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후 지음
묵묵히 걷다보니 위안이 된 그 길
저자 1년간 바래길 벗삼아 발걸음
책장마다 펼쳐지는 남해 '보물들'
고샅고샅 '삶·풍경' 마음 채워줘

쪽빛 흩날리는 바다가 줄곧 펼쳐진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은 내내 앞길을 비춘다. 초록의 생기를 잃지 않는 산도 때때로 품을 내어 준다. 계절 따라 다른 온기를 품은 바람도 허공에 섞인다. 오랫동안 서로 곁을 지킨 듯 자연스러운 풍광이다. 그 배경을 벗 삼아 발을 내딛는다.

해안 따라 이어진 능선과 논밭 사이로 굽이굽이 거닌다. 억지로 잇지 않은, 자연이 내어 준 길. 풍경마저 느리게 흐르는 곳. 남해 바래길이다.

바래는 썰물로 드러난 갯벌에서 해초류와 해산물을 캐는 작업을 말한다. 남해 토속 말이다. 가족의 먹을거리를 위해 다니던 바래길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았던 남해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느 날 직장을 때려치우고 몇 년을 방랑자로 살았다는 그가 길 위에 섰다. 경남도민일보 기자이자 스스로 '일상 여행자'로 칭하는 저자 이서후. 이번엔 소소한 일상을 잠시 벗어나 바래길로 향했다.

2010년에 조성된 남해 바래길은 현재 10개 코스가 열려 있다. 1코스 다랭이지겟길, 2코스 앵강다숲길, 3코스 구운몽길, 4코스 섬노래길, 5코스 화전별곡길, 6코스 말발굽길, 7코스 고사리밭길, 8코스 동대만진지리길, 13코스 이순신호국길, 14코스 망운산노을길로 나뉜다. 8코스 진지리길은 아직 왼성되지 않아 이정표 등 표지가 세워지지 않았다.

바래길에는 낯설지 않은 명소가 길객을 맞이한다.

가파른 산비탈 따라 계단식으로 들어찬 다랑논과 기암괴석으로 덮여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금산, 은빛 모래의 상주해수욕장 등 잘 알려진 관광지는 풍경마저 익숙하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숨결이 담긴 관음포와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였던 노도, 자암 김구가 귀양살이를 통해 <화전별곡>을 지었던 노량마을 등 역사와 문화가 깃든 곳도 더러 만날 수 있다.

여태 우리가 알던 남해는 극히 일부였다. 걸을 때마다 미처 몰랐던 남해의 '속살'들이 감동이 되어 안긴다.

7코스 드넓은 고사리밭 너머 펼쳐진 '하늘하늘 언덕'은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는 강진만의 환상적인 일몰도, 망운산에서 내려다보는 노을도 보물섬 남해가 품은 '숨은 보석'이다.

언덕과 해변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깊숙한 산길과 차량이 달리는 콘크리트 길이 반복되는 바래길은 매번 가볍거나 편하지만은 않다. 그마저도 길 위에서 위안을 얻는다. 바다와 산과 들, 때 묻지 않은 자연과 끊임없이 마주하며 묵묵히 길을 밟는다.

바래길에서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도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늦가을 밭에서 시금치가 싹을 틔우고 마늘 줄기가 크는 남해는 한겨울에도 푸름이 가득하다. 마치 봄인 듯 계절을 잊게 하는 남해에서 바쁜 일상은 잠시 잊힌다. 오직 여유롭고 한가한 '느림의 미학'만이 마음을 채운다.

바래길에 걸친 마을 고샅고샅을 살피며 만난, 그곳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풍경에 따스함을 더한다. 홀로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길 위에서 외로워져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남해가 주는 매력은 깊고 다양하다.

어느덧 남해 한 바퀴를 돌아 1년 만에 멈춘 걸음. 섬 구석구석을 훑으며 수많은 이야기와 풍경을 발견했던 저자는 여행을 마치며 남해 사투리로 '남해 가시다' 작별을 고하지 않는다. 대신 '남해 바래길에 어서 오시다'를 마지막 책장에 남기며 언젠가 다시 찾을 그 날을 기약한다.

240쪽, 피플파워,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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