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13) 고성 마동호 갯벌
광복 후 전국 첫 간척사업 1960년 갯벌서 옥토 변신
선사시대 '거산리 지석묘'높은 축대 위에 있어 독특
도내서 가장 넓은 갈대밭 새·곤충 등 생명체 품어
2021년 방조제 완공 예정썩은 바다로 변할까 우려돼

광복 이후 전국 최초 간척

마동호 갯벌을 한 바퀴 둘러보는 시작점은 간사지교가 적당하다. 고성군 마암면 삼락마을과 거류면 거산마을을 잇는 다리다. 여기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조그만 빗돌이 있다. '국회의원 벽산 김정실 선생 공적비'다. 김정실(1904~1969)은 고성읍 출신으로 1950년 6·25전쟁 직전인 5월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고성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사람이다. 1988년 2월 세웠다는 비문을 보면 김정실의 공적은 이렇다.

"선생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제 땅을 갖도록 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 제2대 국회의원이 되자 곧 1951년 피난정부의 어려운 재정과 당시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지역민들의 숙원사업인 고성 간척지 조성사업을 온갖 열정을 다해 마침내 이루어내였으니 이는 광복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간척사업이었다. 1951년 지역 유지 천경두 씨와 추진위원회를 구성 1952년 3월 총사업비 3억 6000만 원으로 착공하여 60년 12월 준공된 이 간척 농지는 쏙시개의 버려진 황량한 갯벌에서 이제 경지면적 백여 정보에 연간 3천여 석의 쌀을 생산하는 기름진 옥토가 되어 거류·마암·고성 3개 읍면에 속한 7개 마을 3백여 농가에 생의 터가 되고 있다."

9년에 걸친 간척사업이었다. 마동호 갯벌에서 육지 가까운 안쪽 100㏊(30만 평)는 논으로 개간되었다. 바깥에는 거산 방조제와 간사지교를 이어 붙여 바다를 막았다. 500m가량 되는데 이전에는 배를 타야 건널 수 있었다. 지금 쓰는 다리는 1998년 새로 만든 것이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 옛 다리에는 수문이 달렸다. 바다에서 짠물이 올라오지 않도록 막는 구실이다. 이렇게 소금기를 줄여야 개간한 농지가 염해(鹽害)를 덜 받기 때문이다.

간척사업을 한 뒤에는 여기를 '쏙시개'라 하지 않았다. 무엇이라 했을까? 지금처럼 '마동호'라 했을까? 아니었다. '간사지(干沙地)'라 했다. 사전을 보면 간사지는 "'간석지(干潟地)'의 비표준어"라 적혀 있다. 방패(干)처럼 생긴 펄(潟)이 밀물·썰물에 따라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땅(地)이 간석지다. 간단하게 말하면 개펄을 모래로 착각하는 바람에 생긴 이름이다. 이런 보통명사가 고성에 와서는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간사지를 마동호라 할까?

독특하게 생긴 거산리 지석묘

간사지교에서 거산 방조제를 건너 맞은편 거산삼거리로 간다. 1010호 지방도로 거산삼거리 언저리에서 마동호 갯벌을 돌아보면 들판 한가운데 고인돌이 하나 솟아 있다. 거산리 지석묘인데 모양이 독특하다. 보통 고인돌은 땅바닥에 있지만 이 고인돌은 사람 키보다 높은 축대 위에 있다. 원통 모양 축대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돌계단도 있다. 고성군청 문화관광과에서 붙인 안내문은 이렇다.

"…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이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첫째 문장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지만 둘째 문장은 드물게 보는 내용이다. 2000년 전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자리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축대 위 덮개돌이 예사롭지 않다. 표면이 편평한 돌이 적당하게 기울어져 있어 하늘로 오르는 상승감이 느껴진다. 요즘도 거산마을 사람들은 여기서 섣달 그믐에 동제(洞祭)를 올린다고 한다.

이 들판에 논이 먼저였을까, 고인돌이 먼저였을까? 당연히 고인돌이 먼저다. 그때 고인돌이 하나밖에 없었을까, 여러 개 있었을까? 마산 진동리와 김해 율하리 고인돌 유적을 보면 한군데 모여 있다. 죽어 묻히는 공간과 살아 생활하는 공간은 뚜렷하게 구분이 되었다. 죽은 이를 위한 장소와 산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 사이에는 솟대로 경계까지 표시했다.

거산리 지석묘.

그렇다면, 다른 고인돌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산 방조제로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60년 전 춥고 배고팠던 시절에는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사람이 지는 지게나 소가 끄는 달구지 아니면 트럭 정도가 고작이었다. 방조제 바닥에 까는 돌을 멀리서 가져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겠지. 가까이에 커다란 바위가 널려 있다면 더욱 그랬겠다. 고인돌이 바다에 가라앉아 2000년 뒤 후손을 위하여 방조제의 기초가 되어준 셈이다. 고인돌이 그대로 남았다면 지금 이 고인돌과 함께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대접받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달래보는 소리다.

고인돌 가까운 길섶에는 둠벙도 있다. 크지는 않고 모양이 단정하다. 갯가에 흔한 퇴적암을 일정한 크기로 떼어내어 벽면을 쌓아올렸다. 지금도 농사에 활용되고 있는 모양으로 안에는 물이 넉넉하게 고여 있다. 둠벙은 오랜 농경문화의 산물이다. 이런 역사·문화 유적이 어우러져 있는 데가 바로 마동호 갯벌이다.

