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양못에서 위로받다

추석 연휴 동안 모터사이클을 타고 밀양에 있는 위양못에 잠시 다녀왔다. 위양못은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 귀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잡고 있다. 인근을 지나는 지방도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면 그곳에 저수지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저수지 둘레를 따라 서 있는 왕버들만 눈에 들어온다. 못 가까이 다가가서야 비로소 조용히 물을 담고 있는 저수지가 보인다. 저수지를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고 한 바퀴 돌아보면 '평화', '여유' 같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는 곳이다. 위양못은 나에게 길고 길었던 추석 연휴 동안 큰 '위안'이 되었다. 지금부터 왜 위안이 되었는지 얘기하고자 한다.

추석 연휴

올해 추석 연휴는 어느 해 보다도 길었다. 주말과 국경일, 추석 연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평일이 하루 끼어 있어 긴 연휴가 완성되지 못할 뻔했는데 정부가 내수 경기를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앞세워 그 평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함으로써 긴 연휴가 완성됐다. 직장인으로서는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만세를 부를 수는 없었다. 사실 정부가 평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공무원, 은행원, 대기업 직원 정도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직원들은 쉬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일부 국민들만을 위한 '임시공휴일'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었다. 다행히 신문사는 납품 기일을 지켜야 하거나 매일 음식이나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기업은 아니어서 임시공휴일에 쉴 것인지 말 것인지 제조중소기업이나 자영업 종사자들이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됐다.

123.jpg
▲ 3년 동안 함께 함께 달린 모터사이클 BMW R1200RT. / 조재영 기자

 

하지만 신문사라고 해서 고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문사는 매일 신문을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보내줘야 하는데 연휴가 길면 신문발행일수가 줄어들게 된다. 독자들은 다른 달에 비해 훨씬 적게 신문을 받아보고도 같은 구독료를 내야 한다. 혹자는 "그러면 신문발행일수에 따라 구독료를 받으면 될 것 아니냐"라고 할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 신문 배달 시스템과 구독료 납부 시스템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우리 신문사는 매주 월요일 오후에 주간 간부 회의를 하는데, 임시공휴일에 신문을 발행할 것인지가 여러 주에 걸쳐 안건으로 논의됐다. 그만큼 신문사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 결론은 임시공휴일 신문을 발행하되 연휴에 들어가기 전에 신문을 미리 제작하기로 했다. 그러면 독자들은 임시공휴일에도 평소처럼 신문을 받아볼 수 있고 신문사 구성원들은 연휴 중간에 출근해서 일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덕분에 우리 신문사 편집국 기자들의 추석 연휴는 남들보다 하루 더 빨리 시작됐다. (물론 남들보다 하루 빨리 연휴가 끝난다.)

단 하루의 '은총'

금요일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그동안 평일에 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3일을 보냈다. 추석 하루 전날인 화요일에는 벌초를 해야 했다. 다른 해에는 추석이 되기 2~3주 전에 3형제와 조카들이 모여서 벌초를 했는데 올해는 그 시기에 작은형님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가는 바람에 날을 잡지 못했다. 마침 추석 연휴가 길어서 하루 전날 모두 모여서 벌초를 하기로 했다.

추석 다음 날인 목요일부터 그 다음 주 월요일까지 연휴가 이어졌지만 금토일 3일간 각시가 지인들과 2박 3일 여행을 가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목요일은 가족이 함께 당일치기 여행을 하기로 한 날이었고 월요일은 내가 출근하는 날이었다. 결국 그 길었던 추석 연휴 동안 내가 혼자서 모터사이클을 탈 수 있는 날은 추석 이틀 전날, 그 하루뿐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라이더 중에는 강원도 철원까지 모터사이클 여행을 다녀온 이들도 있고, 일본까지 건너가 몇 곳을 여행하고 온 이들도 있다. 그에 비하면 추석 연휴 동안 나의 모터사이클 라이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23.jpg
▲ 위양못 둘레에 있는 왕버들 아래에서 완재정을 바라보는 풍경. 봄에는 저 섬에 있는 이팝나무가 새하얀 꽃을 피운다. / 조재영 기자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딱 하루 내게 '신의 은총'이 주어진 그 날, 하필이면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다. 난감했다. 멀리 갈 수도 없었다. 모터사이클 가방에 항상 비옷 한 벌을 넣고 다니기 때문에 비가 온다고 해서 여행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길고 긴 연휴 중에 하필이면 내가 라이딩하기로 한 날 비가 내린다는 것은 참 김빠지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제대로 당일치기 여행을 하겠다는 욕심에, 하루 전날까지 전라도나 경상북도쯤에 다녀올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찾아봤다. 하지만 결국 당일 아침에 3시간 단위로 알려주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는 이 생각을 접었다. 점심 무렵 이후부터 비가 내리는 것으로 예보되었다. 해가 지고 귀성차들로 막히는 도로에서 처량하게 비를 맞으며 복귀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멀리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이면서도 내가 가보지 않은 곳 중에 밀양 위양못이 생각났다. 블로그 이웃 글이나 모터사이클 인터넷카페에서 가끔 보았던 곳이다. '위양못', '위양지'로 검색하면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밀양시 위양못

