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다"

최근 목공을 하겠다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목수가 되고자 목공방에 드나드는 사람, 목공방에서 역시 목수의 꿈을 키우는 학생. 직업이 아니더라도 장비를 들고 작은 물건은 직접 만들려 애쓰는 사람을 보곤 한다. 생각해 보니 목수의 삶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는 것 같았다. 마침 '경력도 오래됐고,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목수 중 한 명'이라며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목수의 길로

'경력 있고, 뛰어난 목수'라 하면 60~70대 지긋한 어르신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업실 '나무세상'에서 만난 신성룡 씨는 1968년생이니 아직 40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하다'는 인상이 절로 풍기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가 작업실이 매우 깔끔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다. 작업실에 들어가자 아기자기한 목조 소품들이 가득했다. 거기에다가 소품들에는 모두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기자가 알던 톱밥과 먼지로 가득한 목공방과는 전혀 달랐다.

Q. 그림은 직접 그리신 건가요?

"아닙니다. 미술 선생님이 따로 계십니다. 여기서 미술 지도도 하십니다. 선생님께서 워낙 깔끔하게 청소를 하시기 때문에 작업실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시는 분이 계실 정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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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룡 아름드리목공조합 기술이사. / 임종금 기자

Q. 고향은 어디인가요?

"평생 마산에서만 살았습니다. 학교도 다 마산에서 나왔습니다."

Q. 부친께서 조금 남다른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습니다. 아버지 만의 세계를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이상을 꿈꾸시다가 실패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부친께서 무슨 이상을 가지셨나요?

"설명하려면 좀 내용이 깁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두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일도 하고 그러시다가 동두천에 계시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다리 밑에 송유관이 지나가고 있었답니다. 주민들이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서 기름을 몰래 훔쳐서 팔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기름이 많이 샜으면 다리 밑 아무 데나 땅을 파면 기름이 고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버지 생각에 '아무리 힘들더라도 도둑질을 하면 되나' 싶으셨답니다. 그리고 그때 생각하신 게 '환경오염이 없고 에너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셨답니다."

Q. 환경오염이 없고, 에너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기계라뇨?

"일종의 무한동력 기계 같은 겁니다. 100의 에너지를 투입하면 100 이상의 효율을 가진 기계를 만들면 에너지 문제나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에너지보존의 법칙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하는 기계죠."

Q. 물론 그런 생각을 하실 수는 있지만, 평생 거기에 매달리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목수셨는데,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대부분 기계를 사는 데 돈을 쓰셨습니다."

Q. 그럼 목수일도 아버지 때문에 하시게 된 것이겠네요.

"그렇습니다. 제가 크니까 아버지는 목수 일은 저에게 차츰 넘기셨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저는 목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기계 연구를 하시고, 그러다 보니 학교를 겨우겨우 다녔습니다. 어머니 덕분에 고등학교까지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Q. 아버지께서 가부장적인 분이셨겠네요.

"무서워서 감히 반항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학교 갔다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교육기관을 싫어하셨습니다. 당신은 학교를 전혀 안 다니고도 이런 연구를 하는데 학교가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하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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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룡 씨 작업실. / 임종금 기자

Q. 학창시절부터 목공을 하셨는데, 사실 중학생이 어떻게 일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부분적으로 부품을 만들면 아버지께서 이걸 조립하셔서 납품하는 방식이었습니다."

Q. 아버지가 엄하셔서 반항하긴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속상할 때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일 자체는 제가 어릴 때부터 봐온 터라 어렵지 않게 따라갔습니다. 중학교 때 목공을 하다 다쳐서 손가락이 길게 찢어졌습니다. 병원에서 손가락은 꿰맸지만 손이 부어서 학교 시험 칠 때 OMR카드 마킹이 잘 안 되는 겁니다. 그때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Q. 그래도 마산중앙고를 졸업하셨는데, 당시 인문계 학교 중에서도 괜찮은 축에 들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야말로 시험을 매번 벼락치기로 쳤는데 영 바닥은 아니었나 봅니다. 사실 중학교 3학년 때 현재는 청강고등학교(현 마산제일고등학교)에서 1회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때 3년 장학생으로 가기로 약속이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외진 곳에 학교가 있으니 반대하셔서 가지 못했습니다. 대학진학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Q. 혹시 학창시절에 하고 싶으신 꿈이나 직업이 있으셨나요?

