로 '精屛山' 혹은 '精兵山'이라 쓴다. 하지만, 한자 자체에서 지명 유래를 찾기는 어렵다. 연구자들은 '징산, 징빙산'이란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본다. 이는 정병산 북쪽 창원시 의창구 동읍 자여마을 사람들이 예로부터 이 산을 부르던 이름이다. 천지개벽 때 산 정상에 징 하나 올릴 공간만 남고 다 물에 잠겼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 정병산을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 수리봉이 있다. 수리란 말에는 '위, 높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를 한자로 옮길 때 주로 시루 증(甑)자를 썼다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는 '증'자를 '징'에 가깝게 발음한다. 그래서 수리봉은 증산 혹은 증봉 표기되었고 실제 징빙, 징산으로 불렸다는 해석이다. 어쨌거나 정병산은 '높은 산'이란 뜻이다.

123.jpg
▲ 장복산 갈림길에서 본 진해(왼쪽)와 창원(오른쪽). / 유은상 기자

정병산은 유독 군대와 인연이 많다. 고려 충렬왕 때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 10만이 일본 정벌을 하려고 마산, 창원 일대에 주둔했는데, 정병산에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야포 훈련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군이 방위선을 구축했고, 한때 해병대 훈련장도 이곳에 있었다.

정병산에는 효자 호랑이 전설이 있다. 옛날 동읍 자여마을에 성이 구 씨인 젊은이가 동네에서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 날로 병세가 깊어가는 어머니께 해줄 게 없었다. 그래서 정병산 중턱 바위굴에서 산신에게 어머니를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지극한 기도에 산신령이 나타나 책을 하나 건넸다. 책에 나온 주문을 외면 호랑이로 변하는데, 고라니 열 마리를 잡아 어머니께 고아 드리면 좋아질 것이라 했다. 그리고 다시 책에 나온 주문을 외면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무서운 호랑이로 변하는 데 기겁을 한 아내가 그 책을 아궁이에 넣고 불살라 버렸다. 효자 고 씨는 결국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정병산 바위굴 앞 호랑이 바위로 남았다는 이야기다.

청룡산맥과 옛 진산

정병산을 중심으로 한 전단산맥 동쪽은 구룡산(九龍山)으로 이어진다. 산 이름은 산등성이 9개가 용처럼 보인대서 유래했다. 옛 이름은 염산(簾山)이었는데 산세가 발을 두른 듯 펼쳐진 모습에서 유래했다. 구룡산 역시 옛 문헌에 자주 등장할 만큼 중요한 산이었다.

구룡산에서 연결되는 게 옛 창원 고을의 진산(鎭山, 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으로 추정되는 천주산이다. 창원(昌原)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때 의창(義昌) 고을과 회원(會原) 고을을 합쳐 만든 것이다. 지금도 창원시 의창구과 마산회원구로 옛 지명이 남았다. 창원 고을의 중심이 되는 읍치(邑治)는 현재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 일대다.

1213.jpg
▲ 창원 의창구 서상동 남산공원에서 본 천주산과 구룡산. / 유은상

천주산은 함안군 칠원면 작대산(687m)과 한 줄기다. 작대산은 옛 칠원 고을의 진산이다. 천주산과 작대산은 지금은 따로 불리지만 조선시대에는 따로 구분하지 않은 것 같다. 천주산의 옛 이름이 청룡산(靑龍山), 첨산, 담산(擔山), 작대산(爵大山) 등인데, 이들이 한 문헌에 서로 다른 산으로 동시에 등장하기도 했다. 창원시 서상동에 있는 남산공원에 올라 천주산 쪽을 바라보면 옛 창원 고을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었을지 상상할 수 있다.

