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의 산 : 태평성대 이루리라
합천의 산 : 내딛는 걸음걸음 어느 하나 부족함 없어라

태평성대 이루리라

하동의 산

하동(河東)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경남의 서부 끝자락에 섬진강을 경계로 전남 광양·구례와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 지리산을 두고 산청·함양·전북 남원, 동쪽으로 진주와 사천, 남으로 남해군과 바다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강·바다가 조화로운 풍요의 땅이다.

굽이굽이 흘러 남해로 향하는 섬진강,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최후 승전장이었던 청정해역 노량 앞바다 이야기만 해도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하동은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장이다. 여기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하동 지도를 펴놓고 보면 머리에 해당하는 지리산이 장엄하다. 화개면 기슭에 자리한 신라 고찰 쌍계사와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에 있는 불일폭포, 지리산 반야봉 기슭의 칠불사, 삼신봉 아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이상향'인 청학동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산 이야기가 있다.

화개면과 악양면 사이에 우뚝 솟은 형제봉에 올라 내려다보는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악양 들판은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적량면과 악양면 사이의 구재봉은 하동의 진산(眞山)으로 멀리 전남 구례 방면으로 지는 낙조가 한편의 파노라마를 연상케 한다. 진교면과 금남면에 홀로 솟아 남해를 향하는 금오산의 정상 조망은 하동 산행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화개동천(花開洞天) 양쪽 비탈진 산자락에 자생하는 야생 차밭은 그 역사가 1000년을 훌쩍 넘었다. 지리산과 산이 품어서 내놓은 계곡물, 그리고 섬진강이 만든 운무가 빚어낸 합작품이 바로 화개 야생 차밭이다. 하동에는 강도 있고 바다도 있지만 그중에 으뜸은 역시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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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금오산 정상 해맞이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해 풍경. / 유은상 기자

구재봉과 지리산 봉우리

하동(河東)은 한자 그대로 강의 동쪽이다. 강은 하동 지리산과 전남 광양 백운산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 섬진강이다. 하동은 경남으로 치면 서쪽이지만 한반도 전체로 보면 남부 지역의 중심이다. 지리산은 이 중심을 통해 남해와 만난다. 지리산이 남해를 향해 내달리며 여기저기 산줄기를 풀어놓은 것이 하동 산세다. 오랜 세월 풍화하며 넉넉해진 지리산 자락 아래 하동 땅 역시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읍치 따라 바뀐 하동 고을 진산

조선시대 하동 고을은 읍치(邑治·관아가 있는 고을의 중심)를 여러 번 옮겼다. 17세기까지는 현재 고전면 고하리 주변이 읍치였다. 이때 하동 고을 진산(鎭山·국가가 지정하는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양경산(陽慶山·145m)이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진산이라는 지위에 맞게 여러 조선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산 위에 태종 17년(1417년)에 쌓은 하동읍성이 있다. 읍치를 옮긴 이후, 원래 읍치는 구읍(舊邑)으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읍성도 고현성(古縣城)이나 고성(古城)으로 표시됐다.

임진왜란 이후 하동 고을 백성은 읍치 이전 논의를 활발하게 했다. 당시 왜군이 섬진강을 따라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기에 강 주변 마을 피해가 컸다. 읍치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진주성이 함락되던 1593년 왜군은 하동 읍치까지 진출해 읍성을 불태웠다. 읍치는 폐허가 됐다. 정유재란 때도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올라왔다. 그래서 현종 2년(1661년)에 읍치를 섬진강 지류인 횡천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횡포(橫浦)로 잠시 옮긴다. 이는 현지 하동군 횡천면 횡보마을 주변으로 추정한다. 이때 진산은 옥계산(玉溪山)이었는데, 현재 횡보마을 북쪽에 있는 산인 것으로 보인다. 하동 고을 읍치는 숙종 5년(1679년)에 다시 구읍으로 돌아왔다가 교통이 불편하다는 등 백성의 요구에 따라 숙종 28년(1702년) 섬진강 변에 있는 현 하동읍 주변으로 옮겨진다. 이후에도 읍치 자리는 몇 번의 변동을 더 겪는다.

