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15) 인공습지
하천·샘에 의존하지 않고 저수지 만들어 물 사용해
'3대 저수지'밀양 수산제원삼국시대 축조한 것 추정
진주 강주연못 둔전으로 사용
고성 대가저수지 '수호탑'공사서 숨진 이들 넋 위로

밀양 수산제 돌수문

예나 이제나 물은 농사짓는 데 필수다. 밭농사도 물이 있어야 하지만 논농사는 물이 더욱더 필요했다. 하천이나 우물 또는 샘에만 기대어서는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인공으로 저수지를 만들어야 했던 까닭이다. 그 첫머리에 밀양 수산제가 놓인다. 김제 벽골제(전북)·제천 의림지(충북)와 더불어 2000년 전에 만든 3대 저수지로 이름이 올라 있다.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이미 나온다. "둘레가 20리다. 세상에 '고려 김방경 장군이 농지에 물을 댈 수 있도록 제방을 쌓아 일본 정벌(1차 1274년, 2차 1281년)에 나서는 고려·몽골연합군의 군량을 갖추었다'고 전한다.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마름·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하다. 세조 때 물길을 트고 수문을 설치하여 국둔전(國屯田)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奉先寺:경기도 남양주시)에 내려주었다. 성종 때 다시 나라의 둔전이 되었다." 이보다 앞선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는 "길이가 7백 28보인데, 지금은 무너져 있으나 쌓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둔전은 백성들한테 농사를 위하여 개간하게 한 다음 소출 가운데 일부를 바치도록 했던 토지로 국농소(國農所)라고도 했다.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돌봄을 받지 못한 국농소와 수산제는 일제강점기 일본사람 두산만(頭山滿)에게 넘어갔다. 밀양 지주 민병석은 권리금을 주고 넘겨받은 뒤 논으로 개간하여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었다.

수산제 둘레에는 독뫼가 서넛 있다. 수산제 제방은 이런 독뫼를 잇는 방식으로 쌓아졌다. 산(山)에 붙여(附) 쌓는 제방(堤), 산부제다. 일제강점기 1km 남짓 제방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자연 암반을 뚫어 만든 수문은 남아 있다. 너비와 높이가 각각 1m와 1.5m 정도이고 길이는 25m다. 2000년 전 뚫었을 수도 있지만 조선 세조 때 뚫었을 수도 있다. 어느 시절이든 밑바닥 백성들은 엄청나게 고생했겠다. 돌수문에 서면 양쪽으로 물줄기가 흐르면서 습지 경관이 펼쳐진다.

진주 강주연못

다음 자리는 강주연못 차지다. 진주 정촌면 강주연못은 <진양지>에 처음 나온다. 조선시대 진주 읍지(邑誌)인 <진양지>는 성여신이 1622~32년 지었다. 읍지는 대부분 고을 수령이 만들지만 당시 성여신은 그냥 선비였다.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진양지>를 남긴 것이다. 성여신은 여기서 '강주연못(康州池)'을 다루며 "그 위에 군영터가 있다. '고려 때 절도사가 이곳에 와서 진을 쳤다'고 세상에 전해온다"고 적었다.

진주 강주연못. /공동취재단

여기에 진을 쳤던 절도사는 누구였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조(條)에 하륜이 지은 '촉석성문기'가 인용되어 있다. "1379년에 배극렴이 강주진에 장수로 와 있으면서 목사에게 공문을 보내 촉석성=진주성을 다시 수축하게 하고 감독하였다. 흙을 돌로 바꾸어 쌓게 하였으나 절반도 되기 전에 해구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 해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1377년 마산 합포에 병영성을 쌓았던 배극렴(1325~92년)은 1379년에는 진주에 쳐들어온 왜구 3000명도 물리쳤다.

강주연못은 장병들 먹이려고 곡식을 기르던 둔전에 물을 대었을 것이다. 서쪽에는 직선거리로 100m 옆에 화개천이 있다. 강주연못의 원형은 화개천변에 형성된 자연제방과 동쪽 야산 사이에 끼여 있는 저습지였지 싶다. 제방에 오르면 짙은 나무그늘 아래 까만 빗돌이 하나 있다. 고려 시대 강주진영이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것인데 1994년 12월 31일 진양군이 세웠다. 강주연못은 동그랗고 자그맣다. 수면은 연잎으로 덮였고 둘레는 600년 된 이팝나무군락을 비롯해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졌다. 강주는 진주의 고려 시대 지명이다.

