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실, 깨달은 자 보기엔 미혹의 삶
소 등에 타고 소 찾아 헤매지 말아야

'망운풍송수성래침반(望雲風送水聲來枕畔) 망운월이산영도창전(望雲月移山影到窓前)'.

망운산에 바람이 부니 물소리 베개 맡에 들려오고 망운산에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창 앞에 이른다. 바람소리 타고 귓전에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를 듣는 정적은 고요의 극치가 아니던가, 달이 조금씩 기울 때마다 옮겨가는 산 그림자가 어느덧 창 앞에 이른 것을 감지해 본다. 망운산정(望雲山頂)에 고요히 앉아서 정좌해 있노라면 선심(禪心)의 그윽하고 유현(幽玄)함을 통해 언외(言外)에 깊고 깊은 오묘한 정취가 있는 그야말로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유의 극치를 깨달을 수 있다.

선심의 고요함이란 망운산 가녀린 바람결에 실려오는 개울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요함이다. 선객은 선방에 앉아 좌선을 통해 마당에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다 들어야 한다. 심지어 몇 마리가 기어가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고 옛 선사는 일렀다. 이처럼 선정(禪定)의 유현함이야 말할 수 있겠는가!? 선인(禪人)에게는 온 우주가 모두 선천선지(禪天禪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빛이 물속을 스며들어도 그 흔적은 보이지 않고, 대나무 그림자가 뜰은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귀신같은 일 같지만 선을 하는 마음은 이같이 투명하다. 극도의 정적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유현한 선심을 일깨워 나가야 하겠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

꿈속에서는 분명하고 분명하게 여섯 갈래의 삶이 있으나 꿈을 깨고 나면 텅 비고 텅 비어서 온 우주가 하나도 없네. 불교에는 꿈에 대한 얘기가 많다. 꿈과 현실의 관계가 미혹과 깨달음의 관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꿈을 꿀 때 모든 사물과 사건들이 현실과 다름 없이 그대로 다 있다. 그래서 꿈속에서 전혀 꿈인 줄 모르고 생활한다. 꿈을 깨고 나서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꿈인 줄 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하는 이 현실도 깨달은 사람들이 볼 때는 미혹의 삶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꿈을 꾸는 그 당체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꿈을 꾸는 능력과 꿈을 꾸는 그 사람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깊이 사유하면 단박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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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소기우자(可笑騎牛子)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 소진해중구(銷盡海中嘔)'.

주로 선가에서는 마음을 찾는 일을 소를 찾는 일에다 비유했다. 마음(心)의 소라 하여 심우(心牛)라고도 한다. 그래서 소를 찾는 과정을 그린 심우도(心牛圖)가 유명하다. 난행고행을 통하여 소를 찾아 나섰지만 소를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정작 자신이 타고 있다. 알고 보니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일을 하였다. 아예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균형과 조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안으로 실다운 마음이 없으면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반드시 살피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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