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내린 천명은 더불어 살아라는 것 같아요"

지역에서 민주화 인사와 관련 행사를 열심히 챙기는 사람으로 오길석 선생이 있다. 덕분에 지난 4월 인혁당 추모제에도 참석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민주화·통일 운동에 전념하신 분을 더러 알게 됐다. 어느 날 오 선생은 "이 사람은 꼭 인터뷰해야 한다"며 또 한 분을 소개시켜 줬다. 민주화 인사나 통일운동가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지역에 쟁쟁한 사람을 제쳐두고 이 사람을 먼저 인터뷰하라는 걸까?

흥남철수로 남쪽행… 노점으로 생계 꾸려

드라마나 영화나 만화에서 주인공이 어려움에 빠질 때 사려 깊은 장로나 원로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주인공을 일깨워준다. 오 선생이 소개한 서금성 씨(72)를 만났을 때 바로 그런 '사려 깊은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 씨는 현재 <한겨레> 부산·경남 독자모임 대표를 맡고 있으며, 과거 아모레퍼시픽 피해대리점주협의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만 얘기를 나눠도 겉으로 드러난 직함 보다 훨씬 더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Q. 제가 듣기로 북한 함경도에서 사시다가 흥남철수 작전 때 남쪽으로 오셨다는데? 혹시 북한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기억이 납니까?

"제가 해방둥이(1945년생)입니다. 북한에서 남쪽으로 오기 전에 유치원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또 전투기가 공습을 하면 옥수수밭에 숨고, 함대가 함포사격을 하면 산으로 숨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흥남에 있는 질소 비료공장에 다니셨습니다. 흥남철수 할 때 첫날에 미군 배에 타려 했지만 실패했고, 다음날 미군 상륙함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거제 장승포에 도착했습니다."

123.jpg
▲ 서금성 한겨레 독자모임 부산경남 대표. / 임종금 기자

Q. 혹시 집안이 우익 집안이라서 남쪽으로 피난을 하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기독교 집안입니다. 당시 북한 공산주의자가 오면 기독교 신앙을 말살할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흥남지역 기독교 지도자가 '같이 가자'고 해서 저희 가족도 따라나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Q. 남쪽으로 오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거제에서도 살 집이 없어 굴을 파고 사는 등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어떠셨는지요?

"저희 식구는 거제 동부면 유철리에 정착했는데, 어느 분의 방 한 칸을 빌려서 거주했습니다. 지역 교인들이 피난 온 사람을 수용하도록 이미 '할당'이 돼 있었던 모양입니다."

Q. 당시 남한엔 직장도 별로 없었을 건데 가족들 생계는 어떻게 꾸리셨습니까?

"그래서 부산으로 갔습니다. 아버지는 범일동 시장에서 노점을 하셨습니다. 처음엔 부산 우암동에 있다가 영도 이송도에 '제품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영도로 이사했습니다. 다들 어려웠겠지만 저도 육성회비인 사친회비를 못 내서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뺨도 맞고 그랬습니다. 6학년 때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Q. 그럼 초등학교만 졸업하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부산 남중학교에 합격을 했는데, 등록금 3만 9200환을 내야 합니다. 제가 아버지께서 얼마 버시는지 뻔히 알기 때문에 '이건 도저히 우리 집안에서는 낼 수 없는 돈이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다 수소문해보니 영도에 남성교회가 재건중학교(한국전쟁 이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만든 임시중학교)를 운영하는데 거기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는 저녁에 수업을 하기 때문에 낮에는 단추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후 학교가 없어져서 대성교회에서 하는 재건중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껌이나 캬라멜을 팔았습니다. 고등학교는 부산 대양공고를 다녔습니다. 등록금을 면제받으려 '고아원 출신'으로 속이기도 했습니다."

20170822010118.jpeg
▲ 육아보육혁신포럼 행사 후 찍은 사진.

Q. 제가 듣기로 노점 말고도 어릴 때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노점을 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국제신문을 배달했습니다. 당시 국제신문에서 사고도 나고 태풍 사라호 때 용지를 다 유실해서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신문이 매번 늦게 나오고 윤전부 직원 급여도 못 줘서 편집국장이 윤전부 직원에게 사정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신문이 늦게 나오니까 배달이라도 빨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무조건 뛰었습니다. 그게 더 빠르더라고요. 영도 이송도에서 지금 롯데백화점 광복점 있는 곳까지 뛰면서 다녔습니다. 그러니 독자들도 신문이 늦게 나와 불만이지만 어린 친구가 땀을 뻘뻘 흘리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눈감아 주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수업 때문에 배달이 늦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보급소에서 늦게 왔다고 지적하자 무심결에 '제가 공부하기 위해서 배달하는 거지, 배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고 말이 나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반골 기질이 좀 있었나 봅니다."