하동읍으로 옮긴 후로는 하동군 악양면에 있는 구재봉(768m)이 고을 진산이 됐다. 구재봉은 지리산과 직접 산줄기가 맞닿은 산이다. 칠성봉(900m)과 능선으로 이어졌는데, 칠성봉은 다시 시루봉을 통해 지리산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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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고을 진산 구재봉에서 섬진강과 악양들로 퍼지는 노을을 바라본다. /유은상 기자

구재봉 정 장군 전설

구재봉의 옛 이름은 구자산(龜子山)이다. 적량면에서 보면 산이 거북이가 기어가는 모습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혹은 산에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라는 설도 있다. 반대로 악양면에서 보면 산 모양이 비둘기처럼 보이기에 비둘기 구(鳩)를 써서 구자산(鳩子山)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구재봉에는 정 장군 전설이 전한다. 고려 후기 구재봉에 정희령 장군이 살았다고 한다. 그는 고려시대 정안(?~1251년) 장군의 동생이다. 정안 장군은 13세기 최씨 정권 시절 최우가 집권하자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와 노모를 모시며 살면서 팔만대장경 제작을 주도하고 구재봉에 정안산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다. 그의 동생 정희령 장군은 활을 아주 잘 쏘았다. 그가 타고 다니는 백마는 화살보다 빨랐다고 한다. 정 장군은 정말 백마가 화살보다 빠른지 알고 싶었나 보다. 어느 날 화살을 쏜 후 백마를 타고 달리며 화살보다 늦게 도착하면 목을 베겠다고 했다. 도착하고 화살이 보이지 않자, 화살보다 늦었다고 생각한 정 장군은 바로 백마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 나니 그제야 화살이 도착하더란다.

현재 구재봉은 악양들 건너편 형제봉과 함께 활공장이 있어 패러글라이딩 동호인이 많이 찾는 곳이다. 해가 저물 무렵 구재봉 활공장에서 섬진강과 악양들에 번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멋진 일이다.

지리산 봉우리들

하동 땅은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다. 북쪽으로는 지리산 주 능선이 동서로 나란히 이어져 있다. 이 능선이 하동 땅으로 내리뻗은 줄기 사이사이에 명승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학동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이상향으로 옛사람들은 지리산에 이런 곳이 있다고 믿었다.

삼신봉(三神峰·1284m)은 하동군 청암면과 산청군 시천면의 경계다. 삼신봉은 다시 내삼신봉과 외삼신봉으로 나뉘는데, 이 사이에 와이(Y) 자 형태로 형성된 골짜기가 있는데, 도인 신선도를 수행하는 삼성궁과 또 다른 도인들이 모여 살았던 청학동 도인촌이 이곳에 있다. 도인촌은 요즘 사람들이 청학동 하면 자연스레 떠올리는 곳이다. 삼성궁에서 내삼산봉 자락 반대편 골짜기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가 있다. 쌍계사는 대표적인 선종(禪宗) 사찰로 꼽히는데, 삼신봉 자락이 역시 훌륭한 수행처임을 증명한다.

하동군 화개면 덕평봉(德坪峰·1522m) 아래 산덕평마을이나, 악양면 청학이골, 불일폭포 부근, 세석평전 등도 옛사람들이 청학동으로 손꼽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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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에서 본 지리산. / 유은상 기자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지리산 주 능선 중 영신봉과 삼도봉은 지리적으로 의미가 크다. 우선 하동군 화개면 있는 영신봉(靈神峰·1652m)은 영남지역 주요 산줄기 낙남정맥의 시작점이다. 이 봉우리에서 시작한 지맥이 남강, 낙동강을 따라 김해시 분산(盆山)까지 약 200km 정도 이어진다.