천주산을 중심으로 이뤄진 지맥을 청룡산맥이라 한다. 청룡산맥은 창원 분지를 서쪽에서 감싸고 있다. 청룡산맥은 남쪽으로 무학산(舞鶴山)과 연결된다. 무학산은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최고봉으로 이견 없는 옛 마산시의 대표 산이다. 남쪽으로 만날고개가 있는 대곡산(517m)으로 이어지고, 여기에서 다시 대산(726m), 광려산(723m), 봉화산(388m)등으로 연결된다. 무학산의 옛 이름은 두척산(斗尺山). 조선시대 마산 지역에 조창이 있었는데, 말(斗), 척(尺)은 쌀과 관련된 단위다. 무학산이란 이름은 신라 말 최치원(857~?)이 학이 날개를 펴고 춤추는 것 같다고 해서 붙였다고 전한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을 아울러 '삼진'이라 부른다. 이곳은 조선시대 진해(鎭海) 고을이 있던 곳이다. 지금 창원시 진해구와 이름이 같지만, 아무 관련이 없다. 진해 고을 관아가 있는 읍치는 현재 진동면 진동리 일대에 있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취산(鷲山)이다. 지금 진동면 교동리 마산향교를 품은 수리봉(405m)을 말한다.

123.jpg
▲ 마산합포구 진동면에 있는 수리봉. 옛 진해현의 진산이다. / 유은상 기자

정병산이 속한 전단산맥은 동남쪽으로 대암산, 불모산, 웅산을 통해 진해로 연결된다. 불모산과 웅산 사이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어 나간 장복산(593m)은 마산-창원-진해 환상구조의 중심이다. 북쪽으로는 창원 분지를 감싸고 남쪽으로 진해만을 굽어본다. 삼한시대 장복(長福)이라는 사람이 이 산에는 무예를 익혔다는 전설에서 지명이 유래했다. 혹은 장(長)이란 글자가 중심을 뜻하는 '알, 얼'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보고 '중심 산'이라는 뜻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마산, 창원, 진해 전체를 하나의 환상구조로 보는 시각과 비슷하다.

웅산(熊山)은 옛 웅천 고을의 진산이다. 웅천 고을은 현 진해구와 부산 가덕도까지를 포함했다. 현재 진해 도심은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것이고 원래 읍치는 진해구 웅천동 일대였다. 웅천왜성이 있는 산을 남산(南山·185m)이라고 하는 것도 옛 읍치의 남쪽에 있었던 까닭이다. 웅산은 순우리말로 곰뫼(곰메)다. 시루봉 정상에 우뚝한 바위를 '곰메 바위'라 하는데 곰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바위에서 산 이름이 나왔다. 이후 시루떡처럼 생겼대서 시루봉이라고 부르지만 옛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곰 바위'로 부르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곰 바위는 한눈에 봐도 꽤 영험한 모양이다. 신라시대부터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말기 명성 황후가 순종을 낳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비는 백일기도를 이곳에서 올렸다고 한다.

123.jpg
▲ 밀림 같은 웅산가는 숲길. / 유은상 기자

안개구름 걷히니 한 폭의 산수화

경남 최대 도시 창원. 도내 최고 인구, 대규모 국가공단, 많은 상업시설 등이 떠오르지만 자연환경 또한 뛰어나다. 다만,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지냈을 뿐이다.

창원은 통합 이후 넓어진 면적만큼 많은 명산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넓은 해안선을 끼고 있어 대부분 산에서 시원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어떤 산을 선택해 소개할까 하는 고민도 쉽지 않았다. 창원, 진해, 마산 지역마다 대표하는 산이 있고 특색도 다르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지역 차별에 대해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창원지역 산맥 종주를 생각했지만 무더위와 '저질 체력'을 핑계로 가차 없이 접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불모산에서 시루봉(진해구)까지 구간이다. 창원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면서, 지금 시기에 바다 풍경을 즐기면서 산행하지 좋은 곳이라 판단했다.

