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인호의 '남원 땅에 잠들었네'

레코드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멀어져갔다. 오래된 골동품 취급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예전의 음색을 그리워하는 애호가들에겐 훌륭한 소장품이 되고 있다. 최근 도미도레코드사의 노래를 원형 그대로 복원해 7인치 크기의 LP 음반으로 만들면서 새 숨결을 불어넣게 되었다. 그중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손인호가 부른 '남원 땅에 잠들었네'가 수록된 음반을 구할 수 있었다. 3·15의거와 김주열 열사에 관한 노래였기에 더 관심이 갔다. 더군다나 민주주의 성지인 우리 지역(마산)의 명칭이 노랫말로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던 노래이기에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가 만들어진 과정과 사연을 들려줄까 한다.

손인호(본명은 손효찬, 1927~2016)는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수풍댐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겨 중국 창춘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평양에서 열린 이북도민 전체 노래자랑대회에 참가해 '집 없는 천사'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이때 심사위원장으로부터 가수가 되려면 이남으로 가야 소질을 살릴 수 있다고 권유해 월남을 결심했다.

이듬해인 1946년 12월, 여섯 살 터울의 형과 단둘이 서울로 내려왔다.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나이가 어려 곧바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때 당시를 회고하며 "사람이 일주일 동안 굶어도 물만 먹으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며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토로했다.

마침 작곡가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단에서 실시한 가수모집에 응모해 참가자 300명 중에서 1등을 차지하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6·25를 전후해 녹음기사로 전업한 그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 예대에 입대해 군번 없는 용사로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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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인호.

휴전 직후인 1954년, 손인호는 작곡가 박시춘에게 '나는 울었네', '숨 쉬는 거리' 두 곡을 받아 녹음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신세기레코드를 거쳐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비 나리는 호남선'을 발표했다. 연이어 '울어라 기타줄', '사랑 찾아 칠백 리'와 '하룻밤 풋사랑', '이별의 성당고개' 등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럼에도 방송 무대에 서지 않아 '얼굴 없는 가수'로 불렸지만 그의 인기는 높아만 갔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는 "손인호 선생이 정상에 서 있는 동안 방송은 물론 일반 무대에서도 볼 수 없었다. 톱 가수 반열에 오른 1955년 결혼 당시 부인조차 손 선생이 가수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TV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게 2001년 KBS '가요무대' 특집방송의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 편'이었다"며 그에 관련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1956년 자유당 이승만 후보에 맞서 야당의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해공 신익희 선생이 유세 도중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갑작스레 서거하자, 국민은 '비 나리는 호남선'을 추모곡처럼 불렀다. 또한 이 노래가 민주당의 당가로도 활용되고, 노랫말을 신익희 선생의 미망인이 썼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당국은 노래를 만든 작곡가 박춘석과 손로원 작사가, 가수 손인호를 연행해 조사했다. 경찰은 노래를 만든 배경에 대하여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이 곡이 신익희 선생 서거 3개월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혐의를 벗고 풀려날 수 있었다.

손인호는 1957년 말에 '빈대떡 신사'로 잘 알려진 한복남(1919~1991)이 설립한 도미도레코드로 옮겨 '한 많은 대동강', '짝사랑', '물새야 왜 우느냐', '이별의 부산항', '청춘등대'와 '향수의 블루스', '남행열차'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1960년에 접어들어 자유당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3·15 정, 부통령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일삼았다. 3월 15일 선거일에 공공연한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시민들은 '협잡선거 물리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항의하는 마산시민에게 경찰이 최루탄과 총기를 무차별로 발포하면서 많은 인명이 죽었다. 이때 시위 중에 행방불명되었던 남원출신 마산상고(현 용마고) 김주열의 시신이 실종 28일 만인 4월 11일에 발견됐다.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이를 본 마산시민들이 분노해 2차 시위를 벌였고 마침내 4·19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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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땅에 잠들었네’ 초판 유성기음반.

2차 마산의거가 시작된 그 날, 부산 도미도레코드 사무실에서 한복남과 전속 작사가 차경철은 신문에 난 마산의거 기사를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신문을 본 차경철 작사가가 한복남 대표에게 이를 소재로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복남은 흔쾌히 동의했다. 차경철 작사가는 그때의 심정이 울컥해 5~10분도 안 되어 단숨에 노랫말을 썼다고 했다. 김주열 열사를 기리는 노래 '남원 땅에 잠들었네'는 이렇게 두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만들어졌다.

한복남은 손인호를 떠올리며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자 손인호는 기꺼이 승낙했다. 수백 곡을 녹음하면서 단 한 번 만에 녹음을 끝내기로 유명하던 손인호였으나 '남원 땅에 잠들었네' 만큼은 달랐다. 그는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는데 김주열 열사의 얼굴이 자꾸 생각나면서 저절로 울음이 나오더군요. 처음 녹음은 울먹울먹하면서 했습니다. 그래서 녹음을 3번이나 해야 했지요. 그 뒤로도 이 노래만 부르면 가슴이 아프고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2006.10.30. 경남도민일보 이서후 기자의 인터뷰내용)라며, 북에 고향을 둔 자신이 '한 많은 대동강'을 부를 때도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래를 발표하자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당시 대학가 시위에서 널리 불렸으나 이듬해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에 의해 학생들에게 너무 자극을 준다는 석연찮은 명분으로 방송금지 시켰다. '남원 땅에 잠들었네'는 유성기 음반(SP)발매 이후 1960년대 전반에 LP 음반으로 재발매 되었다. 이 노래는 1963년 도미도레코드에서 발매한 10인치 LP로 제작된 '손인호 가요 힛트 앨범 제3집'의 타이틀곡으로 있으며, 12인치 LP 음반 '손인호 가요 힛트 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곡이 LP음반에 실리면서 전주 도입부에 녹음되었던 총소리, 군중의 함성과 대사까지 모두 삭제시키는 바람에 최초로 수록된 음원을 찾아볼 수 없다.

4·19혁명과 관련된 여러 노래와 달리 '남원 땅에 잠들었네'는 1970년 이후까지 재발매 됐지만, 이 곡의 원래 의미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이 곡을 제작한 도미도레코드사가 부도나면서 노래 또한 서서히 잊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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