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내면을 마주보는 거죠"
작품 속 인물 심리와 감정 연구·표현하는 데 집중
"무대에서 전하는 진심 믿어" 후배들과 연습 '매진'

처음 친구가 극단에 놀러 가자고 했을 때만 해도 몰랐다. 뭐 하는 곳인지. 얼떨결에 따라 간 곳은 변변한 연습실 하나 없었다. 연기 훈련을 위한 워크숍 참여를 제안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았다. 운동을 곧잘하고 음악에도 소질을 보였기에 자신감이 넘쳤다. 못할 것 없다고 생각한 연기는 달랐다. 특정한 상황과 감정을 표현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몸이 굳고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의 호기로움은 무참히 깨졌다.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어려웠어요. 말도 제대로 안 나왔죠. 몸짓과 표정은 한마디로 엉망이었어요." 추석 연휴에도 지하 연습실을 지키고 있던 차영우(43) 씨가 당시를 떠올리며 멋쩍게 웃는다. 영우 씨는 창원 진해구 이동에 위치한 극단 고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극배우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연을 맺었던 연극이 삶의 일부로 녹아든 것은 시간이 제법 흐른 뒤다. 막연하게 돈을 벌 요량으로 은행원 꿈을 키웠던 그가 군 제대 후 언뜻 스친 생각이 지금껏 무대 위에 서게 만들었다.

배우 차영우는 "배우와 관객의 교감이 연극이 주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문정민 기자

대학 복학을 앞두고 우연히 들른 연습실에서 처음 연기를 접하며 겪은 쓰라림이 꿈틀댔다. 그때 누군가 던진 "연기 못 한다"라는 말도 가슴 한쪽에 꽂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아있던 아쉬움이 그를 붙잡았다.

영우 씨는 결심한다. "연기 잘한다"는 소리 들을 때까지만 연극을 해보자고. 그 길로 고등학교 졸업 후 2년 만에 적성 찾아 입학한 대학까지 그만뒀다. 오직 연극에 집중하기 위해 진로마저 바꾼 셈이다.

현재 극단 고도 대표인 유철 씨가 당시 연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연극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연기를 배운 적도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그는 무작정 연습에 매진한다. 얼마 안 돼 무대에 올랐을 땐 혹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갓 시작했는데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무궁무진하다는 거다.

2011년 경남연극제에서 연기대상을 받은 작품 〈그들이 사는 세상〉 출연진(맨 왼쪽). /경남도민일보 DB

"대사에 힘을 빼라"라는 말조차 방법을 몰라 애를 먹던 영우 씨는 작품을 연습하고 무대에 서길 반복하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자신감도 붙었다.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았다.

정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슬픔의 노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폴란드 아우슈비츠 아픔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는 작품에서 영우 씨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가해자로, 그리고 연극배우라는 인물을 맡았다. 계엄군으로서 시위자를 찔러 죽인 죄책감과 슬픔을 노래해야 하는 역할은 그에게 또 다른 죄책감을 안겼다.

광주항쟁 당시 사촌형들이 진압군과 평범한 대학생으로 마주해야 했던 비극적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었다. 어렸을 때지만 어머니가 형들을 걱정했던 기억도 또렷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역사적 사실이 주는 무게감과 부담감 앞에 오롯이 아픔을 겪지 않은 자신이 연기해도 될는지 왠지 모를 미안함이 앞섰다.

극단 아시랑 창작 초연작 <뷰리풀 이여사> 연습 장면(오른쪽). /경남도민일보 DB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조금이나마 와 닿을까. 영우 씨는 치열한 고민과 연구 끝에 비로소 깨닫는다. 주인공이 겪었을 고통과 슬픔을.

"작품 속 인물과 배우가 만나는 접점의 순간 관객들 마음이 움직여요. 관객들은 배우를 통해 그들 삶의 한 단면을 만나죠. 배우와 관객의 교감이 바로 연극이 주는 매력인 거죠."

단순히 연기를 잘하려고만 했던 영우 씨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연기에 진심을 더한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실제 느꼈을 감정과 심리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인물과 균형을 맞추며 극으로 녹아든 영우 씨는 조금씩 빛을 발했다.

2011년 경남연극제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극단 고도) 작품으로 연기대상을, 2013년 경남연극제에서 <호접몽>(극단 장자번덕)으로 우수연기상, 이듬해 <언덕을 넘어서 가자>(극단 아시랑)로 연기대상을 받았다.

그는 각본을 보며 섣불리 전체 이야기나 전개될 상황을 예측하지 않는다. 스스로 짐작하는 순간, 관객도 무릇 알 것이라는 전제하에 은유적으로 전해야 할 무엇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결과가 똑같다 할지라도 자신이 지닌 정보나 지식을 배제한다. 오로지 대사 하나에 집중하고, 맥락을 파악한다.

배우 차영우(가운데)가 후배들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문정민 기자

사실 대사를 외우려 하지도 않는다. 물론 공연 중 대사를 잊은 적도 있다. 그마저도 자연스럽게 어쩌면 능청스럽게 넘어간다.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고 상황에 빠져들었기에 가능하다.

공동체 작업인 연극은 협업 속에서 완성된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로 사람들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만큼 사람 때문에 힘들기도 하다. 영우 씨도 같은 연유로 떠나보기도 싸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그다.

아직 연극으로 할 것도 많고 스스로 찾아야 할 것도 많다고 하는 영우 씨. 공연을 앞두고 지하 연습실에서 한창 연습 중인 그는 연극 후배들에게 연기 지도하는 데 여념이 없다. 시대와 세대가 변해도 과연 자신의 연기가 통용될 수 있을지 고민이지만 영우 씨는 믿는다. 연기로 전하는 진심을. 형식과 양식은 변해도 무대 위 열정과 그를 지켜볼 관객들 마음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목소리와 표정, 몸짓에 밴 열정이 새벽녘까지 연습실 불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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