창원에서 가장 높은 산

불모산(佛母山·801.7m)은 창원시 성주동과 웅동, 김해시 장유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한 낙남정맥의 한 자락으로 창원 분지 동쪽에 형성된 산이다. 북서쪽으로는 정병산, 비음산, 대암산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장복산, 남쪽으로는 웅산, 시루봉으로 이어진다. 창원에서는 유일하게 해발고도 800m를 넘는 산이다.

불모산은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후를 기려 붙인 이름으로 잘 알려졌다. 허황후의 일곱 왕자가 모두 스님이 된 까닭에 허황후를 불모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에는 부을무산(夫乙無山)으로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취무산(吹無山)으로 기록돼 있다. 불모산이라는 이름은 1530년 발간된 <신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부을무산에서 '부을'은 서쪽을 뜻하는 '불'을, '무'는 산을 뜻하는 '뫼'의 변형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취무산의 '취' 역시 서쪽을 뜻하는 '불'을, '무' 또한 '뫼'의 변형된 표기인 셈이다. 이를 종합하면 불모산은 금관가야의 수도 김해에서 바라볼 때 '서쪽에 있는 산'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 더 신빙성 있다.

123.jpg
▲ 웅산 시루봉에서 본 눈부신 진해만. / 유은상 기자

산행은 장유 쪽에서 시작하는 임도를 따라 올랐다. 정상에 있는 방송·통신시설 덕에 시멘트 포장이 잘 닦여 있어 발걸음이 가볍다. 대신 오랫동안 비슷한 길을 걷다 보면 단조롭고 지겨운 생각이 들지만 4분 능선을 지나면서 김해 쪽 전망과 창원 쪽 전망이 차례로 열리면서 나름의 묘미를 일깨운다. 산악자전거 유명코스인 만큼 자전거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도 적잖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힘들게 오른 정상은 시원한 전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9분 능선부터 안개구름이 짙어지면서 20∼30m 앞도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상 아래쪽에서 만난 소나무는 안개 덕분에 몹시 운치 있다. 동행한 이서후 기자는 "신선이 된 것 같다. 정동진 고현정 소나무보다 훨씬 품위 있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정상은 군부대와 방송사, 통신사 안테나가 뾰족이 솟아 있어 눈을 찌른다. 또 이들이 정상자리를 차지하면서 철조망 안의 정상 표지석도 군부대에서 사진 촬영을 막느라 천막으로 덮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정상은 창원시가 그 아래 만들어 둔 노을 전망대에서 만끽해야 하지만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니 역시 무용지물이다.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 하지 않았던가. 좋은 풍경을 전하고자 20여 분을 더 기다렸지만 끝내 하늘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을 맞고 있자니 풍욕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습습한 습기에 몸은 다소 축축해졌지만 시원한 바람에 세상 근심이 다 씻긴 듯 마음은 한층 가벼워졌다.

웅산과 시루봉

정상에서 내려와 철조망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걷는다. 고도가 내려간 덕인지 수평으로 선을 그는 묵직한 구름 덩어리 아래로 용원과 부산신항 쪽 경치가 지나는 안개 사이로 틈틈이 예고편처럼 노출된다.

웅산에서 만나게 될 풍경에 대한 기대는 점점 높아지고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진다.

그러나 금세 숲길에 접어들면서 가득 내려앉은 습기 탓에 길이 꽤 미끄럽다. 산길 주변에 독버섯들도 군락을 이루고 있어 꼭 열대밀림 지역에 온 느낌마저 든다.

30분가량 걸었을까? 장복산으로 이어진 산자락이 합류하는 지점을 지나면서 구름에 덮여있던 하늘이 맑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123.jpg
▲ 시루봉. / 유은상 기자

뒤를 돌아보면 장복산 지맥이 왼쪽 옛 진해와 오른쪽 옛 창원을 가르며 대조적인 모습이 펼쳐진다. 진해가 군사도시라 하지만 삼엄함이나 긴박감 없이 오히려 더 평온하다. 아무래도 바다 때문일 테다.