역시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삼도봉(三道峰·1499m)은 경남 하동군과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에 걸쳐 있다. 이름 그대로 3도에 걸쳐 있어 삼도봉이라 부른다. 보통은 날라리봉으로 불리는 산이다.

금오산을 낳은 산줄기

하동군 남쪽에 우뚝하게 솟아 남해를 굽어보는 금오산(金鰲山·875m) 역시 멀리 지리산에서 그 근원을 찾는다. 금오산을 지리산과 연결하고 있는 산이 옥산(玉山·614m)과 이명산(理明山·570m) 줄기다.

지리산에서 가장 가까운 옥산은 하동군 옥종면과 북천면 경계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진주 편이 진주 사람들이 가뭄을 만나면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듯, 예로부터 영험하게 여겨졌다. 옥산에는 지리산과 관련한 재밌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주 오랜 옛날 옥황상제가 남도 명산을 지리산으로 모이라고 명했다. 진주 주변에서 제법 폼을 잡고 살던 옥산도 자신이 명산이라 생각하고 지리산을 향해 갔다. 그러다가 옥종면을 지날 때 샘에서 물을 긷던 처녀가 옥산을 보고는 산이 걸어간다고 소리를 질렀다. 이 소리에 놀라 옥산은 그 자리에 눌러앉아 버렸는데, 그대로 옥종면의 진산이 되었다고 한다.

하동군 진교면과 사천시 곤양면에 걸친 이명산은 옥산과 금오산 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이 산에도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옛날 산 정상에 용지(龍池·용이 사는 못)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경주지역에 눈이 먼 이가 많이 태어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경주 사람들이 불에 달군 쇠와 모래, 돌을 용지에 집어넣자 용이 도망을 쳤다. 그러고 나니 눈먼 이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금오산과 형제봉

<동국여지승람>에는 하동 지세를 '산을 지고 바다에 임했다'고 기록했다. 그 경치를 '한쪽 면은 넓고 넓은 푸른 바다와 닿았고 나머지 3개 면은 높고 높은 푸른 산이 솟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높고 푸름을 강조한 곳은 지리산이다. 하동 하면 지리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하동의 산은 지리산 그 자체이거나 모두 여기에서 이어진 산맥이다. 그러니 다른 지역의 웬만한 산보다 높지만 'OO봉'으로 불리고 있다.

지리산은 이미 '경남의 산' 첫 회에서 개괄적으로 소개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안타깝고 아름다운 산이 한둘 아니다.

모두 다 소개해도 모자람 없지만 지면 한계 탓에 머리를 싸매고 고심 끝에 형제봉과 금오산을 선정했다. 공교롭게도 이 산들은 모두 하동 8경에 포함된다. 두 산은 등산하는 재미 보다는 경치와 전망이 더 훌륭하다. 굳이 선정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하실 것이다. 만약 모르고 계신다면 꼭 한번 가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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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과 구제봉. / 유은상 기자

남해안 최고의 전망대

"우와∼ 금오산이 이런 곳이었어요." 같은 팀 이서후 기자의 감탄사다. 360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전망에 놀란 것이다. 아마 이때 내 얼굴에도 뿌듯한 표정이 흘렀을 것이다.

하동 하면 지리산과 섬진강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 이미지에 눌려 하동이 바다와 접해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낸 이들도 많을 것이다.

사실 높이로만 따지면 금오산은 1000m 이상 고봉 준령이 즐비한 하동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하나 금오산은 당당히 하동팔경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산과는 달리 시원한 바다 전망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오산은 하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북 구미, 전남 여수, 충남 예산, 경북 경주 등 다른 지역에도 같은 이름이 많다. 감히 이들 산과도 비교해도 하동 금오산은 최고로 꼽을 수 있다. 역시 전망 때문이다.