고성 회화면 장산숲 연못도 강주연못과 비슷한 구실을 했다. 장산숲은 김해 허씨 집안 호은 허기가 600년 전 조성한 마을숲이다. 고려 왕조에서 벼슬살이를 한 허기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고 여기 들어왔다. 지금은 바다가 십리 바깥에 있지만 당시에는 해수면이 높아 마을 앞이 바로 바다였다. 바다가 마을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고 해풍도 막는 데 목적이 있었다. 원래는 1km 길이로 장산마을을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L' 모양으로 통째 감쌌지만 지금은 동남쪽 100m만 남았다. 쉼터로도 제격이라 평상도 여럿 있다. 나무 말고 돌로 만든 녀석도 있다. 일대가 퇴적지층이라 편평하게 떼어내기 쉬운 무른 암석이 많기 때문이겠다.

일제강점기 만든 저수지들

수산제는 예외적으로 큰 편이지만 옛날에는 대규모로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에너지와 도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일제강점과 함께 근대적 토목기술이 들어왔다. 저수지를 만들면 빗물에만 기대는 천수답은 줄고 수리안전답이 늘게 된다. 저수지 아래 저습지도 개간하여 경지 면적 자체까지 늘릴 수 있다. 꿩 먹고 알 먹고, 마당 쓸고 돈 줍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쌀이 모자랐다. 일제는 조선에서 쌀을 많이 생산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1930년대 들어 일제가 조선 남부 곳곳에 저수지를 본격 짓게 되었던 까닭이다.

진주와 사천에 걸쳐 있는 두량저수지가 먼저 꼽힌다. 배수문 옆 대숲 속을 뒤지면 '남주제 준공 기념비'가 나온다. 옆면에 '기공 소화(昭和) 6년 8월 18일', '준공 소화 7년 5월 20일', '공사감독대행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라 적혀 있다. 소화 6년과 7년은 1931년과 32년이다. 9개월 만에 완공하고 남주제(南洲堤)라 이름했다. 넓이가 51ha이고 담기는 물은 156만7000㎥이다. 저수지 언덕에는 두량마을숲도 들어앉아 있다.

고성 대가저수지도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다. 여기도 배수문 가까운 제방에 기념비가 있다. '수택천추(水澤千秋)'라고 앞에 새겨져 있다. 물이 주는 혜택이 1000년을 간다는 말이다. '준공기념비'라 새겼을 빗돌은 이 위에 놓였을 것 같은데 해방되면서 없앴겠지. 아래 본문 끝에는 '□□□ 6년 5월 31일'이라 적혀 있다. 위쪽 세 글자를 정으로 쪼아낸 것이다. 흔적을 헤아려보니 '□소화'라 여겨진다. 소화 6년=1931년이면 두량저수지 준공 한 해 전이다. 대가저수지는 두량보다 커서 넓이가 92ha, 담기는 물은 490만2000㎥이다. 대가저수지에는 '수호탑'도 있다. 배수문 건너편 산기슭 자리다. 4각 기단을 쌓고 단층을 올린 다음 5각 지붕을 얹었다. 일본 신사에서 흔한 양식인데 안에는 작은 불상이 하나 있다. 당시 공사에서 숨진 이들의 넋을 위로했던 시설이다. 얼마나 험난했으면 이렇게 죽은 사람을 위한 시설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그렇지만 조선 농민들 살림은 풍요로워지지 않았다. 저수지 만드느라 고생하고 소작 짓느라 또 고생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지금도 위령제를 지낸다. 두량·대가저수지는 관에서 설치했다. 조선총독부가 자금 융자를 알선하고 해당 지역 수리조합이 발주하여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에 측량·설계·공사·감독을 모두 맡겼다. 이런 관설 말고 사설 저수지도 있다. 사천 용현면 신촌리에 있는 서택(西澤)저수지다. 서택은 서쪽 연못이 아니고 일본 성씨 니시자와(にしざわ)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서택저수지는 1935~45년 11년 동안 공사했다. 넓이(7ha)도 담기는 물(23만5000㎥)도 훨씬 작은데 그랬다. 니시자와는 저수지 착공과 함께 종포~송지 1km에 방조제를 쌓고 안쪽 갯벌 73ha를 논으로 개간하였다. 이 또한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피땀이 어려 있는 토지다. /공동취재단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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