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사람 잇고 마음 나눠요"
고향 마산서 복합 전시회 '호응'
임대분쟁 카페 사연, 첫 영화로
창업 이후 영상·기획 활동 왕성

고등학교 졸업하고 스무 살 되던 해 무엇보다 신이 났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어서다. 한창 흥행 몰이하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 영화라도 나이 제한 탓에 번번이 마음을 접어야 했다. 대학생 타이틀을 달고 곧장 극장으로 달려갔다.

스크린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얼마 후 다시 밝아진 객석. 잔뜩 설레던 표정은 간데없고 무거운 표정이 드리웠다. 19세 이상 관람 등급을 붙인 만큼 작품 또한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부풀었던 기대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상에 한순간 무너져버렸다.

"충격 받았어요.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잔혹하게 나타낸 영화의 접근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일상 중 불쑥 잔상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새삼 예술의 역할과 표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정보경(33) 감독. 막연하지만 선명한 마음을 먹는다. 그만의 방식으로 따뜻하고 여운이 남는 영화를 만들기로.

정보경 감독. 문화예술 근거지이기도 한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단편영화 〈소금사막 the beginning〉 전시 작품과 함께. /문정민 기자

◇문화기획자로 첫발 내딛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정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영화팀 연출부 스태프로 활동한다. 부산, 서울 등에서 장편과 단편 각각 3편의 촬영 현장을 누비며 영화가 어떻게 준비되고 만들어지는지 몸소 배우며 터득한다.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는 실망도 따랐다. 열정적인 감독 사이에는 연출가로서 무책임한 이들도 있었다. 여러 생각이 겹치면서 고민이 깊어지던 정 감독. 결국 스태프 생활을 접고 국제 NGO를 통해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NGO 활동 후원을 동원하는 영상을 직접 찍고 편집하며 실력을 키운다.

어느덧 3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온 정 감독. 고향인 마산에서 일상을 보내던 중 지인의 그림에 시선을 뺏긴다. 네팔을 여행하며 스친 풍경을 색연필로 터치했다.

"따뜻하고 감성적이었어요. 혼자 보기 아까웠어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 싶었죠."

정 감독은 난생처음 전시회를 추진하게 된다. 단골이던 마산의 어느 카페에서. 수익금은 네팔 탄센 지역 어린이도서관에 기부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마침 전시회를 보러 온 꽃집 주인의 제안으로 2차 전시를 열게 된다.

정 감독은 단순히 보는 전시에서 네팔에 대해 적극적으로 느끼고 감성을 교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민다. 이른바 복합문화콘서트를 연다. 지역 인디밴드가 감미로운 음악으로 감성을 더했다. 전시회가 준비되는 사이 네팔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위로의 시'를 낭독하는 시간도 꾸몄다. 작가와의 토크도 진행해 관람객과 소통했다.

지난해에는 타지키스탄에서 머문 흔적을 바탕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현지에 있는 시각장애인 학교를 돕기 위한 취지를 살리기 위해 마찬가지로 음악과 영상, 문화가 흐르는 공간으로 꾸몄다. 정 감독은 그렇게 예술을 매개로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문화기획자로 발을 내딛는다.

2016년 5월 단편영화 〈소금사막〉 촬영장에서 연출을 맡은 정보경(맨 왼쪽) 감독. /정보경 감독

◇마침내 영화감독의 길로

생각지 못한 문화기획자로 나섰지만 사실 영화감독의 꿈이 먼저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잠시 미뤘을 뿐이다.

창원 마산회원구 합성동 여행카페 '소금사막'이 임대분쟁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정 감독은 응원 영상을 찍기로 한다. 단골이기도 했거니와 네팔 관련 첫 전시회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나누는 이 공간이 왜 필요한지, 카페가 부당하게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지 알리고 싶었죠."

정 감독은 영상을 기록하기 위해 방명록에 남겨진 글을 읽다가 하나하나의 사연에 마음이 동한다. 내친김에 생애 첫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마침 창원 지역에서 뜻에 공감한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지역단체와 시민 후원 덕에 지난해 5월 촬영을 마치고 편집, 후반 작업 끝에 드디어 15분짜리 단편영화 <소금사막 the beginning>이 탄생했다. 마산회원구 석전동주민센터에서 공식 상영회를 열기도 했다. 스틸컷, 촬영 소품 등 전시회도 마쳤다.

빠듯한 일정에 대다수 비전문가 손길로 만들어진 영화는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다. 중요한 건 함께 해냈다는 거다. 그것도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지역에서 청년들 힘으로 작지만 소중한 가치를 일궈냈다.

정 감독은 마침내 '감독' 명칭을 얻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얻었다. 혼자였으면 어쩌면 이루지 못할 일을 기본적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함께 도전했기에 가능했다. '소금사막'은 현재 주인 사정으로 문을 닫았다. 하지만 지역 청년들이 보여 준 '같이의 가치'로 그곳을 기억하는 이들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국제 NGO를 통해 타지키스탄에서 영상디렉터로 활동하는 정보경 감독 모습. /정보경 감독

◇문화로 잇는 꿈

정 감독은 경남창조경제혁신센터 지원 사업인 경남청년창업아카데미 2기로 선정돼 지난 8월 '미디어 랩 독감경보'를 창업했다. '독감경보'를 거꾸로 읽으면 보경 감독이다. 영화감독의 꿈을 품었던 시절부터 부르던 별칭이다. 주요 사업은 영상과 문화기획이다. 

문체부가 추진하는 '문화예술 소셜 다이닝'에도 선정돼 'MY story film'을 주제로 나만의 작은 단편영화 만들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공통 관심사를 가진 이들이 만나 밥을 먹으며 취미를 공유하는 문화다. 최근에는 문화사업단 '위메크'로도 활동하고 있다. 음악프로듀서, 보컬리스트 등과 의기투합해 문화콘텐츠를 발굴하고 기획함으로써 더 많은 문화예술을 지역민과 호흡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버지 뒤를 이어 4대째 사진가로 명맥을 이은 정 감독은 자연스레 예술을 접하며 재능을 키워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노력했기에 오늘날 명함에 문화기획, 디자인, 사진, 영화를 새길 수 있었다.

정 감독이 문화로 사람을 잇고 생각과 감성을 나누는 활동을 꾸준히 하는 이유도 꿈 때문이다. 문화예술로 꿈을 꿨고 문화예술로 꿈을 이룬 정 감독. 그는 여전히 꿈을 꾼다. 그가 만든 영화로 혹은 문화기획으로 누군가 삶의 방향을 정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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