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의 <금강>

짚신 신고

수운(水雲)은, 삼천리

걸었다.

<중략>

 

이십 년을 걸으면서,

수운은 보았다.

팔도강산 뒹군 굶주림

학대,

질병,

양반에게 소처럼 끌려다니는 농노,

학정

뼈만 앙상한 이왕가(李王家)의 석양

 

이천 년 전

불비 쏟아지는 이스라엘 땅에선

선지자 하나이 나타나

여문 과일 한가운델

왜 못 박히었을까.

 

삼천 년 전

히말라야 기슭

보리수나무 투명한 잎사귀 그늘 아래에선

너무 일찍 핀

인류화(人類花) 한 송이가

서러워하고 있었다.

 

1860년 4월 5일

기름 흐르는 신록의 감나무 그늘 아래서

수운은,

하늘을 봤다.

바위 찍은 감격, 영원의

빛나는 하늘.

- <금강> 2부 제2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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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시인.

수운(水雲) 최제우가 이십 년을 유랑하며 본 것은 온갖 욕된 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유린당한 삼천리 강토였다. 그리고 그는 서른여섯 살이 되던 1860년 감나무 새순이 푸른 날, 하늘을 봤다. 수운이 본 하늘은 수운만의 하늘이 아니다.

이천 년 전, 사막처럼 두텁고 맹렬한 편견과 적대(敵對)의 불비가 내린 유대 땅. 스스로 하늘의 아들임을 깨달아 진리의 복음을 전하던 예수. 그에게 세례를 준 선지자 요한이 덜 익은 무리의 농간으로 먼저 참수당한다. 이어 잘 익은 '과일'의 향기를 거역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는 하늘의 말씀을 남기려고 순교(殉敎)한다.

석가는 샛별이 반짝이던 보리수 나무아래서 삼칠일의 법열(法悅)에서 깨어나 "내가 얻은 법은 매우 깊고 알기 어려워 오직 부처와 부처가 서로 증명할 뿐, 저 어둡고 혼탁한 인간에서, 탐욕. 사견(邪見), 교만에 덮이고 막혀서 어떻게 내가 얻은 법을 알 수 있을 것인가"라며 서러운 첫 마디를 내뱉었다. 그이의 자비심은 입멸하기까지 45년간 팔만사천법문을 남겼다.

수운 역시 굶주림과 학대, 질병, 학정, 기우는 왕조라는 이씨조선의 절체절명의 불행 가운데서 영원을 보았다. 바위보다 더 단단한 무명(無明)의 관문을 깨치니 무시무종의 빛나는 하늘이 나타난 것이다.

석림(石林) 신동엽. 자! 석림은 <금강>의 줄기를 엮어가면서 삼남의 땅을 금빛으로 여울지며 흐르는 금강을 제대로 해석해 나간다.

석림은 수운을 천명을 알아낸 사나이들- 너무 일찍 핀 인류화 석가모니, 여문 과일 예수와 함께 등장시켰다. 묘하게도 그이들이 천명을 알고 깨친 나이가 서른다섯 살 앞뒤다

시인도 인류의 스승들을 따라 하늘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았던 것인가? 그러고 보니 1930년생인 석림이 <금강>을 발표한 게 1967년이니 그의 나이도 천명을 깨우친 그이들과 같은 연배인데, 이런 우연에 눈길이 가는 것이 단지 석림이나 수운에 대한 사사로운 애정 때문일까?

어느 해

여름 금강 변을 소요하다

나는 하늘을 봤다.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중략>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 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중략>

그 눈은

나의 생(生)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하략>

- <금강> 2부 제3장 중

석림은 금강 가를 걷다가 어둠 속에 빛나는 눈동자를 본다. 어둠은 삼천년, 이천년 전이나, 1894년 황토현에서나, 시인이 살던 1967년 부여 백마강에서도 내려깔렸다. 그러나 빛나는 눈동자는 어둠이 무르익은 자시, 그리고 새벽, 승천(昇天)을 가르친다.

세상이 그냥 뒤범벅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발버둥 치는 수천만의 아우성을 싣고 구슬프게 흘러간 강물은 인류에게 역사의 유훈(遺訓)을 남겼다. 인간으로 하여금 돌이켜 밝음과 어둠이 무엇인지? 도리(道理)가 무엇이고 불의(不義)는 무엇이며, 따라서 인류는 그들에게 품부된 양심과 지혜를 되찾기 위하여 헤매이는 것이다.

석림도 "내 생의 열매 속에 빛나는 눈동자가 살아남았다"고 과감히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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