"저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Q. 부친께서는 지금 계신가요?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온몸에 암이 다 퍼졌는데도 아프다는 말씀 한마디 없으셨고, 자는 듯이 돌아가셨습니다."

"목수는 사라질 직업 아냐"

Q. 목공도 분야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느 쪽이신가요?

"일단 큰 건물을 하는 대목공은 아닙니다. 대목공 보다는 소목공에 가깝습니다. 주로 가구나 생활용품을 많이 만듭니다. 그러니 기자님께 크게 내세울 만한 그런 작품은 없습니다. 물론 야외 공사도 하긴 합니다."

Q. 제 느낌으로 요즘 목공을 하는 분이 조금씩 늘고 있는데, 현장에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목수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제가 들은 바가 없습니다. 다만 DIY(직접 생활용품을 만들고 수리하는 개념)가 확대되면서 목공을 스스로 하시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많이 보편화됐고, 우리나라도 꾸준히 목공을 하는 분들이 늘어날 겁니다."

Q. 목공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까닭이 뭘까요?

"무엇보다 장비가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과거엔 목공을 하려면 손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요즘엔 그냥 기계에 맞춰서 하면 되는 겁니다. 또, 목재도 표준화로 사람들 필요에 맞게 대량생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취미 생활 삼아 목공을 하는 사람은 늘어날 겁니다."

Q. 그렇지만 정교한 손기술이 필요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으로 목재를 붙이는 방식 말입니다.

"그런 걸 저희는 '짜임'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기술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목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소비자가 원하는 납기일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장비를 이용해 생산하는 것이 보편화 됐습니다."

Q. 목수라는 직업의 장래성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저는 목수의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집이나 생활용품이나 나무로 만든 건 최소한 몇 년 이상은 쓰지 않습니까? 바로 물품이 소비가 안 되기 때문에 많은 숫자의 목수가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반면 목수라는 직업 자체는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인류 유사 이래 꾸준히 있어왔던 직업이고,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목수가 대접받고 있습니다. 직업으로써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목수도 영업력이 중요합니다. 저야 워낙 오래 했으니 영업력이 없어도 알음알음 일이 들어오는 편이지만, 새로 하시려면 영업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되는 건 있습니다. 이케아가 수도권에 들어오면서 공방들이 문을 많이 닫았다고 들었습니다. 이케아가 전국으로 진출하면 지역의 영세한 공방들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좀 뜬금없지만, 어린 시절엔 어려웠겠지만 성인이 된 후 다른 일을 해 보시려고 하시진 않으셨나요?

"그냥 생각만 해봤습니다. 대학도 가볼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일을 뭘 할건데?', '대학 나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건데?'라고 스스로 질문해 보니 마땅한 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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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룡 씨 작업실. / 임종금 기자

Q. 최근 협동조합을 결성하셨다고 하는데, 갑자기 협동조합을 한 까닭이 뭡니까?

"마산 내서읍에 살면서 약 5년 전부터 푸른내서주민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민회에 도움도 되고 새로운 시장도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드리목공협동조합'이라고 9명을 모아 조합을 꾸렸습니다. 일단 내서도 신도시가 만들어진 지 20년 가량 됐습니다. 리모델링이나 인테리어 수요가 생길 때입니다. 리모델링이나 인테리어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이 큽니다. 그래서 저희는 원가를 공개하고 집주인도 참여할 수 있게 투명하게 일을 하는 겁니다. 자재나 인건비 내역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소비자도 만족하면서 수익도 생기고, 그 수익을 주민회에 재투자해서 주민회를 키우고 싶습니다. 이런 것을 하려면 혼자서는 안 되고 조합형태가 적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 이사장님은 얼마 전까지 교편을 잡으셨던 송인세 선생님입니다. 저는 기술이사라는 직함을 갖고 있습니다."

Q. 다른 조합원들은 원래 목공을 하시던 분인가요?

"아닙니다. 모두 주민회 사람들입니다. 일이 들어오면 제가 일을 분배하고, 어려운 것은 가르쳐 드리면서 하고 있습니다. 8월부터 본격적으로 조합을 운영했기 때문에 아직 내세울 만한 성과는 없습니다. 얼마 전 창녕 우포늪 인근에 새집마을이라고 있는데 마을회관 2층을 다 걷어내고 리모델링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마산 현동 피아노학원 공사를 했는데, 자재는 원장님이 대고, 저희는 인건비만 받았습니다."