웅산에 가까워질수록 바위 능선 구간이 많아진다. 앞에 걸었던 숲길이 싱그러움을 줬다면 이곳은 바위를 오르내리는 아찔한 재미를 전한다.

특히 진해 방향으로는 절벽 구간이 많아 화면이 더 넓어지면서 입체감까지 깊어진다. 여기서부터는 시원한 바다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면서 산행을 할 수 있다. 멀리 거가대교가 미니어처처럼 보이고 바다 너머 거제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바다를 중심으로 보면 한 동네나 다름없다.

웅산(熊山·709.8m)에는 정상 표지석이 2개나 설치돼 있다. 웅산은 웅동, 웅천 지역의 진산으로 장복산, 불모산에서 이어진 줄기가 김해와 경계를 이룬다. 잠시 숨을 고르고 발길을 옮기면 곧장 706봉이 나오고 다시 현수교를 지나면 시루봉이 눈앞을 막아선다. 1시간도 채 안 걸리는 거리다.

시루봉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어떻게 높이 10m, 둘레 50m의 바윗덩어리가 산 정상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을까? 생성 원인을 설명하며 화산작용, 침식작용 등 과학 용어가 동원되지만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누군가가 쌓았거나 옮겼다고 하는 것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질 정도니 옛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신라시대에는 국태민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고, 고을에서 봄가을 대제를 지낼 때는 '웅산신당'을 두어 산신제를 지냈다고 전한다. 또 근대에는 명성황후가 세자 책봉 후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웅산의 명칭은 시루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일명 곰산으로 산꼭대기 바위 형상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곰과 같다고 해서 유래했다고 <한국지명유래집>은 전하고 있다. 곰실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떡 시루를 쌓은 것처럼 보여 시루봉이라 불렀다. 곰실바위가 있는 산 전체가 웅산이 된 것이겠다.

하지만 인터넷 지식 백과와 각종 산행 기사에서는 1.7km가량 떨어져 있는 웅산과 시루봉을 구분 없이 표기하면서 혼동을 주고 있다. 이를 확인하고 바로 잡는 것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삶터를 지키는 진산

마무리

지난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지리산을 올랐다. 능선을 탄 것도 아니고 그저 오르내리기만 했을 뿐인데도 산은 그렇게 아득한 곳이었다. 지리산을 시작으로 지난 열 달 경남 지역 산을 찾아다녔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산은 멀리 있지 않았다. 도심이나 시골이나 고개를 들면 산이 보였다. 산을 올라보면 어디나 품속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렇게 삶터와 산을 연결하는 개념이 진산(鎭山)이다. 따지고 보면 <경남의 산> 시리즈는 진산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했다. 마지막 편을 통해 삶터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우리 고장을 지켜 온 진산이 어디인지 알아보자. 이를 통해 잃어버린 옛이야기를 찾게 된다면 더욱 의미가 있겠다.

123.gif
▲ 김정호 <대동여지도>위에 표시한 경남 지역 진산.

삶의 역사 품은 진산 가치 복원해야

"그래, 열 달을 돌아다녀 보니 우리에게 산은 무엇이던가요?"

<경남의 산> 연재를 마무리하며 다시 만난 경상대 명산문화연구센터 최원석(54) 교수가 던진 질문이다. 산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산과 인간의 관계를 물어온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진산(鎭山)이다.

