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브라운의 'The Load-Out&Stay'

밤이 깊어가는 무렵 느닷없이 방문해, 마감 시간까지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넋두리로 권주가 삼아 즐기는 친구가 있다. 그가 올 때면 빼놓지 않고 들려주는 곡이 있는데, 노래를 듣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진중해 보여 무슨 사연이라도 있을 것만 같았으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그 노래를 감상하던 친구가 노래에 대한 사연을 풀어 놓았다.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운명과도 같은 노래였다고 말했다.

제대 후 우연한 기회에 과학원에 대한 정보를 얻은 그는 과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준비에 지쳐갔다고 하는 그.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한적한 벤치에 앉아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보고 있는데, 교정의 스피커로 한 곡의 음악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처음 들어 보지만 낯설지 않은, 그런 느낌의 노래였다. 가만히 가사의 내용을 음미해보니 자신의 처지를 위로해주는 노래로 들렸다. 이후 흔들릴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물론 좋은 결과가 있어 현재까지도 재료연구소에서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만,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의 'The Load-Out&Stay'는 변함없이 자신을 지탱해준다고 한다.

123.jpg
▲ 5집 앨범 Running On Empty.

1970년대 미국의 대표적 반핵, 반전 가수로 활동하며 포크와 컨트리 록을 적절하게 융합한 잭슨 브라운은 1948년 10월 9일, 독일(당시 서독) 남서부 바텐뷔르템베르크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독일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던 아버지가 전역하며, 미국 서해안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장기 대부분을 서부지역에서 보낸 잭슨 브라운은 웨스트 코스트(미국 서해안지역)풍의 포크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966년 서니 힐스 고등학교(Sunny Hills High School)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잭슨 브라운은 1967년에 팀 버클리(Tim Buckley)의 도움으로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로 옮긴 후, 밴드반주와 곡 만드는 작업을 병행하며 팝계로 진출했다. 이를 계기로 엘렉트라 음반사(Elektra Records)와 전속작곡가 계약을 맺으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온 그는 톰 러쉬(Tom Rush)의 제안으로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버즈(Byrds), 브리워 앤 쉬프리(Brewer&Shipley) 등 서해안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명 아티스트들에게 곡을 제공하며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때 톰 러쉬의 협조로 어사일럼(Asylum) 레코드사와 계약이 성공하자, 1972년 1월 마침내 자신의 데뷔앨범 <Jackson Browne>을 발표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싱글 'Doctor My Eyes'가 히트하면서 인기를 얻는다. 또한 우정이 두터웠던 글렌 후레이(Glenn Frey)와 함께 이글스(Eagles)의 데뷔 싱글 'Take It Easy'를 작곡함으로써 유명세를 더했다. 1973년 10월 두 번째 앨범 'For Everyman'을 발표했고, 1974년 'Late For The Sky'를 출시하면서 첫 골드음반을 따냈다.

잘나가던 잭슨 브라운에게 음악 생활을 뒤흔드는 불운이 갑작스레 닥쳐왔다. 1975년 말 오랫동안 사귀어 온 배우 겸 모델인 필리스 메이저(Phyllis Major)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3월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공연장에서 아내의 자살 소식을 들은 그는 충격에 빠졌다. 바쁜 음악 활동으로 가정을 등한시하지 않았느냐는 주변의 비난은 그를 더욱더 깊은 좌절감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진행 중이던 앨범 'Pretender'의 작업을 강행했다. 이때 장모님이 생전의 딸 일기장을 그에게 건네주었고, 아내가 남긴 내용을 가사로 한 'Here Come Those Tears Again'을 앨범에 담아 발표해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슬픈 마음을 나타냈다. 강력한 호소력으로 아내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느낌을 표현한 이 음반은 앨범 차트 Top 10에 진입하면서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1977년 대규모로 치러진 전미 순회공연을 마친 잭슨 브라운은 자신의 공연을 위해 수고했던 스태프들과 운전기사, 짐꾼, 백 보컬, 엔지니어 등 많은 사람들과 애환을 나누며 경험했던 기억을 한 곳에 모아 콘셉트 앨범 'Running On Empty'를 발매한다. 1978년 앨범 차트 3위를 차지하며 플래티넘을 기록한 이 음반은 주로 라이브 스테이지와 달리는 버스 안, 시골의 모텔방 등에서 녹음하고 기획한 특이한 앨범으로, 순회공연 틈틈이 녹음하여 완성했다. 이 앨범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민요가수이자 연주자로 유명한 데이빗 린들리(David Lindley)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이 앨범 끝부분에 수록된 'The Load-Out'과 'Stay'는 각각의 트랙으로 구성됐으나, 절묘한 연결을 통해 한 곡처럼 들린다. 공연을 마친 뒤 장비를 챙기는 노동자들과 또 다른 공연장을 찾아서 떠나는 밴드의 여정을 그린 'The Load-Out', 공연이 끝난 후 훌쩍 자리를 떠나는 관객들에게 노래 한곡 더 부를 수 있게 머물러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내용인 'Stay'를 개사·편곡해 두 곡을 어우러지게 했다. 그리고 잭슨 브라운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간주곡 사이에 등장하는 게스트보컬 데이빗 린들리의 가성창법이 조화를 이뤄 팝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123.jpg
▲ 잭슨 브라운.

이 곡들이 연곡으로 발매하게 된 재미난 사연이 있는데, 어느 라디오 방송의 DJ가 9번째 트랙 'The Load-Out'을 틀어놓고 깜빡했는지 10번째 트랙인 'Stay'까지 계속 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애청자들이 마치 한 곡을 듣는 것처럼 좋은 반응을 보이자, 여러 라디오 DJ들은 아예 이 두 곡을 메들리로 내보냈다. 두 곡이 함께 방송되니 빌보드의 인기순위도 덩달아 똑같았다. 그러자 잭슨 브라운은 두 곡을 이어 부른 싱글앨범 'The Load-Out&Stay'를 1978년에 서둘러 발표했다.

잭슨 브라운 최고의 음반이 된 'Hold On(1980)'을 비롯해 1982년 영화 '리치몬드 연애소동(Fast At Ridgemont High)'에 삽입되었던 'Somebody's Baby'가 빌보드 싱글 차트 7위에 오르면서 데뷔 이후 최고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미국 젊은이들에게 영웅적인 존재로 웨스트 코스트의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던 잭슨 브라운은 이후 반핵, 반전운동가로 활동하면서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녹슬지 않은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추구했던 새로운 연구를 위해 긴 여정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에게, 잭슨 브라운의 노래로 대신 응원의 마음 전한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