Q. 협동조합을 하니까 수입이 좀 좋아지셨나요?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혼자서 하다가 여럿이서 하니까 참 재미는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내려고는 안 합니다. 욕심을 내면 끝이 없고 판이 깨집니다. 합리적인 선에서 일감을 얻고 수익을 내고, 나머지는 즐겁게 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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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 중인 신성룡 씨. / 사진 제공 신성룡 씨

20대 중반에 깨우친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다'

Q. 20대 중반에 스스로 사회단체에 들어가셨다고 들었습니다.

"1993년쯤 됐을 겁니다. 군대도 다녀왔지만 저는 집에서 늘 목공만 하고, 대학도 안 갔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군대 후임이었던 창원대학교 박동규 교수에게 '세상 돌아가는 걸 좀 알고 싶다'고 해서 박 교수랑 당시 마산 창동에 있던 마산YMCA를 가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거기는 마산지역 운동권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속한 소모임이 '로댕'이라는 모임인데, 지역의 노동운동 하시는 분들이 많이 모인 곳입니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태반 이상이 구속되고 다시 모임을 건설하는 중이었습니다. 덕분에 딱 한 번 데모도 해봤습니다. 물론 잡혀가거나 그러진 않았습니다. 그 후로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때까지는 한 번도 집회를 안 나갔습니다. 그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많이 배웠습니다. 사실 저는 참 궁금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최루가스를 마시면서 알아주지도 않는 데모 하다가 잡혀가고 얻어맞고 고생하는지 연유를 몰랐습니다. 마산YMCA에서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이 어떤 자들이고, 세상의 한 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아까 푸른내서주민회 얘기도 했지만, 언제 내서지역으로 오시게 된 건가요?

"1997년에 마산 구암동 동마산IC가 지금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당시 저희는 형편이 어려워서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주민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그 돈에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고 빌리고 해서 내서 주택지를 헐값에 살 수 있었습니다. 옮기고 나서 이모부의 도움으로 이 건물을 지은 겁니다. 1층은 작업실로 하고, 2층은 저희가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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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5학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목공 체험활동. / 사진 제공 신성룡 씨

Q. 마산 내서지역에 오시게 된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사실 저희가 가진 돈이 적었기 때문에 마산 시내에서 가장 싼 곳을 골라 온 것입니다. 다른 데는 비싸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게다가 아버지께서 자주 기계나 장비를 보시러 나오시기 때문에 시내버스 통근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동면이나 이런 곳은 배제됐고요. 그 결과 내서에 오게 됐습니다."

Q. 푸른내서주민회는 어떻게 가입하게 된 것인가요?

"친구의 권유로 가입했습니다. 마산YMCA에서 배운 뒤로 저는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모토를 갖고 있었습니다. 푸른내서주민회는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라고 모토를 내걸고 있었습니다. 제 모토와 맞는 것 같아서 가입했습니다."

Q. 푸른내서주민회에서 활동해 보니 어떤가요?

"제가 다른 단체에도 가입해 봤지만, 주민회가 가장 화합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주민회는 일이 생기면 모두 나와서 같이 거들고 어울리는데 그게 참 좋았습니다. 또 이렇게 보면 색깔론처럼 보이겠지만, 저는 보수적이지 않은 주민회 정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Q. 주민회에서 뭔가 해보고 싶으신 것이 있으신가요?

"저는 사실 나서지 않고 싶습니다. 그냥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습니다. 주민회가 19년이 됐기 때문에 체계도 잡혀 있고, 회장님이 하고 싶어하는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주민회가 새로운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싶습니다."

Q. 혹시 지역을 위해서 꼭 해보고 싶으신 일이 있으신가요?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 대상으로 작업실에 데려와 체험 활동을 했는데, 대패가 뭔지 모르는 겁니다. '대패'하면 대패삼겹살만 아는 겁니다. 아이들이 서툴기는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내년엔 학교에 나가서 해봤으면 싶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기쁨을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취미형 공방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목공을 하는 즐거움도 알게 해주고 싶고, 고급기술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했고, 형편도 어려웠으며, 타의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절망하거나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스스로 쌓아왔다. 그가 자신의 신념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선 건 불과 2~3년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 그가 지역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악조건을 뚫고 지금 이만큼 온 것만으로도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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