진산은 조선시대 기초 행정단위인 군현(오늘날 시·군)마다 하나씩 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이다. 조선 중기를 기준으로 전국 331개 고을에 255개 진산이 있었다. 조선후기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보면 고을마다 진산이 표시돼 있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 산을 큰 나무처럼 그렸다. 뿌리는 백두산이고 등줄기는 백두대간이다. 줄기마다 다시 뻗어 나간 큰 가지가 13개 정맥이다. 여기서 다시 잔가지가 전 국토에 퍼져 있다. 가지 끝에 꼭지가 있고 꼭지 끝에 열매가 맺혔다. 그 열매가 330여 개 고을이고, 꼭지가 바로 진산이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간 산줄기를 긴 호스에 비유해봅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호수 끝에 달린 수도꼭지겠습니다.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산줄기가 아주 좋아 봐야 소용없지요. 이 수도꼭지가 바로 진산이고, 시·군마다 있는 주요한 명산이죠. 이 꼭지를 잘 보살펴 소통이 잘 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549270_419014_1932.jpg
▲ 하동고을 진산 구재봉에서 본 섬진강과 악양들로 퍼지는 노을. / 유은상 기자

진산은 기본적으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산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진산은 한 고을의 공간구조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와 같은 거지요. 진산을 축으로 해서 도로라든지 조선시대 관아라든지 생활공간 등이 배치되고 그 축이 지금까지 유효한 경우가 많죠. 그래서 나중에 조선후기 <여지도서>에서는 진산이 주산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고을을 수호하는 산에서 고을의 주가 되는 산으로 진화한 것이죠."

이렇게 진산은 주민의 삶과 생활, 의식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주산이면서 지역 정체성과 문화역사의 중심축이 된 것이다. 진산과 이어진 고을 공간에서 모든 게 어우러지고 빚어져서 '지방색'이란 것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산과 삶터로서의 마을 공간이 통합되는 것은 아주 한국적인 특징이다. 그만큼 산이 주민의 삶과 관계가 깊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삶터와 함께하던 진산 개념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 부분 파괴된다.

"근대화되면서 특히 일제강점기에 도시 구조가 침탈을 당하죠. 읍성이 파괴되고 핵심 공간을 일본인이 점거하면서 전통적인 부분도 많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전쟁까지 겪으면서 산과 삶터에 관련된 개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수준까지 오죠."

123.jpg
▲ 최원석 교수. / 유은상 기자

최원석 교수가 산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 오랜 삶터와 관련된 진산의 가치를 복원하려는 뜻이기도 하다.

"10년을 생각하고 7~8명의 동료가 함께 진산 연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단은 가치를 발굴하고 복원해 놓으면 앞으로 연구를 할 건 하고 보존할 건 하고 이렇게 할 수 있겠죠. 이제 산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질 시기가 된 거 같아요. 지금까지는 대체로 생태 중심, 등산 인구 중심으로 산을 다뤘다면, 이제는 역사 전통적 가치를 살려야 하는 거죠."

이런 의미에서 최 교수는 <경남의 산>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산을 인문학적으로 다룬 취재라고 평가했다. 물론 진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찾아보려는 초반의 야심 찬 의도에는 한참 모자라긴 하다. 관련 자료나 증언을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쉽지 않죠. 우리가 하는 진산 연구도 아직은 기초자료를 모으는 수준이에요. 하지만, 실제 기사를 보면 연구에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경남의 산> 같은 기사가 파급이 되어서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기획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찾아보면 다들 얼마나 이야기가 많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 같은 존재다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간다." 거창군의 산을 소개하면서 인용한 말이다. 중앙관리가 발령을 받으면 너무 멀고 불편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왔다가 임기가 끝나 떠날 때면 인정과 산수에 반해 떠나기 싫어 울었다는 내용이다.

이 말이 지금 기획을 마무리하는 심정과 가장 잘 들어맞는다. <경남의 산> 취재도 병행하라는 지시를 받고는 '하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데 또 다른 일까지 하라니'라는 불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어느 순간 일상에 지친 나에게 산은 쉼표 같았다. 스트레스를 많은 받은 어느 날에는 산 취재가 몹시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산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10개월가량 산을 찾으면서 산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짙은 구름에 가렸던 지리산, 남덕유산, 가야산은 정상에 오를 때쯤이면 신기하게 하늘이 열렸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가 산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그친 적도 두어 번이다. 또 갈 때마다 아름다운 노을과 일출을 허락해줬다. 산의 도움으로 무탈하게 취재를 마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다. 다만, 그 고마움에 보답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더불어 이번 취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어느 산이 좋았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다 좋다. 때에 따라 매력이 다르니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답을 자주 했다. 사실 기획에서 소개한 산은 경남은 물론 우리나라 어느 산과 비교해도 빠짐이 없는 곳이니 평범하지만 당연한 말이다.

