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사람을 총으로 겁을 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지생(晉州之生)은 강요당해 아무 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을 위해 미군 통역장교로 진주에 왔던 22세 청년은 진주 기녀의 당당한 기백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기세등등하던 위수사령부 소속 장교의 은밀한 요구를 거절하고 귀가한 기녀, 흥분한 청년 장교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 권총 한 발을 쏘아 위협한 터였다.

이 청년 장교가 바로 리영희(1929~2010) 전 한양대 교수다. 그는 1977년 <전환시대의 논리>등 민주화 운동의 논리를 편 책을 발표하고 몸소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스승이다. 그가 청년 시절 진주에서 겪은 엄청난 기개를 자서전 <대화(2005)>에서 담담하게 밝혔다.

조선시대 기생은 단순히 풍류를 파는 장사꾼이 아니었다. 교방문화라는 독특한 전통을 계승한 종합예술인이었다. 국권이 침탈당한 시기에는 당당하게 독립만세를 부른 이 땅의 주인이었다. 진주기생조합은 1919년 3월 19일 집단으로 촉석루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한금화는 일제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강산에 다시 무궁화가 피누나"라고 혈서를 썼다.

진주기생의 기개는 광양 선비 매천 황현(1855~1910)의 붓에서 빛나게 살아났다. 매천은 구례 지리산 자락에 은거하던 중 경술국치를 맞자 '문자나 안다는 사람이 인간되기 어렵다'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분이다. 그의 <매천야록>은 진주기생 산홍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산홍은 미모와 서예실력이 함께 뛰어났다. 을사오적 이지용이 그를 탐하였다. 이지용은 내무대신으로 을사늑약(1905)에 참여하고 망국의 하늘에 권세를 드높이던 매국노였다. 그가 1906년 천금을 가져와 산홍에게 첩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산홍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내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스스로 사람 구실은 한다. 무엇 때문에 역적의 첩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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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조선시대 내내 영의정 4명을 포함하여 9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재벌, 명망가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지만 충절의 진주를 지킨 진정한 주인이었던 진주기생은 출세한 자들을 능가하는 진주정신의 고갱이다. 모두가 쉽고 따뜻한 길을 갈 때 힘들지만 민족과 사회의 가치를 지킨 이들, 논개와 산홍 그리고 한금화로 이어지는 진주기생 정신을 후손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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