목적지를 가까운 곳으로 정했으니 여유롭게 움직여도 괜찮았다. 원두커피를 갈아 한 잔 내려 마시고서야 안전 장비를 챙겨 천천히 집을 나섰다.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있는 위양못은 신라시대 때 농지에 물을 대고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위양은 양민을 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인 1643년에 밀주(밀양) 부사 이유달이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못 안에는 작은 섬이 여러 개 있는데 모두 다리로 이어져 있고 섬 두 군데에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건물이 지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완재정이다. 정자의 크기가 아담하고 정자를 둘러싼 원형의 담도 정겹다. 무엇보다 못 가운데 조그만 섬 위에 앉아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리고 완재정 안에서 사방 밖을 바라보면 그 역시 보는 방향마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정면에는 넓은 못 수면이 물풀로 덮여있고 그런 수면 위에서 백로가 아주 조금씩 이동하며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뒤편에는 못 밖에서 이곳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와 못 둘레를 따라 심어놓은 왕버들이 눈에 들어온다. 왕버들 사이에 내가 타고 온 모터사이클도 서 있다. 오래되고 굵게 휘어진 줄기에서 긴 머리를 수면 쪽으로 늘어뜨린 왕버들과 금방이라도 로봇으로 변신할 듯한 모양새인 BMW 모터사이클이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왕버들과 모터사이클은 원래부터 그렇게 한 무더기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못 둘레에는 산책할 수 있도록 길이 나 있다. 천천히 걸으면서 바라보면 위양못은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너무 바쁘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위양못에 가서 여유롭게 못 둘레를 걸어보길 권한다. 그 길을 걷는다고 해서 무엇인가 크게 바뀔 일은 없겠지만 잠시라도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23.jpg
▲ 완재정 문 밖으로 보이는 남쪽 풍경이다. 건너편에 둘레길이 있다. / 조재영 기자

 

위양못에 좋은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못 둑에서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일부는 석조여서 그럭저럭 어울렸지만 일부는 쇠로 만든 다리여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욕심 같아서는 전부 옛날식 나무다리나 돌다리로 바꿨으면 싶다. 밀양시 혹은 농어촌공사 등 관리청이나 건물소유자 측이 협의해서 옛날식 나무다리나 돌다리로 새로 만들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주차장 한쪽에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천사 날개를 단 의자가 놓여 있다. 통영 동피랑 같은 벽화마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날개다. 그런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이디어를 낸 분은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한 것이겠지만 이곳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 한 가지가 더 눈에 거슬렸다. 휘어져 자란 왕버들에 사람들이 많이 올라갔는지 껍질이 벗겨지고 드러난 속살이 반질반질하다. 이것 역시 사진을 찍으려고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백 년 된 나무에, 그것도 이젠 늙어서 줄기가 썩어가는 나무에 함부로 올라가 나무를 망가뜨리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팝나무

위양못에는 왕버들 말고도 5월에 새하얀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가 있다. 이팝나무가 꽃을 피우는 5월의 위양못 풍경은 그림같이 아름답다고 한다. 이번에는 10월이지만 다시 위양못을 찾아올 때는 5월에 오리라 생각했다. 위양못에서는 평온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빗방울이 떨어졌다. 수초로 덮이지 않은 수면에 점점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결국 긴긴 연휴 동안 모터사이클을 탈 수 있었던 것은 한나절도 아니고 겨우 반나절 뿐이었다. 그 반나절 마저도 없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숨이 막히거나 좀이 쑤셔 반쯤 정신이 나가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반나절 '위안'의 가치는 크다. 반나절이라도 즐길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 하하하.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