금오산(金鰲山·849m)은 하동군 금남면과 진교면에 걸쳐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맥이 우산을 거쳐 한 번 높게 솟아 금오산을 형성하고 바다로 스며든다. 금오는 금자라를 뜻한다. 남해까지 달려온 백두대간이 바다를 만나 물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노적가리(수북이 쌓아 둔 곡식더미)를 닮아 소오산이라고도 하고 병목처럼 생겼다고 병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상에는 해맞이 공원 전망대가 잘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 서면 왼쪽으로는 사천만, 앞으로는 남해, 오른쪽으로 광양만 바다가 쫙 펼쳐진다. 특히 사천 쪽으로 섬이 올망졸망하게 모여있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한국화를 그리면서 먹물을 떨어뜨려 표현한 듯하다. 점점이 작은 섬은 바다 위에 부초가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전망대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등줄기를 곧추세우고 요동치는 듯한 지리산맥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 전망은 언제 봐도 좋지만 일출, 일몰, 월출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언젠가 꼭 한번 보고 카메라에 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이날 전망대에서는 한 중년 신사가 색소폰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면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그 멜로디는 산에서 느끼는 여유를 더 풍요롭게 했다.

가족단위로 온 사람 중에는 아흔 살은 돼 보이는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도 있었다. 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넓게 펼쳐진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마 이서후 기자가 느꼈던 감동을 오래도록 가슴 속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등산은 진교면 중평리 하동청소년수련원에서 봉수대 석굴암을 거쳐 오르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3km 거리로 대략 2시간이면 가능하다.

차를 타고 오르는 방법도 있다. 산 정상에 있는 군사·통신시설을 위해 만든 좁은 길이지만 진교면 교룡리 평당마을에서 들머리를 찾아 오르면 20분가량이면 닿는다.

우애 깊은 형제산

형제봉(兄弟峰·1115m)은 하동군 악양면과 화개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지리산 삼신봉에서 이어진 산맥은 남쪽으로 관음봉을 거쳐 형제봉을 이루고 섬진강으로 빨려 들어간다. 형제봉과 관련한 표기는 옛 문헌에서 찾기 어렵다. 정상부에 약 200m가량 떨어져 솟은 2개의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사람들은 사투리로 성제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무더위에 조금이라도 쉽게 오르고자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한산사 옆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금세 땀이 온몸을 적셨지만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산 아래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체온을 떨어뜨리며 등을 살며시 밀어 주는듯하다. 대신 각다귀 떼가 몹시 성가시게 한다. 유독 눈을 찾아 모이면서 몇 번이나 호수(?) 같은 눈에 빠진 놈의 시체를 수거해야만 했다.

오붓한 산길을 조금만 오르면 금세 고소산성이다. 600m 거리여서 대략 20분도 안 걸린 것 같다.

길이 800m, 높이 3.5∼4.5m의 고소산성은 가야성으로 추정된다. 안내판에는 <일본서기> 기록을 근거로 고령 대가야가 백제 진출에 대비하면서 왜와 교통을 위해 성을 쌓았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 또는 백제 때 쌓은 성이라는 설도 있지만 가야성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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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산성과 섬진강. / 유은상 기자

산성 가운데 자라난 소나무 그늘에 자리 잡고 숨을 고른다. 곧장 섬진강 물결이 굽이쳐 시야에 빨려 들어온다. 마치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염천 불볕더위에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주니 이만한 곳이 없다. '이곳이 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정상까지는 대략 5.5km로 3시간 30분가량 걸린다. 등산로 주변에는 신선대, 통천문, 봉수대 등이 있어 산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상에 서면 이번에는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까지 확 펼쳐진 풍경이 한 앵글에 담긴다.

등을 돌리면 노고단에서 시작해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주봉이 늘어서 있다. 종주를 한다면 2∼3일 걸리는 웅장한 산을 한눈에 다 담고 보니 지리산을 잠시나마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슴이 뛴다. 바로 이것이 형제봉의 진가다.

