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채린 청춘여행] (5) 바냐 체험기
러시아 전통 사우나 93℃ 열기로 후끈, 나뭇가지로 만든 도구로 온몸 후려쳐
소리 요란하지만 마사지 효과 '만점'

"1인당 2000루블이라고? 나는 못 가겠어. 미안해, 에브게니."

"2000루블이 많아?"

"화요일까지 3250루블로 버텨야 하거든."(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주변을 돌아다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저녁을 먹는 도중에 숙소 주인 에브게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숙소 이용객 혜택 중 하나는 바로 러시아 전통 사우나 '바냐'를 체험할 수 있다는 거였다.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사흘 동안 쓸 수 있는 예산의 절반이 넘는 돈을 내야 한다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러면 1000루블만 낼 수 있게 친구들을 더 모아볼게. 꼭 거기서 러시아를 발견했으면 좋겠어."

바다 쪽에서 바라 본 우리의 바냐. 창문으로 노을이 비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박채린

'러시아를 발견하다(discover Russia)'라는 표현을 들으니 이렇게까지 손에 덥석 쥐어진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려 깊은 에브게니 덕분에 나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바냐를 경험하게 됐다.

에브게니의 차를 타고 친구들을 더 태우러 갔다. 한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는 일레오노라(Eleonora)라는 예쁜 친구도 있었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녀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어서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곧 'PRIVATE'이라고 적힌 하얀 문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에브게니가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경비원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곧 문이 열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혼자 왔다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굉장히 멋진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나의 러시아 친구, 숙소 주인 에브게니(왼쪽)와 아름다운 일레오노라. /박채린

안으로 가니 한적한 곳에 나무로 된 오두막이 몇 채 있었다. 차를 세우고 짐을 챙겨서 그중 하나로 들어갔다. 까르르 웃는 소리에 안을 들여다보니 얼마전 친구들과 티파티 때 만난 아크윰네 가족도 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총 9명. 여자 친구들은 비키니로 갈아입고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구나, 이곳에서는 수영복 차림으로 사우나에 들어가는 거였구나.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와버린 나는 혼자 홀에서 우물쭈물하다가 속옷 위에 긴 반소매 티셔츠만 입고 들어가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93도의 사우나 열기로부터 머릿결을 보호하려고 펠트 모자를 하나 뒤집어썼다. 사우나실에 들어서니 다들 '어서 와! 여긴 처음이지?' 하는 눈빛으로 해맑게 웃어주었다. 2단으로 된 기다란 나무 벤치가 벽면에 놓여 있었다. 친구들이 자리를 만들어줘서 나도 그 사이에 앉았다. 바냐(Banya)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공중목욕탕(Public Bathhouse)'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가장 뜨거운 방 하나밖에 없는 찜질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급격한 온도 변화에 숨이 턱턱 막혔다. 친구들이 물을 건네주었고, 나는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감싼 채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1920년대 바냐를 묘사한 보리스 쿠스토디에프의 작품 '러시안 비너스'. 손에 든 자작나무 뭉치로 후려치며 마사지를 한다. /위키피디아

사우나 안에서는 촬영을 할 수가 없어서 바냐 사진은 위키피디아에서 찾은 러시안 비너스란 그림 한 점으로 대신하겠다. 그림에서 비너스의 아름다운 몸매 말고 또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오는가? 한국 찜질방에서는 볼 수 없는 아이템이 하나 그녀의 손에 들려있다. 바로 마른 자작나무 가지를 엮은 것이다. 온몸을 사정없이 후려쳐서 혈액 순환을 돕는 마사지 도구라고 한다. 에브게니 옆에 마른 나뭇잎 가지가 담긴 큰 항아리가 있었다. 겨울에는 뜨거운 물에 푹 담가서 마른 풀잎에 수분을 더하고, 몹시 더운 여름에는 얼음물에 담가서 시원하게 마찰을 즐기기도 한단다.

한 친구가 먼저 등을 드러내고 누웠다. 에브게니는 웃으며 나뭇가지의 물기를 조금 털어내더니 이내 미소를 거두고 아주 거칠게 등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가지에 붙어 있던 잎들이 몇 개씩 사방으로 튀었다. 착! 착! 땀에 젖은 등에 감기는 소리도 그렇고, 그 모습이 너무 가혹해 보였다.

"너 안 아파?!"

그러자 친구는 나를 보며 말했다.

"(씩 웃으며) 너무 시원해! 좋아!"

아크윰도 옆에서 낄낄낄 웃었다. 떨어진 나뭇잎을 몇 개 주워서 아크윰과 나는 배에 나뭇잎 붙이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뒤를 이어 일레오노라도 마사지를 받았고 함께온 친구들 대부분이 마사지를 한 차례씩 받았다. 사우나실에 오래 있던 친구 한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야겠다고 일어섰다. 너무 추울 것 같아서 잠자코 있다가 결국 친구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사롱을 두르고 나왔는데, 시원한 바닷바람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증기가 찬 공기와 만나는 그 순간의 신선한 기분이란! 눈앞에서 투명한 러시아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채린, 뭐해? 바다에 들어가야지!"

아이고 참. 나는 찬물 샤워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렇지만 갑자기 이상한 용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사롱을 바위에 올려두고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에브게니는 친구들에게 계속 자작나무 마사지를 해주었다. 온 힘을 다해서 내리쳐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들어보였다. 드디어 나만 남았다. 에브게니가 잠시만 쉬었다가 마사지를 해주겠단다. 자작나무 가지를 다시 항아리에 집어넣고 그는 환호를 지르며 바다로 달려나갔다.

직접 맞아본 자작나무 마사지는 소리는 무척 요란했지만 정말로 시원했다! 마른 잎사귀의 따가운 부분이 살갗에 닿을 때 누군가 긁어주는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온 힘을 다하는 에브게니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굉장한 경험이었다. 마사지가 끝나고 평온한 기운을 누리고 싶어 다시 바다로 나갔다. 차가운 바닷물이 몸에 닿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지만, 바다의 고요한 기운과 만나는 특별한 순간이기에 참고 몸을 담갔다.

밤 9시가 다 되자 비로소 해가 수면 아래로 떨어졌다. 옷을 갈아입고 어둑해진 바닷가를 걸었다. 고요한 파도소리가 바냐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섞였다. '아∼ 너무 좋다∼ 너무 좋다∼'하는 혼잣말이 입에 맴돌았다.

제대로 된 여행 계획 없이 돌아다니지만 아쉬운 날이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난 하루였다. 나는 매일매일 용감해지고 있었다. 혼자서 하는 여행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우나 덕에 몸이 녹아 있어 그날 밤은 행복한 숙면을 할 수 있었다. /시민기자 박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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