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14) 고성 검포갯벌
청동기시대 고인돌서부터 해상무역 강국 가야 보여준 내산리고분군·양촌리성터
세월호 소유 기업 천해지까지…과거·현재 아우르는 장소

작은 가야? 센 가야?

고성군은 땅 모양이 반도(半島)처럼 생겼다. 북쪽 하나가 육지로 이어져 있고 나머지 동·남·서쪽 셋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고성반도는 영어 'T'자를 오른쪽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뉘어 놓은 위쪽(북쪽) 끝이 동해면 외산리와 내산리이고, 옆으로 뻗은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가 고성읍이다.

고성읍은 고성군의 중심이다. 읍내에는 송학동고분군이 있다. 어지간한 동네 야산 정도로 커다랗다(실제 무기산(舞妓山)이라 했던 적도 있다). 2000~1500년 전 고성 일대를 쥐락펴락했던 지배집단의 무덤이다. 고려시대 스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성에 있었던 가야를 일러 '소가야(小伽倻)'라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고성을 두고 '작은' 가야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소가야'에서 '소'는 뜻(작다)이 아니라 소리(소=세)로 읽어야 합당하다. '작은' 가야가 아니라 '센' 가야라는 말이다.

동해중학교와 내산리고분군 사이에 있는 고인돌.

고성을 소가야라 적은 기록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 유일하다. <삼국지>는 '위서 동이전'에서 '고자미동국(古自彌東國)'이라 했고, <삼국사기>는 '고자국(古自國)' 또는 '고사포국(古史浦國)'이라 했다. '고차국(古嗟國)'과 '구차국(久嗟國)'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현이다. 한자로 표기된 옛날 지명에서 첫째 음절은 초성과 중성이 되고 둘째 음절은 종성이 된다. '고+ㅈ=곶' 또는 '고+ㅅ=곳', '고+ㅊ'인 것이다. 따라서 고성은 '곧은 나라' 또는 '굳은 나라'다.

고성반도와 중개무역

'곶'은 반도를 이르는 토종말이다. 그러니까 '곧은 나라'는 곧 '반도의 나라'를 뜻한다. 고성의 반도 지형이 당대 사람들에게 고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고성의 고자국은 가야시대 전기와 중기·후기 모두 강국(强國)으로 꼽혔다.(김해의 가락국은 초기에만 세었고 경북 고령의 대가야는 후기에만 세었다. 고성과 마찬가지로 초·중·후기 모두 세었던 세력으로는 함안의 아라가야 정도가 꼽힌다.) 이렇게 센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지리적인 조건이 바로 반도였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바다가 더 험했다. 고성 일대 바다는 'T'자를 옆으로 뉘어놓은 세로변에 해당한다. 섬들이 숱하게 떠 있어서 배를 타고 다니기에는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바다 자체가 원래 험한 데다 점점이 떠 있는 섬과 섬 사이 물길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반면 옆으로 뻗은 'T'자의 줄기를 이루는 고성의 중심 부분 육지는 평탄했다. 돌출한 산악지대가 아니라 물길이 흘러내리는 퇴적지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너비가 3㎞를 웃돌지만 2000~1500년 전에는 그게 500m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육로를 내면 멀리 바다를 에둘러야 하는 험난함과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이나 서해에서 오는 무역선은 고성 남서쪽에 정박해 북동쪽으로 물건을 옮길 수 있었다. 일본이나 신라 또는 아라가야·가락국 같은 데서 오는 무역선은 북동쪽에 닻을 내리고 남서쪽으로 짐을 옮기면 그만이었다. 고성(고자국)은 이런 독특한 지형 덕분에 중개무역의 적지가 되었다. 고자국은 이를 통하여 부(富)를 쌓고 힘을 키웠다. '곧은 나라'였기 때문에 고성은 '굳은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고성이 '굳은 나라', '센 나라'라는 것은 지금 지명에도 남아 있다. 고성에서 고(固)는 '굳다'는 뜻이다. 고성은 별칭이 철성(鐵城)인데, 철=쇠 또한 그 속성이 '굳고' '세다'.

내산리 고분군의 주인공

굳센 고성으로 드는 북동쪽 관문은 그 자체로 굳세었다. 고성반도의 북동쪽 끄트머리는 지금 동진대교가 놓여 마산으로 이어진다. 여기 당항만 어귀는 너비가 350m 정도로 무척 좁다. 가로로 기다란 당항만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덕분에 돛이나 노밖에 없던 시절에도 어렵지 않게 배를 부릴 수 있었다. 여기만 잘 지키고 제대로 건사하면 만사형통인 모양새다. 2000년 전, 1500년 전 옛사람들도 당연히 이런 지형을 알고 활용을 했다.

내산리고분군에서 만난 할매.

