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의 <금강> 제3편

수운은/ 왕명으로 체포되어 / 1864년 3월 10일 / 대구 노들벌에서 순교했다. // 해월(海月)이 옥리를 매수하여 / 수운을 탈옥시키려고, / 옥안에 들어섰을 때, 수운은 / 담뱃대 하나 해월에게 쥐여 주며 / (중략) 선사(先師)에게서 받은 담뱃대를 쪼개니 / 종이심지. / 깨알 같은 붓글씨, // 그대 마음이 곧 내 마음이어라 / 우리의 죽음은 오히려 지붕 떠받드는/ 기둥으로 영원한 것. // 나는 고이 하늘의 뜻에 따르려노니 / 그대는 내일 위해 어서 / 먼 땅으로 피하라. // '등명수상 무혐극(燈明水上 無嫌隙) / 주사고형 역유여(柱似枯形 力有餘) // 오(吾)는 순수천명(順受天命)하니 / 여(汝)는 고비원주(高飛遠走)하라'

- <금강> 2부 제4장 중에서

서사시 <금강>의 큰 배경인 갑오농민전쟁은 황혼의 조선왕조에서 일어났다. 알다시피 이때 조선은 붕당·세도정치로 인한 왕권 붕괴, 삼정(三政)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학정, 전염병 창궐 등으로 정치·경제·사회 전반이 혼란하였고, 거기에다 제국의 발호에 따른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엄청난 변혁기였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이 혁명적 사건도 1860년 수운의 깨달음과 동학의 창도(唱導)가 없었다면 천지가 아득해진 유랑민의 각개전투인 민란, 봉기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제우는 경신년(1860년) 4월 5일 한울님으로부터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는 종교체험을 한 뒤 동학을 전도하기 시작하였고 불과 3~4년만에 경주일원과 삼남(三南) 지역은 물론 적국적인 교세(敎勢)를 펴기에 이른다.

그 짧은 시일에 동학은 크게 일어나 기득권 세력이던 조선조정과 유림으로부터 '서교(西敎)와 같은 것으로 세상을 어지럽혔으며, 칼춤 등으로 평화시에 난을 일으키려고 당을 모았다'는 '이단사교(異端邪敎)와 요언혹민(妖言惑民)'이라는 죄명을 받게 되었다.

수운은 1863년 12월 10일 경주 용담에서 제자들과 함께 조선 조정의 선전관인 정운구에 의해 체포되고 대구 감영에 구금됐다. 다음 해 2월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그달 20일 순찰사와의 심문내용은 이러하다.

"너는 어찌하여 당(黨)을 모아 풍속을 어지럽히는가?" 하니 수운이 답하여 "사람을 가르쳐 주문을 외게 하면, 약을 쓰지 않고도 스스로 효험이 있고, 아동들에게 권하여 글을 쓰게 하면 스스로 총명해집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업(業)을 삼아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풍속이 어찌 어지럽게 되겠습니까?"

바람 앞의 등불인 기성체제는 스스로 무너져 살길이 어려울 때,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에게는 눈을 감은 채 오히려 동학의 무리를 자신의 적으로 몰아세우고 말았다.

수운의 말씀대로 1860년대의 동학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마음의 약으로 몸을 건강하게 하고, 하늘의 정기를 그대로 가진 아이들이 총명해지는 까닭이었을 뿐 풍속을 어지럽히는 혹세무민의 이단의 당파가 아니었다. 하물며 동학은 언제나 무극대도의 동학일 뿐 결코 조선조정이 이단시한, 서양의 종교나 학문을 가리키는 서학(西學)에 대항하려는 그런 의미에서의 동학(東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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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시인.

순교 앞 달인 2월에 해월 최시형은 옥리(獄吏)의 급식 담당 하인으로 위장하고 수운을 만나 탈옥을 도모하였으나, 수운의 유시(遺詩)만을 받게 된다.

동학 연구가인 윤석산 교수는 이 유시를 "등불 환희 비추는 물위, 아무런 혐의의 틈이 없구나. 기둥은 마른 것 같으나 아직 그 힘이 남아 있도다"라고 직역하고는 "첫 구절 '燈明水上 無嫌隙'은 수운 자신의 결백을 노래한 것으로 여기서 '틈'은 혐의의 틈, 즉 혹세무민의 혐의로 취조받고 있지만, 그 혐의는 결코 사실이 아님을 강변하고 있다. 나아가 수운선생의 삶이 아무런 혐극이 없듯이 한울님의 도(道) 역시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혀주는 참된 진리라는 의미다. 그래서 자기가 펼친 무극대도가 지금은 죽은 나무와 같이 보일 수 있으나(柱似枯形), 힘이 남아 있으므로(力有餘), 뒷날 겨울나무가 봄을 맞아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이, 세상에 한울님의 도가 펼쳐지게 될 것이다. 또 '高飛遠走' 와 '力有餘' 곧 남아있는 힘은 바로 해월을 지칭한다"고 해설했다.

우리의 시인 석림은 '혐극(嫌隙)'을 의미 그대로 '싫어서 생긴 틈'이라고 보았는지, 수운과 해월의 마음은 물 위에 비친 등불 빛 같아 그 틈이 없이 하나로 통하여 스승이 먼저 죽고 제자가 따라서 죽게 될 것이지만, 지붕 곧 한울님을 떠받드는 기둥이 되어 영원한 것이라고 시어로 옮겼다.

또 '고비원주'를 '그대는 내일 위해 어서 먼 땅으로 피하라'라는 고운 말로 번역했다.