억양들판과 평사리는 소설 <토지> 주 무대로 유명하다. 형제봉 바로 아래 매계리는 김종직의 <유두류록>과 <대동지지>에서 청학동으로 지목한 기록이 나온다. 사람이 살기 좋은 이상향으로 봤던 것이다. 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산을 올랐으니 다시 내려가야 하지만 '저 무덥고 삭막한 곳으로 어떻게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다시 발길을 잡는다.

내딛는 걸음걸음 어느 하나 부족함 없어라

합천의 산

경남의 서북부에 자리 잡은 합천은 창녕·의령·거창·산청과 이웃하고 있으며, 북으로 경북 고령·성주와 접하고 있다. 경남 18개 시·군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983.584㎢)을 차지하고 있지만 산지가 72%(709.80㎢)를 넘을 정도로 크고 작은 산군(山群)이 많은 고장이다.

합천의 대표 산은 법보(法寶)사찰로 불리는 해인사(海印寺)를 품은 가야산이다.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 명산'의 하나인 가야산은 주봉인 상왕봉을 중심으로 두리봉, 남산, 단지봉, 남산제일봉, 매화산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다. 그 가운데에 해인사와 부속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남산제일봉에 올라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을 바라보면 한마디로 압권이다.

거창과 접한 비계산, 두무산, 오도산 또한 그 산세(山勢)가 예사롭지 않다. 철쭉 대평원으로 유명한 황매산 역시 합천의 자랑이다.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의룡산, 가점산, 미숭산 등도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처럼 많은 합천의 산이 지맥을 이루면서 북에서 동남으로 흐른다.

가야산·해인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있다. 가야면사무소에서 해인사 들목까지 4km에 이르는 홍류동 계곡이다. 세상의 온갖 시름을 씻는 곳으로 물소리, 바람 소리, 새 소리 등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눈과 귀가 즐겁다. 이 계곡을 따라 조성된 '소리길'은 이로운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의 소리(蘇利), 즉 불가에서는 '극락으로 가는 길'이란 뜻도 담겨 있다. 계곡 주변의 노송이 품어내는 청정한 기운과 물소리,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소리길 산책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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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정상에서 본 풍경. 구름이 걷히면서 숨어 있던 봉천대가 드러났다. / 유은상 기자

황강 곁에 두고 하나 된 세 고을

황강(黃江)은 합천 중심을 남북으로 가르며 흐른다. 합천 산세(山勢)도 이 강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다.

북쪽 산군(山群)에서는 국립공원인 가야산(伽倻山·1430m)이 으뜸 산이다. 공원 전체로 보면 경북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상인 상왕봉(우도봉, 1430m)은 주소가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1번지로 합천에 속한다. 가야산에서 뻗은 줄기가 금강산의 축소판이라는 매화산(梅花山·954m)과 고려시대 조선 건국을 반대한 이미숭 장군의 전설이 서린 미숭산(彌崇山·755m)을 거쳐 황강 북쪽에 여러 봉우리를 풀어놓았다.

황강 남쪽에서는 덕유산 줄기를 이어받은 황매산(黃梅山·1108m)을 우두머리로 친다. 이 산에서 높고 낮은 등성이가 동쪽으로 뻗어 나가 초계분지 둘러싼 대암산, 단봉산 등을 낳고 남쪽으로 의령 자굴산으로 연결된다. 황매산은 산청 편에서 자세히 소개한 적이 있다. 원래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는데, 1983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져 지금은 가야산과 함께 합천을 대표하는 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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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읍 뒤편으로 진산으로 추정되는 산이 펼쳐져 있다. / 유은상 기자

합천 진산 3곳

지금 합천군은 조선시대 합천·삼가·초계 세 고을을 1914년에 합친 것이다.