이를 일러주는 역사 유적이 있다. 동해면 내산리 166-3 일대 고분군이다. 내산리고분군은 당항만 안쪽 서쪽 갯가에서 직선거리로 1㎞ 남짓 떨어진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다. 3월 18일 찾았을 때 연세가 여든다섯인 할매를 만날 수 있었다. 하루 전 이웃집 할매가 쑥을 캐서 5000원에 팔았는데 그게 샘이 나서 쑥을 캐러 나왔다고 했다. 물어보았더니 열아홉에 여기로 시집왔다고 했다. 당시 여기 일대는 모두 논밭이었다고…. 훼손이 얼마나 심했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원래는 무덤이 100개 넘게 있었다고 한다.

내산리고분군은 당항만이 바깥 바다와 만나는 자리 근처에 있다. 한반도 동쪽에 있는 세력들-가락국, 아라가야, 일본(왜), 신라 등이 고성으로 드나드는 해상 관문이다. 여기 고분군은 이 관문을 지키는 지역 귀족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고성은 이처럼 한반도 동쪽과 서쪽을 잇는 해상강국이었다.

내산리고분군은 1997~2005년 모두 일곱 차례 발굴조사를 했다. 출토된 유물, 특히 토기들은 내산리고분군이 500년대 전기와 중기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일러주었다. 무덤은 모두 65개가 확인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지름이 20m 안팎인 대규모도 23개가 있었다. 금귀걸이·금팔찌는 물론 옥구슬·흙구슬도 나왔다. 함께 출토된 재갈과 말안장, 발걸이 같은 마구(馬具)들은 당대 이들의 철기 제작 기술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이 가운데 발걸이는 일본 것과 비슷하여 국제 교류가 왕성했음을 보여준다. 고성읍내 송학동고분군은 고자국에서 으뜸가는 지배자의 무덤일 것이다. 그리고 동해면 내산리고분군은 해상 교역에서 핵심으로 활동한 그 바로 아래 신분의 무덤이라 하겠다.

내산리고분군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양촌리 산 167번지 일대 동해중학교 뒷산에 남아 있는 양촌리성터를 통하여 짐작해볼 수 있다. 고성군청 기록을 보면 해발 113m 되는 9분 능선에 돌과 흙을 함께 섞어 쌓은 산성이 있다. 지난봄 3월 19일 둘러보았는데 겨우 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서면 당항만 들머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적 당항만으로 드나드는 무역선들을 감시·통제하는 요충지였을 것이다.

검포마을숲과 금강중공업

내산리고분군에서 당항만 쪽으로 바로 아래에 마을이 하나 있다. 동해중학교와 동해초등학교가 모두 포함되는 '검포(檢浦)'다. 400년 전 이쪽저쪽 김해 김씨와 밀양 손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는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당항만에서 대승을 거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감시·통제하는 검문소가 있어서 검포라 했다고 한다. 지형과 맞아떨어지는 합당한 지명이라 하겠다. 이는 1500년 전 가야시대에도 여기에 주어진 역할이었다.

검포마을 앞에는 조그만 실개천이 하나 흐르고 있다. 검포갯벌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이 물줄기를 따라 마을숲이 조성되어 있다. 대략 200년쯤 되었다는데 나무 등걸이 제법 굵다. 안아보면 두 아름이 넘는 녀석들도 적지 않다. 규모도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크다. 바깥 쪽은 농경지이고 안쪽은 마을이다. 요즘 들어서는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부러 찾아와 쉬었다가 가는 외지 사람들도 많다. 물론 옛날에는 바다에서 흘러드는 바람과 파도를 막는 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마을숲 바깥에 있는 농경지는 그 이후에 갯벌을 매립하고 간척해 만들었을 것이다.

검포갯벌.

검포갯벌은 3분의 1 정도가 살아남아 있다. 3분의 2는 매립되어 배를 만드는 조선공장이 차지하고 있다. 금강중공업이다. 금강중공업이라 하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천해지'라 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14년 4월 16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가라앉으면서 경기도 안산 꽃다운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숱한 생명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세월호, 그 세월호를 사실상 소유했던 기업이 천해지다. 천해지는 세월호 참사의 주범 유병언 일가의 핵심 계열사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고성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2014년 10월) 2015년 12월 GH컨소시엄(금강레미콘+천해지 협력업체들)에 680억 원에 팔리면서 이름을 금강중공업으로 바꾸었다.

내산리고분군보다 앞선 시기에도 여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증거물은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양촌리 지석묘)이다. 고성군청은 여덟 개 있다고 적었지만 실제로 확인한 것은 늘려 잡아도 넷밖에 되지 않았다. 동해중학교 맞은편 정원에 하나가 숨어 있다. 그리고 동해중학교 바로 옆 실내포장마차식당 좌우에 하나씩 있다(이 가운데 하나는 아닌 듯도 싶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동해중학교와 내산리고분군 사이 산기슭에 있다. 이 마지막 하나가 가장 고인돌답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처럼 검포마을에는 사람이 살았던 자취가 겹겹이 남아 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가야시대 성터와 고분군, 그리고 400년 묵은 마을 이름 검포와 200년 넘은 마을숲. 바로 엊그제 일어난 것 같은 세월호 관련까지…. 아마도 이런 지역을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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