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지나니 고요한 옛 절터 나타나네
시간 흘러 퇴색할지라도 기억은 남아

창원 의창구 봉곡동·봉림동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 상북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봉림사지 삼층석탑'이다.

난데없이 오래된 석탑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원래 석탑은 봉림동 북쪽 봉림사 터에 있었다. 높이 270cm 화강암 석탑은 자칫 일본으로 옮겨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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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을 끼고 바다를 보았을 때 펼쳐지는 풍경. / 최환석 기자

일제강점기 때 부산으로 팔려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관리가 허술해지자 1960년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탑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은 2층이었겠으나, 여러 차례 옮겨지면서 깨져나갔다. 지금은 위층 기단 일부만 남았다.

3층을 이루는 탑신부는 그나마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꼭대기는 노반(머리 장식 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 모양 장식)로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전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은 학교 본관 건물 중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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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상북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봉림사지 삼층석탑. / 최환석 기자

꼭, 아이들을 지키겠노라 다짐하듯.

삼층석탑이 원래 있던 봉림사 터를 찾아 나선다. 상북초등학교에서 나와 봉곡중학교 정문을 거쳐 500m가량 걷다가 왼쪽으로 꺾는다.

아파트 숲을 헤치고 나아가면 택지개발에도 살아남은 몇몇 집이 보인다. 잇따라 '봉림사지 1.1km' 안내판이 나온다.

800m가량 포장도로를 따라 산을 탄다. 가볍게 산책하는 마음으로 차분히 오른다.

두 갈래로 길이 나뉘는 데서 '가야불교 초전법륜성지 봉림사 터 250m' 안내판이 등장한다. 목적지가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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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숲길을 통과하자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봉림사 터. / 최환석 기자

다시 두 갈래가 나온다. 정상 방향으로 난 길에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문화재 보호구역임을 알린다. 이곳인가 보다.

봉림사 터로 들어서는 길이 마치 '비밀의 숲'처럼 손님을 반긴다. 어두운 숲길을 얼른 통과하자, 드디어 봉림사 터가 나타난다.

'구산선문 봉림산 봉림사'. 통일신라시대 선문구산 하나인 봉림산파 중심 사찰이 이곳에 있었다.

폐허처럼 보이는 터 한쪽에 안내판이 하나 섰다.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인 봉림산 선문을 개산한 진경심희 대사(서기 853~923년)님께서 봉림사를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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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한 봉림사 터 모습. / 최환석 기자

심희는 9세에 출가했다. 명산을 다니며 수행을 하다 봉림사를 세운다. 그는 궁으로 들어가 경명왕에게 설법을 하기도 했다.

이후 봉림사로 다시 돌아온 그는 제자를 가르치다 68세에 입적한다. 왕은 시호를 '진경대사'라 하고, '보월능공'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

안내판 옆 비석 두 개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등을 서울로 옮겼음을 기록한 표석인 듯하다.

현재 보물 제362호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보물 제363호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다.

선풍을 떨쳤다는 봉림사는 이제 터만 덩그러니 남았다. 고요한 옛 절터에 우두커니 서 진경대사가 입적 전 남겼다는 법문을 떠올린다.

"모든 법은 다 공(空)하고 온갖 인연은 다 고요한 것이니, 말하자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완연히 떠가는 구름과 같다. 너희는 부지런히 중생을 교화하고 삼가 슬퍼하거나 서러워하지 마라."

이날 걸은 거리 3.4km. 5734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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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한 봉림사 터 모습. / 최환석 기자

함안 칠원읍

주객이 전도했다는 말이 맞겠다.

함안군 칠원읍 무기마을은 공장 사이에 끼어 숨을 쉬기 어려운 모양새다.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는 대형 화물차량이 점령했다.

분명히 들어서기는 마을이 먼저고, 공장이 나중인데 말이다.

마을회관 뒤를 돌아 골목을 따라 조금 들어가자 인상부터 남다른 고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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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 너머로 보이는 무기연당 모습. / 최환석 기자

붉은 정려로 장식한 솟을삼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주 씨 고가'다.

국담 주재성(1681~1743) 생가인 이곳은 정려가 두 개다.

각각 국담의 충성에 내려진 '충신 정려'와 아들 주도복 효행에 내려진 '효자 정려'다. 이를 함께 '충효쌍정려문'이라 부른다.

국담 이후 주 씨 종가인 고택은 대문채와 더불어 사랑채인 감은재, 살림집인 안채, 사당인 불조묘 등으로 이뤄졌다.

불조묘는 '영원히 위패를 옮기지 마라'는 뜻.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국담 공을 인정하여 기제사를 영구히 받들라는 명을 내려서다.

정려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한서문을 지나면 다시 널찍한 공간이 등장하고, 가운데는 연못이 차지한다.

연못 둘레는 이중 석축으로 쌓았다. 가운데는 산을 본뜬 작은 섬을 놓았다.

연못 이름은 국담이다. 주재성이 지어 또한 자신의 호로 삼은 이름이다.

오른쪽으로 하환정과 풍욕루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1971년 지은 충효사와 영정각이 있다.

이들이 한데 모인 정원이 국가민속문화재 제208호 '무기연당'이다.

정원은 자연을 소박하게 옮겨놓은 모습이다. 위세 없이 아늑하다.

주 씨 고가 정려문이 굳게 잠겨 주인장에게 전화를 건다. 산을 오르고 있다 하여 양해를 구하고는 담장 너머로 무기연당을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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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맞이 전망대에서 원형 포진지로 향하는 숲길. / 최환석 기자

대형 화물차량이 아슬아슬하게 비켜 달리는 도로를 따라 읍내로 향한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칠원초등학교를 지난다. 담벼락 한 곳에 색이 바랜 안내판이 하나 섰다.

조선 성종 23년(1492) 11월에 축조한 칠원읍성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높이 11자(3.33m가량), 둘레 1600여 자(484m가량)에 옹성이 여섯, 우물이 하나, 연못이 하나였다는 옛 기록이 성 규모를 가늠케 한다.

지금은 체성벽 일부만 남아 초등학교 담장 역할을 한다. 볼품없고 쓸쓸한 모습이 못내 아쉽다.

칠원읍사무소를 지나 훤칠한 칠원교회 건물 뒤로 들어서자 전체를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나온다.

함안 출신 손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6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에는 소록도 애양원에서 나환자와 함께한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았고, 6·25전쟁이 터졌음에도 환자를 두고 떠나지 않겠다며 곁을 지키다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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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 모습. 생가 마루에 놓인 손 목사 동상은 글을 읽는 형상이다. / 최환석 기자

손 목사 순교 후 안용준 목사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으로 그를 기록했고, 책 이름은 그의 애칭이 된다.

원자탄이 터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기념관 내부는 손 목사 일생을 잘 기록했다.

기념관 바깥 정원에는 손 목사 생가를 살려뒀다. 우물 하나까지 제자리에 있는 모습이 꼭 보존과 기록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는 듯하다.

뱀발로, 이날 기자가 걸은 길은 뚜벅이 입장에선 매우 불친절하다. 걷기엔 위험하니 반드시 차로 이동하길 권한다.

또한 주 씨 고가는 현재 소유주가 함안군청과의 불화로 개방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참고하자.

이날 걸은 거리 3.5㎞. 6109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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