해월 최시형. 동학 2대 교주인 해월은 그의 나이 34살 때인 1861년 6월 고향 인근인 경주 용담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였고, 꼭 2년만인 1863년 8월 수운으로부터 도통(道統)을 전수받았다.

1861년은 6월은 수운이 본격적인 포덕(布德)을 시작한 때이며 관의 지목과 영남 일대의 유생들의 동학 배척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 대목을 천도교 교사는 "이때 대신사(大神師)께서 최경상(崔慶翔)에게 해월당(海月堂)의 도호(道號)을 내리시고 북접주인(北接主人)에 특정(特定)하시고…"라고 기록하였다.

또 수운은 해월에게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니, 검곡에 사람이 있어 그 마음은 일편단심이라(용담수류사해원, 龍潭水流四海源 검악인재일편심, 劍岳人在一片心)'는 전법게(傳法偈)를 주었다. 도를 해월에게 전했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경주 용담에서 시작된 동학의 교화가 온 세상에 퍼질 것인데, 검곡에 사는 사람인 해월이 변치 않고 도를 전할 것이라는 의미다.

옥중의 유시(遺詩)와 전법게에서 수운이 가르친 대로 해월은 곧바로 관의 추적을 피해 '높이 날아야(高飛)'만 오를 수 있는 태백산맥의 오지로 '멀리 달아난다(遠走)'.

들에선 농부들이 / 거름을 퍼내고 / 거름 무덤에선 / 아침 햇살 속 / 흰 김이 무럭 피었다. // 장꾼으로 변장한 / 해월, 이필, 그리고 몇 사람은 / 상주(尙州)의 들을 거쳐 / 문경새재 아흔아홉 굽이 휘어 / 태백산을 찾았지. // 왕실에선 천 냥의 현상금을 걸어 / 해월을 수배하고.

- <금강> 2부 제4장 중에서

해월은 그로부터 35년간, 관군의 염탐과 추격을 피해 대부분 태백, 소백의 산자락을 넘나들며 수운의 참수로 와해된 동학을 재건하게 된다. 그이의 고향 검곡에서 귀천구별을 타파하는 '검곡설법'을 시작으로, 태백산맥의 오지인 영양 용화동에서 적서차별을 철폐하는 '용화설법', 혈기와 정욕을 종교적 수련으로 순화하여 한울님을 공경하는 수행자의 길을 설파한 '흥해설법' 등 법설(法說)을 펴기에 이른다.

'일하는 한울님'이란 그의 별호처럼 틈이 생기면 몸소 짚신을 삼고 씨를 뿌리면서 오직 일하며 실천하였고, 조직을 규합하는 타고난 역량으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혁명적 거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해월은 또 수난을 피해 달아난 망명지에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모두 외워가며, 이를 제자들에게 받아쓰게 하였고 필사본을 판본(板本)으로까지 내어 법을 후세에 전하도록 했다.

아! 시대의 명운이 어찌 그리도 가혹하였던가?

동학혁명의 밑바닥은 오로지 흰옷 입은 백성이었다. 순박하고 어리석은 벌거숭이 그들을 용솟음치게 한 썩은 왕조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어떠하였기에 수운과 해월이 일으킨 동학과 그 교세가 들불처럼 번져간 것인가?

시인이 마당놀이의 대사처럼 그린 다단계 판매망 같은 먹이사슬의 가렴주구, 미친 조선의 꼬라지를 보자.

이조(李朝) 오백년의 / 왕족, / 그건 중앙에 도사라고 있는 / 큰 마리낙지. // 그 큰 마리낙지 주위에 / 수십수백의 새끼낙지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 정승배, 대감마님, 양반나리, 또 무엇 // 지방에 오면 말거머리들이 / 요소요소에 웅거하고 있었다 / 관찰사, 현감, 병사, 목사(牧使), // 마을로 장으로 / 꾸물거리고 다니는 건 빈대, / 봉세관(捧稅官), 균전사(均田使), 전운사(轉運使), 아전, 이속, 관세위원(官稅委員) / 그들도 벼슬은 벼슬이었다. // 벼슬자리란 공으로 들어오지 / 않는 법, / 밑천을 들였으면 / 밑천을 뽑아야. // 그리고 지금이나 / 예나, 부지런히 상납해야 / 모가지가 안전한 법, // 그래서 큰 마리낙지 주위엔 / 일흔마리의 새끼낙지가, // 일흔마리의 새끼낙지 산하엔 / 칠백마리의 말거머리가, // 칠백마리의 말거머리 휘하엔 / 만마리의 빈대 새끼들이, // 아래로부터, 옆으로부터, / 이를 드러내놓고 농민 피를 빨아 // 열심히, 상부로 상부로 / 올려바쳤다. // 큰 마리낙지는 / 그럼 혼자서 살쪘나? // 오늘, 우리들이 책 끼고 / 출근버스 기다리는 독립문 근처 / 상전국(上典國) 사신의 숙소 모화관(慕華館)이 있었다. / 지금으로 말하면 / 무슨 호텔, 아니면 무슨 대사관, // 해마다 왕실은 / 삼십삼만냥의 금은보활, / 청나라 황실에 상납. / 그리고 삼십칠만냥의 돈 들여 / 상전국 사신, 술과 고기와 계집으로 접대했다.

'혹, 노예들에 의해 / 우리 왕실 밀려나게 됐을 때 / 즉각 귀국 군대로 / 도와주옵소서'

- <금강> 2부 제6장 중에서

사람들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살게 되면 도덕과 법도와 기강이 무너지고 마침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여름 금강 변을 소요하다 하늘을 본 석림처럼 우리도 금강, 낙동강, 한강에 비친 하늘빛을 보면서 조선 망국 비운의 역사를 늘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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