경남에서 가장 넓은 갈대밭

거산마을에서 논밭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마동호 갯벌의 서쪽 부분과 만난다. 경남에서 가장 너르고 상태도 가장 좋은 갈대밭이 바로 여기다. 바람이 불면 집단으로 출렁인다. 겨울에는 추워서 '오소소' 소리를 내고 여름에는 시원하다고 '솨아솨아' 소리를 낸다. 가을에 파란 잎사귀가 마르고 나면 내리쬐는 햇볕을 되쏘는 장면이 눈부시다. 갈대는 제방 너머 간척지에도 있다. 묵정논이나 송전철탑 자리다. 반면 농사를 짓는 논에는 없다. 갈대는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는 그 순간을 틈타 땅속뿌리를 재빨리 내뻗는다. 습지 생태의 놀라운 복원력이라 하겠다.

지금 눈에 보이는 갈대밭이 예전에도 갈대밭이었으리라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옛날 쏙시개 시절에는 고성천이 용산천을 비롯한 여러 물줄기를 쓸어담고 내려왔다. 그래서 흐름이 세었는데 1960년 거산 방조제·간사지교가 들어서고 약해졌다. 옛날 같으면 물살에 쓸려나갔을 것들이 방조제 안쪽에 쌓이기 시작했다. 갈대는 바닷물에 잠기지 않으면서도 소금기가 있는 땅에 잘 자란다.

마동호 갯벌을 찾은 철새들.

사람에게는 갈대밭이 그냥 보기 좋은 풍경일 따름이다. 다른 생물에는 그렇지 않다. 집이나 호텔이면서 동시에 조산소·식당·유치원 노릇도 한다. 곤충들은 펄이나 잎사귀에 알을 낳고, 벌레가 깨어나면 잎사귀를 양식으로 삼는다. 새들은 벌레와 곤충을 먹으려고 갈대밭에 날아들고, 힘센 짐승을 피하고자 갈대밭 덤불에다 둥지를 틀기도 한다.

갈대는 이처럼 다른 많은 생명을 품는다. 마동호 갯벌에 희귀한 새들이 많은 까닭이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의 <마동호의 가치 제고를 위한 현황조사 보고서>(2012. 12.)를 보면 이렇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동물 1급이 넷(황새·저어새·매·두루미)이고 2급이 열다섯(노랑부리저어새·큰고니·큰기러기·물수리·독수리·잿빛개구리매·알락개구리매·붉은배새매·조롱이·흰죽지수리·흑두루미·재두루미·검은머리갈매기·수리부엉이)이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받는 새도 둘(원앙·황조롱이)이 더 있다.

지구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암석

갈대밭 말고 다른 풍경을 보고 싶으면 다리를 하나 건너 동쪽으로 가면 된다. 세월교라고, 콘크리트로 만들었는데 홍수가 지면 물에 잠기곤 하는 잠수교다. 건넌 다음 간사지교가 있는 쪽으로 걷다 보면 갈대밭 너른 풍경은 어느결에 멀어진다. 대신 갈대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새들이 나타난다. 새들은 길쭉하게 드러난 펄에서 쉬다가 다시 물에 들어가 먹이를 잡는다.

퇴적암이 바닷물에 깎여나가 만들어진 해식애.

조금 더 가면 '해식애'도 나타난다. 바위가 바닷물에 깎여나가면서 만들어진 절벽이다. 진흙 따위가 쌓이면서 굳어진 퇴적암이기에 파도에 좀 더 쉽게 깎였겠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채석강처럼 아주 멋지고 웅장하지는 않다. 그래도 앞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게 퇴적암이라지? 저렇게 두껍게 쌓이려면 얼마나 세월이 필요할까? 굳어서 바위가 되려면 또 얼마나? 굳어진 바위가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데는? 솟아난 바위를 파도가 얼마나 핥아야 저리 깎일 수 있을까?' 인간의 생명을 지구의 세월에 견주면 0.1초도 길다.

'마'암면과 '동'해면에서 따온 마동호

거산 방조제로 돌아와 바깥 바다를 바라본다. 대략 2.5㎞ 거리에 마동호 방조제가 보인다. 마암면 보전리에서 동해면 내곡리까지 834m 거리다. 농어촌공사는 2002년 방조제 공사를 시작하면서 안쪽을 담수호로 만든다고 했다.

거의 다 만들어진 마동호 방조제.

담수호 이름이 마암면과 동해면에서 첫 글자를 딴 마동호였다. 넓이는 408㏊이고 저수 총량은 740만 t이다. 농업용수 개발이 목적이라지만 농경지와 농민이 줄어드는 현실은 무시되었다. 반대가 거세지면서 '마동호'라는 이름이 많이 오르내렸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마동호'가 '간사지'를 대신하게 되었다.

어쨌든 마동호 담수화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은 경기도 시화호가 말해준다. 담수호를 만들려면 바닷물을 막아야 한다. 1994년 완공된 시화호는 흐름을 막으면서 오염이 극심해졌다. 1997년 다시 수문을 연 뒤에도 시화호는 오염사고를 냈다. 그 탓에 2000년 특별관리해역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썩은 바다로 공인된 셈이다. 2021년 완공을 목표로 거의 다 만든 마동호 방조제도 수문을 닫는 순간 시화호처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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