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신문 필통]나이 따라 서열·고정관념 형성…청소년 억압하는 원인되기도
학생다움 강요받고 차별 빈번…"나이, 의미 없는 구별에 불과"

"몇 살이야? 19살? 내가 형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겠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듣는 말이다. 대놓고 반말부터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제부턴가 자기 멋대로 반말을 쓰다가 "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하며 차마 내가 "아니요"라는 답을 던질 수 없는 통보를 당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웃어른에겐 높임말을, 공손한 표현을 써야 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구분하여 다르게 행동하라고 배운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면 한두 살 차이에도 깍듯이 높임말과 반말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하며, 그러지 않는다면 공격당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우리는 나이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복잡한 규칙을 습득하게 된다. 한쪽이 반말을 하고, 다른 한쪽은 높임말을 하는 건 분명히 상하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이게 과연 옳은가? 나이라는 임의의 숫자, 그리고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를 묻는 그 의미 없는 기준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따지는 것이.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운동은 '나이'라는 것을 깊게 분석한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삶의 형태를 좌우하는 장치이자 관념이다. 나이에 따라 상하 위계를 형성하기도 하며, 특정 나이대의 사람은 이러해야 한다는(또는 이러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나이는 시민으로, 인간으로 또는 성적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청소년은 나이 위계의 최하층에 존재한다. 쉽게 반말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만만한 존재로 여겨지며, 미성숙하고, 충동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청소년은 '나이-생애주기적'인 관점에서 '학생다움' 또는 '청소년다움'을 강요받는다. 청소년은 비청소년에 의해 만들어진 '이상적인 청소년(학생)'이라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도록 강요받으며 또 그렇게 자신을 검열한다. 청소년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선거권을 비롯한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하며, '시민이 되어가는 존재'로만 존재한다. '만들어지는 과정의 인간'인 동시에 '성(性)적이어서는 안 되는(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존재다.

청소년운동은 이러한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나이에 대한 억압을 표현할 언어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나이주의'라 이름 붙였다. 청소년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나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으며, '나이'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곧 청소년을 억압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청소년 해방의 해결책은 '나이주의의 철폐'에 있다.

나이주의는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 청소년을 기준으로 볼 때 나이주의적 사회는 특정한 나이대의 사람에게만 '정상성'을 부여하는데, 이마저도 상황과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표하고 성적 주체로 인정받는 사람들은 '젊은 남성 비청소년'이다. 노인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표하면 추하다고 여겨진다. 여성은 성적 주체로 위치하지 않으며, 늙은 여성은 성적 대상이 되지 못한다. 젠더에 따라 '젊음'과 '늙음'의 관념은 달라진다. 사실 나이주의는 우리 사회 전반적인 문제다. 나이주의적 사회에서 '정상성'은 특정 시점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단 한 번도 이 '정상성'에 위치하지 못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로 짓는 이데올로기는 배제와 차별을 낳는다. 우리는 이 의미 없는 숫자에 저항해야 한다. 적어도, '나이'를 의미 없는 숫자로 퇴색시켜야 한다.

끊임없이 불편해지자. 조금의 불편함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 나이에 따르는 관념을 무너뜨리자. 나이의 적고 많음 따위를 기준으로 높낮이를 따지지 않으며, 높임말과 반말의 구분은 친한 정도에 따라 달리하자. 나이의 정상성에 저항하자.

/청소년 기자 박태영

※이 취재 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