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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극단 이루마 창작 초연 <적산가옥>이 지닌 의미

일제강점기 속 우리 자화상…아픔 넘어 화해로
일제 패망 직전 소도시 거대저택 배경, 친일파 집안 파멸 그려
'무대·음악' 참혹한 역사 표현…묵직한 주제로 현 시대 돌아봐

문정민 기자 minss@idomin.com 2017년 09월 28일 목요일

창원시 진해구에는 중원로터리 중심으로 적산가옥이 즐비하다. 적산(敵産)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을 뜻한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건물을 가리킨다. 100년도 더 된 근대건축물이자 일제에 의해 얼룩진 역사이기도 하다. 아픈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적산가옥'이 연극으로 옮겨졌다.

극단 이루마가 지난 22·23일 3차례 김해문화의전당 누리홀 무대에 <적산가옥>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친일 집안을 다룬 창작공연으로 관객에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백하룡 작가 손끝에서 나온 희곡은 장자번덕 대표이자 연출가인 이훈호 씨를 거쳐 작품으로 탄생됐다. 

광복 72년이 흐른 오늘. 일제 수탈과 착취, 만행은 음식, 언어, 문화 등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연극 <적산가옥>이 던지는 메시지와 내포된 의미를 짚어봤다.

◇욕망에 갇힌 친일파 '파멸'을 이야기하다

일제 패망 직전의 지방 소도시. 조선 각지, 만주지방을 돌아다니며 징병 지원을 독려하던 최인식이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선다. 일왕에 자작 작위를 받은 터라 위풍당당한 풍채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최경진마저 학도병으로 보낸 그다. 일본인보다 더 높은 충성심이 갸륵할 정도다.

아내 윤정혜는 아들을 전쟁터로 내몬 최인식을 증오할 따름이다. 최인식의 달콤한 휴식도 잠깐, 윤정혜는 정부 천태경과 함께 남편을 죽이고 만다. 자신의 불륜을 목격한 딸 최승림의 의심은 강하게 조여오고, 윤정혜는 결국 천태경과 함께 떠난다. 도피 행각은 미얀마 정글에서 돌아온 최경진과 어머니 행적을 좇던 최승림에 발목 잡힌다.

실랑이 끝에 정부였던 천태경이 아들의 총에 쓰러지자, 윤정혜는 살아갈 이유를 잃은 듯 자살을 선택한다.

▲〈적산가옥> 한 장면. 어머니 윤정혜(오른쪽)의 불륜 사실을 추궁하는 딸 최승림.

1년 뒤. 최승림은 아버지 최인식이 받았던 귀족 자리를 동생 최경진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전쟁 후유증과 천태경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리던 최경진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아편이 없으면 일상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중독된 상태. 일제 부역자로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는 최승림과 현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최경진의 갈등은 깊어만 간다. 이에 더해 최경진은 집안의 살인과 불륜, 패륜 등을 세상에 알리려고 한다.

<적산가옥>은 친일파 집안이 스스로 욕망에 갇혀 자멸해 가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작품을 정의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마태복음 23:27 구절이 절로 겹친다.

극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처참한 고난도 녹아있다. 미얀마 지역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가 일본군 강압에 못 이겨 부비트랩을 여는 대목은 차마 마주할 수 없는 아픔이다. 장면 곳곳 애달픈 분위기를 이끈 음악은 때론 절제된 소리로 슬픔을 자아낸다.

무대 배경에는 강제노역으로 폭행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조선인, 꽃다운 나이에 끌려갔던 소녀들, 그리고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 장면이 교차하며 펼쳐진다.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보여줄 시각적 효과로 더할 나위 없다.

집안에 숨겨진 온갖 추악한 실상을 알게 된 열여덟 최경진. 집안의 모든 죄를 뒤집어쓴 듯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흘리는 눈물은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등장인물들을 통해 영원히 감춰놓고 싶어 했던,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백 작가. 작품은 세상 누구보다 존귀한 척하나 발끝까지 부패한 인물을 통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현시대를 돌아보게 한다.

▲아내 윤정혜의 정부 천태경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최인식.

◇적산가옥 없는 <적산가옥>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적산가옥'이라고 칭할 만한 건축물 하나 찾을 수 없다. 무대 장치라고는 테이블과 의자와 총기 몇 자루 등 소소한 소품이 배경을 꾸밀 뿐이다.

이에 이훈호 연출가는 "적산가옥이란 단순히 주택의 의미가 아니다"라며 "일제가 자행한 반인륜적 행위로 지금도 고통받으며 사는 이들, 친일 인사를 독립군으로 둔갑시키는 후손, 역사를 조작하려는 세력들이 공존하는 현재 우리 자화상이다"라고 말했다.

이 연출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사과다. 친일파 집안이란 소재는 화해를 이끄는 통로다.

집안의 이면을 알게 된 최경진과 집안 어르신에 의해 삶이 짓이겨진 '종녀'가 손을 맞잡고 가는 장면은 이와 다르지 않다. 분노도 아픔도 모두 화해로 승화시켰다.

이 연출가는 "과오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과하고, 화해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일념을 작품에 담았다.

◇창작 초연 기대와 아쉬움

'적산가옥! 광복 후 남겨진 일본인의 집. 단어에서부터 뭔가 기괴한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호기심을 자아내네요. 대체 그런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죠?', '아직까지 친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연극이 그려질지 무척 기대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위안부 문제 등등… 우리의 생각이 연극을 통해 산교육이 되었음을…기대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적산가옥>에 대한 기대 평이다. 극단 이루마가 공연을 앞두고 진행한 이벤트다.

글에서 알 수 있듯 무대를 보기 전부터 지역민 관심이 모아진 작품이다. <적산가옥> 제목에서 풍기는 의미 또한 묵직하다. 깊고 무거운 주제라는 것도 직감할 수 있다.

이틀간 공연을 찾은 관객들은 대체로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창작 초연인 만큼 아쉬움도 있다.

▲집사 지서방(왼쪽)을 통해 집안에 숨은 추악한 실태를 알게 되는 최경진. /극단 이루마

22일 공연을 보고 나온 고등학생들은 "일제 강점기 당시 사용한 용어와 언어들이 현실감 있어서 좋았지만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다"고 입을 모았다.

얽히고설킨 인물 관계와 의뭉스러운 전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자칫 대사 하나 놓치면 긴밀하게 짜인 극의 내용도 놓치게 된다.

이 연출가와 공연을 추진한 이루마는 향후 무대와 소리 등 미흡한 부분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거쳐 한층 완성된 작품을 올릴 계획이다.

연출가초대전으로 진행된 이번 공연은 경남문화예술진흥원, 경상남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2017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 사업의 하나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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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민 기자

    • 문정민 기자
  • 문화부 연극, 문학, 영화 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