합천 고을은 현재 합천읍, 가야면, 야로면, 묘산면, 봉산면, 용주면, 대양면 일대였다. 고을의 중심인 읍치(邑治)는 합천읍 합천리에 있었다. 지금 군청이 있는 곳 주변이다. 조선시대 합천 고을 진산은 북산(北山)이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읍주산(邑主山)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북산이란 이름은 쓰지 않는다. 당연히 지도에도 없다. 옛 지도에 나오는 대략적인 위치와 합천읍 영창리에 있다고 한 기록으로 봐서 영창 주공아파트 뒤편으로 200m 남짓한 백학산 언저리인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삼가 고을은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봉산면과 거창군 신원면 일대를 포함한다. 읍치는 현재 삼가면사무소가 있는 금리 주변에 있었다. 삼가 고을은 조선 태종 때 삼기·가수 두 고을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원래 읍치는 현 대병면 합천호 근처였는데, 삼가 고을로 합쳐지며 금리로 옮겼다. 삼가 고을 진산은 기록상으로는 대병면에 있는 금성산(金城山)이다. 지맥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주봉이 읍치가 있는 금리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실제 진산 노릇은 읍치 북쪽 150~200m 등성이 중 하나가 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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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계 고을과 진산인 단봉산. / 유은상 기자

초계 고을은 지금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 율곡면 일대였다. 동서로 6km, 남북으로 3km에 이르는 초계분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되겠다. 읍치는 현재 초계면사무소가 있는 곳 주변이었다. 초계 고을 진산은 단봉산(丹鳳山·201m)이다. 초계면사무소와 초계초등학교 뒤편으로 향교를 품은 산이다. 단봉산이란 이름은 지금도 그대로 쓴다. 요즘에는 운동기구들이 설치돼 있어, 주민이 아침저녁으로 운동 삼아 자주 오르는 산이다.

초계 고을은 예로부터 사산팔수(四山八水)로 묘사됐다. 이는 조선 세종에서 성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이 초계분지를 둘러싼 산세를 보고 '사산(四山)이 위군거(圍郡去)하고 팔수(八水)가 포초류(抱村流) 한다'고 읊은 데서 유래했다. 대암산, 태백산, 국사봉, 미타산 등이 고을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고, 이들 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 여덟 갈래가 고을을 휘돌아 나간다는 뜻이다. 초계분지 주변 높은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져 있는데, 의령 편에서 간단하게 소개를 했었다.

대병 삼산

합천군 대병면 회향관광단지 주변에서 합천호 건너 동쪽을 바라보면 준엄하게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마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다. 차례대로 왼쪽이 악견산(岳堅山·620m), 오른쪽이 금성산(金城山·592m), 금성산 너머가 허굴산(墟堀山·682m)이다. 세 산이 우뚝하니 대병면 장단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들을 '대병 삼산(三山)'이라 부른다.

금성산은 황매산에서 바로 이어져 솟았다. 고려시대부터 봉화대(烽火臺)가 있었기에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남은 봉화대는 경남도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됐다. 금성산 서쪽은 수백 척 암벽이다. 중간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금반현화(錦盤懸花·비단 쟁반에 꽃을 달았다)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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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천호에서 바라 본 악견산(왼쪽)과 금성산, 그 뒤편 허굴산. / 유은상 기자

악견산은 산 전체가 바위투성이다. 낭떠러지도 많다. 그래도 등성이에 올라서기만 하면 시원스레 합천호가 내려다보여 등산할 맛이 난다. 대단히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산 모양새가 웅장해 큰 산 악(岳) 자를 붙였다. 악견산은 의병활동과 관련이 깊다. 임진왜란 때 권양, 권해 형제를 포함해 박사겸, 박엽 등 선비들이 의병을 모아 이 산에 성을 쌓고 왜적과 싸웠다. 이때 쌓은 악견산성이 아직 남아있다.

의병과 관련한 전설도 전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악견산성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왜군이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옆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과 줄로 연결하고는 곽재우 의병장 같은 붉은 옷을 입은 허수아비를 매달았다. 의병이 달 밝은 밤에 줄을 당겨 마치 도력 높은 장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연출했다. 그러자 왜군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이야기다. 당시 왜군은 이 허수아비를 천강 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악견산이 마주 보이는 금성산 북쪽 합천호 근처에 임진왜란 때 의병을 기리는 임란창의기념관이 있다.

