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종점서 내려 도보…전화도 안 되는 한적한 동네
등대 보기 위해 '모세의 기적'처럼 열린 바닷길 걸어가

꿈에서 웅얼웅얼 말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려보니 오들도 숙소 주인 에브게니가 라디오를 틀어놓고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발코니에 나가 블라디보스토크의 평화로운 아침을 음미하고는 집을 나섰다.

티그로바야 아파트 근처에서 '등대'라고 써진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간 다음 최종 목적지인 토카레브스키 등대에 도착하는 것이 오늘 첫 번째 이동 경로다. 60번 버스를 탔지만 방향만 유의하면 등대로 가는 버스는 아무거나 타도 상관이 없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을 지났다.

버스에 앉아 있으니 어딘가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적 부산 백화점에 갈 때 그 버스 안에서 나던 냄새, 플라스틱이 녹아내릴 것처럼 사람들의 손때가 많이 묻은 냄새, 중고등학교 시절 등하굣길에 맡았던 바로 그 냄새! 자세히 보니 버스 곳곳에 한국어 글씨와 한국 노선도가 그대로 붙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운송업자와 한국 버스 소유자 사이 자유계약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쓸모를 다한 버스들이 이곳에서는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감각으로 창 밖의 낯선 풍경을 바라보자니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토카레브스키 등대는 썰물 시간대에만 바다 사이로 드러난 길을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버스 안에서 밀물과 썰물 시간대를 알아보려다가, 그냥 운에 맡기기로 했다. 억지로 시간을 조율하는 것보다는 오늘은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다 온 줄도 모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에 보니 종점이었다.

종점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는 또 다른 모습의 오래된 마을이었다. 군데군데 현대식 고층 건물이 올라가고 있었지만 언제 저곳에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될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구글 지도로 방향을 잡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운 산책을 기대했지만 길이 너무 한적하고 낡아서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앞서 가던 외국인 두 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나 곧 어금니를 꽉 깨물 일이 생겼다.

어제부터 너무 많이 걸은 탓인지 샌들이 발에 안 맞은 탓인지 발에 물집이 잡히려고 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왜 운동화를 안 가져온 걸까! 아쉬운 대로 가방에 있던 티슈를 신발과 살이 닿는 부분에 몇 장 덧대었다. 아픈 곳이 등장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배가 고파졌고 곧이어 화장실까지 가고 싶어졌다. 한 십 분쯤 걷다 보니 눈앞에 주유소와 편의점이 나타났다. 이제 살았구나!

기쁜 마음에 'bandage(붕대)'가 있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늘씬하고 어여쁜 캐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젓기만 할 뿐이었다. 사진을 찾아서 보여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응급용품 코너에도 먹는 약이나 여성용품은 있어도 그 흔한 의료용 밴드 하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허기만 달래기로 했다. 베이커리가 잘 갖춰져 있어서 나는 아침식사로 삼사(안에 채소와 양고기가 들어가 있는 빵) 한 개와 오렌지 주스를 먹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아예 3G도 잡히지 않는 동네였다.

바다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길은 전부 차도다. 딱히 도보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도로의 가장자리도 부서져 있거나 흙길이거나 혹은 풀들이 길고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최대한 차도에서 떨어져 있으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편한 운동화였으면 아주 산뜻하게 걸을만한 거리였지만, 아픈 발을 이끌고 걷자니 아주 먼 길처럼 느껴졌다.

해안가에 자리 잡은 집들은 하나같이 조용했다. 가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지나가는 차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심심하기도 하고 기운을 더 내고 싶기도 해서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웃으면서 "Доброе утро(도브뤠 우트러)!"하고 인사를 건넸다.

걷다 보니 저 멀리 탁 트인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왠지 멋진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풀숲을 살짝 넘어가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섬은 러시아의 숨은 비경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루스키 섬(Russky Island)이다. 세상에서 가장 긴 대교(1104m)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루스키 대교는 2012년 APEC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러시아인들조차도 이 섬으로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천 길 낭떠러지 위를 걷는 모험 가득한 트레킹은 다음에 동행인이 있을 때 가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곧 내리막길이 나왔고 지금껏 걷던 찻길은 나를 바다 곁으로 놓아주었다. 주차장과 해변 곳곳에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가족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그리고 배낭 여행자들로 가득했다. 바닷바람의 격렬한 환영 인사를 받으며 나는 등대 쪽을 슬쩍 보며 내 운을 확인했다. 송전탑 너머로, 바닷길이, 나 있었다! 다행이었지만 망망대해 사이에 놓인 저 가느다란 길은 금방이라도 물로 뒤덮일 것 같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바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글·사진 시민기자 박채린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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