123.jpg
▲ 더 나은 사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유은상 기자. / 유은상 기자

그렇지만, 기획을 끝내면서 그동안 질문을 던졌던 이들을 위해 과감하게 고백한다. "개인적으로는 황매산이 좋았다"고.

다시 돌아올 '왜?'라는 질문에도 미리 답한다. "황매산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기암괴석이 감탄을 자아내는 모산재, 이국적인 넓은 초원, 또 봄이면 진분홍으로 물드는 철쭉 평원,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전망, 가을 황금 억새 물결,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눈 내린 풍경은 또 어떤가. 언제 찾아도 어느 때 만나도 그 풍경은 가슴을 흔들었다."

그렇다고 산을 취재하면서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슴이 아픈 풍경도 적지 않았다. 인간의 욕심에 난도질당한 산의 모습 때문이다. 도심과 가까운 산이거나 유명 산 양지 자락에는 어김없이 펜션과 전원주택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어떻게 허가가 났을까?' 의아할 정도로 상식을 넘어서는 경우도 많았다. 대규모 송전탑의 행렬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욕심만 챙기고자 숲을 해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그래도 산은 끝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내어준다. 항상 곁에서 보듬어주지만 우리는 그 존재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산은 어머니 같은 존재다.

산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네

<경남의 산> 시리즈 마지막 취재 장소는 산이 아니라 들판이었다.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북부리 뒤편 낮은 등성이. 이곳 정상에 500살 넘은 큰 팽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나무 아래 서서 대산면 너른 들판을 바라봤다. 여기저기 야트막한 동산에 기댄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삶터를 중심으로 지형을 살피는 풍수지리에서는 땅에서 조금만 높이 솟아도 산이라고 본다. 대산면 마을이 기댄 낮은 언덕도 산(山)이다. 깎아지른 벼랑이나 까마득한 높이의 절경은 없지만 자신에게 기대 사는 주민을 가만히 품은 모양에서 아늑함과 안정감을 준다.

몇 해 전 네팔 히말라야를 한 달 정도 돌아다닌 적이 있다. 해발 5000m 이하는 산으로 부르지도 않는 곳이다. 비현실적으로 우뚝 솟은 산은 물론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했다. 네팔 사람이 산 자체를 신으로 여기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런 풍경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작고 외로운 존재였다.

123.jpg
▲ 대산 동부마을. / 유은상 기자

귀국해서 집으로 가는 길, 가만히 주변 산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다정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한국인에게 산이란 이렇게 손을 내밀면 금방 닿을 수 있고, 언제나 품속에 폭 안길 수 있는 곳이다.

지난 열 달 동안 찾아다닌 경남지역 진산(鎭山·조선시대 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삶터를 바짝 끼고 들어앉아 있었다. 아니 그 자체가 삶터였다. 지금은 그저 이름 없는 동네 뒷산으로만 남거나, 아예 사라진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대부분 진산은 주민이 산책을 하거나 운동 삼아 자주 찾는 곳이 돼 있었다. 예컨대 진주 진산 비봉산이 그랬고, 산청 진산 무척산이 그랬다.

생각해보면 이 좁은 국토에 5000년 이상 사람이 살아왔다. 삶터는 주로 산에 기대 형성됐다. 하여 경남지역이 아니라도 이 땅 어느 산하나 사람과 관련한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앞으로 <경남의 산> 시리즈를 시작으로 이런 이야기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이 이어지면 좋겠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