허굴산 역시 경사 급한 봉우리가 많다. 산 중턱에 여름에 찬바람, 겨울에 더운 바람이 나오는 큰 굴이 있는데, 허굴이란 산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스님이 허굴산을 지나다가 산 중턱 굴 안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랑을 벗어젖히고 급히 올라가 보니 부처님은 없고 빈 굴만 있었다고 한다.

남명의 덕(德), 도선의 도(道)

조선의 큰선비 남명 조식(曺植·1501~1572년)은 삼가 고을(현재 합천군 삼가면 지역)에서 태어났다. 삼가 고을과는 거리가 있지만, 합천호 동쪽 지역에 남명과 관련한 산이 있다. 남명과 관련한 지명에는 대체로 덕(德) 자가 들어간다. 먼저 봉산면 계산리, 용주면 우곡리, 합천읍 인곡리에 걸친 논덕산(論德山·545m)은 산 이름을 남명이 지었다고 전한다. 이 산은 다르게 봉우리가 세 개란 뜻으로 삼봉산(三峰山)이라고도 한다. 봉산면 송림리에 있는 강덕산(講德山·563m) 역시 남명이 산세를 보고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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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사 입구. / 유은상 기자

묘산면 산제리, 봉산면 압곡리에 걸친 오도산(吾道山·1120m)은 합천 명산 중 하나다. 이 산은 신라말 승려로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년)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전해진다. 원래 이름은 천촉산(天燭山)으로 '하늘의 촛불'이란 뜻이다. 까마귀머리처럼 산꼭대기가 검다 해서 오두산(烏頭山)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조선전기 문신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일두 정여창(鄭汝昌)이 이 산이 마음에 들어 유도(儒道)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담아 오도산(吾道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안개 사라지니 드러낸 '조선팔경' 가야산과 홍류동

합천은 북고남저형 지형이다. 북쪽으로는 소백산맥에서 이어진 고봉 준령이 즐비하다. 대신 남쪽과 서쪽으로는 황강과 남강이 흐르면서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산과 호수 강을 골고루 갖춘 혜택을 받은 땅이라 하겠다.

산만 놓고 보면 황매산, 남산제일봉,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대암산 등 명산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야산이 가장 이름 높다.

가야산에 다녀간 옛 선현이 남긴 유람록도 한둘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꾸준한 사랑을 받은 것은 우선 산 자체가 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법보사찰 해인사, 홍류동 계곡까지 품고 있어 더 이상의 꾸밈과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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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에 덮인 가야산. / 유은상 기자

국립공원 제9호

합천군과 경북 성주군 경계에 있는 가야산(伽倻山·1430m)은 경관이 수려하고 생태환경이 우수해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가야산은 지리산으로 향하던 소백산맥이 동쪽으로 뻗어 대덕산, 수도산을 거쳐 큰 산세를 이룬 곳이다.

가야산 명칭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대가야의 땅인 합천, 고령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라는 상징성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관련해서 정견모주 설화도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에 반해 뇌질주일과 뇌질청예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 시조인 아진아시왕, 뇌질청예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는 것이다.

또 부처의 설법처인 인도 불교 성지 부다가야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범어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의 정상부가 소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우두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부처를 뜻하는 상왕에서 유래한 상왕산을 포함해 설산, 중향산, 기달산 등의 이름도 있다.

산행은 무더위를 핑계 삼아 가장 가깝고 쉬운 해인사코스를 선택했다.

차에서 내릴 때까지 궂은비가 걱정스럽게 했지만 해인사를 지나면서 다행히 그쳤다. 산신에게 산행을 승낙받은 느낌이라고 할까?

해인사를 지나 왼쪽 계곡을 따라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코스는 평균 경사 19도로 8분 능선까지는 수월한 길이 이어진다. 등산로가 잘 만들어져 있고 숲이 무성해 싱그러운 산책길을 걷는 느낌이다.

8분 능선을 지나 계단이 나타나면서 다소 힘이 부치지만 육체적인 부담은 시원한 바람이 금방 씻어 버린다.

하지만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고작 5∼6m 앞만 보일 만큼 시야가 갑갑하다. 구름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하게 올랐으니 더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평소에 덕을 쌓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해 본다.

그래도 이왕 올랐으니 30분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상왕봉 정상에서 음료와 간식을 먹는 사이 귀여운 다람쥐가 경계심을 풀고 가까이 다가온다. 점심때니 이놈도 배가 고플 터, 과자를 요기 될 만큼 던져주고는 "가서 산신령님에게 잠시 구름을 걷게 해달라고 부탁 좀 전해줘"라고 말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안개 흐름이 빨라지더니 초록색 산하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할 수밖에 없었다.

'짠∼' 하고 막이 걷히면서 마주한 풍경, 몇 배로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왼쪽 칠불봉과 그 아래 이어진 만물상, 앞쪽으로 보이는 봉천대와 매화산, 단지봉, 남산제일봉 너무나 고맙고 감동스러운 풍경이었다. 가야산이 '조선팔경', 또는 '12대 명산'에 꼽힌 이유를 실감한다. 카메라 셔터도 쉼 없이 소리를 내며 풍경을 담아낸다.

기암괴석의 모습도 환상적이다.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을 '경상도에는 없는 석화성(石火星) 형상'이라고 기록했다. 마치 불꽃이 공중으로 치솟는 듯한 형상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연출한다는 뜻이다.

시원해진 풍경에 마음마저 넓어지면서 신선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품고 산에서 내려왔다.

시름을 씻는 홍류동 계곡

홍류동은 가야면사무소에서 해인사 들목까지 4km에 이르는 계곡이다.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붉게 물든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가을날 빨간 단풍잎이 물에 떠 흐르는 장면이 연상되는 곳이다.

하지만 홍류동은 속세의 소리를 끊어버리기라도 할 듯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잘 알려졌다.

신라 최치원 선생도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38세에 가족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최치원은 계곡물에 속세의 때를 씻으며 바위벽에 시를 남겼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옳으니 그르니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 일부러 흐르는 물로 산을 온통 둘러버렸다네.' 이후 그는 가야산에 갓과 신발만 남겨두고 신선이 되어 홀연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 이곳은 문인들에게는 유람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해인사 아래 치인리는 최치원 선생이 살던 곳으로 그 이름을 따 치원촌이라 하였는데 나중에는 치인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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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 계곡. / 유은상 기자

홍류동에는 주요문화재 자료인 농산정과 낙화담, 분옥폭포 등 16 명소가 있으며 합천 8경 중 제3경으로 꼽힌다. 지리산 칠선계곡, 설악산 천불동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한국 4대 계곡에도 포함된다.

지금은 홍류동 계곡을 주 코스로 삼아 '소리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소리길은 대장경테마파크에서 해인사까지 총 7.5km 구간이다. 최치원 선생이 남긴 글처럼 속세에 찌든 마음을 씻고 사색하기에 좋은 길이다.

소리길은 물소리, 산새 소리,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이라는 표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로운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의 소리(蘇利), 즉 불가에서는 '극락으로 가는 길'이란 뜻도 있다.

소리길은 1구간 홍류동 여행(대장경테마파크 각사교∼홍류문 4.2km), 2구간 발자취를 찾아서(홍류문∼명진교 1.5km), 3구간 비경을 찾아서(명진교∼치인교 1.6km), 4구간 천 년의 길(영산교∼해인사 1.2km) 등 4개 구간으로 구성돼 있다. 모두 다 걷은 데는 4시간가량 걸린다.

계곡을 따라 덱과 나무다리가 잘 갖춰져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계곡 주변의 노송이 품어내는 청정한 기운과 계곡의 물소리, 시원한 바람이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씻어 준다. 요즘 같은 무더운 여름에는 산행보다는 소리길 산책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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