Q. 혹시 대학이나 군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대학은 못 갔습니다. 제 최종학력은 고졸입니다. 군대는 부산에 공군 보급분창이 있었는데, 거기 가려면 시험을 쳐야 합니다. 필기는 되는데 시력이 약간의 차이로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참 답답해하고 있는데 방송인 천호진 씨의 부친 천규덕 공군상사가 시험 감독관인데 제 사정을 듣고 합격을 시켜 주신 것 같습니다. 경북 상주에서 군 생활을 하고 1966년 3월 말에 제대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에서 '영업신화' 달성했으나

Q. 제대하고 직장을 어디로 가셨나요?"

"계속 장사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부지런하셔서 노점을 하면서 틈틈이 안마기 방문판매를 하셨습니다. 저도 아버지와 같이 안마기 판매를 하다 어느 날 용두산 공원에 아모레퍼시픽(당시는 태평양) 화장품 판매를 하는 분과 얘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사실 안마기 장사도 한계가 보여서 업종을 바꿀까 싶었는데 화장품 판매에 구미가 당기는 겁니다. 나중에 국제신문에 광고가 나는데 판매원을 모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1966년 9월 14일에 아모레퍼시픽 판매원이 됐습니다. 남자가 화장품을 들고 오니 신기해하지만 장사는 잘 됐습니다. 1975년 4월 7일에 본사 교육 담당 정규 직원으로 채용됐습니다."

Q. 영업을 잘 하신 것 같은데, 비결이 뭡니까? 어떻게 파셨나요?

"공급품의 특징을 파는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직접 소비자에게 상품 설명을 하고 진열도 직접 했습니다. 영업은 진열이 참 중요합니다. 슈퍼마켓 같은 데서 매장 밖에 진열 판매를 착안해서 많이 팔았습니다. 예를 들면 통영 중앙시장 안에 제일슈퍼라고 있습니다. 박순제라는 분이 사장이셨는데, 우리 제품이 럭키에 눌려 영 안 나가는 겁니다. 슈퍼에 찾아가서 '밖에 진열해 주면 팔아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밖에 진열하고 메가폰을 잡고 하루 만에 한 달 치를 팔았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는 슈퍼마켓 사장님들이 '우리 가게에도 해달라'고 요청이 쇄도하는 겁니다. 일단 말이 너무 장사치처럼 가벼워서는 안 되고 무게도 있어야 하고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설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88올림픽 지정상품으로 된 것을 가지고 근사하게 얘기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유머러스하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벌어지는 것이고,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고객의 마음을 사는 겁니다."

Q. 실적을 많이 쌓으니 회사에서 좋아하셨겠네요.

"제 영업능력이야 서성환 회장도 인정했습니다. 서 소장님 참 잘한다고. 그런데 아까 제가 반골 기질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뭔가 부담스러운가 봅니다. 아모레퍼시픽에서 오토월드 사업부라고 엔진오일 같은 것을 판매하는 사업을 새로 냈는데 그쪽으로 저를 보냈습니다. 결국 실패했고 청산작업을 해야 하는데 저는 그래도 청산을 깔끔하게 해서 부산에서는 적자를 많이 줄였습니다. 청산작업을 마쳤는데도 별다른 보직을 안 주고 있다가 한참 만에 주부 사원 42명이 있는 화장품 영업소장을 하라는 겁니다. 직급상으로는 좌천입니다. 왜 회사에서 이렇게 나를 대할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반골 기질에다가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좋아해서 얘기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그래도 대기업 중간 간부가 대놓고 김대중 지지 발언을 하고 다니니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1996년에 명예퇴직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123.jpg
▲ 2013년 아모레퍼시픽 관련 국정감사 증언. /연합뉴스 제공

Q. 듣기로 최근까지 김해에서 대리점을 크게 하셨다는데 퇴직 이후의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퇴직 사유를 묻는데 딱히 사유를 대지 못하더라고요. 대신 김해 진영에 대리점에 생기는데 퇴직하고 이걸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1996년 8월 1일 자로 퇴직하고 개인사업자로 대리점을 맡았습니다. 당시 퇴직금이 7200만 원 나왔는데 그걸로는 집세나 대리점 미수금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국민연금도 해약해서 대리점을 냈습니다. 당시 유분이 많은 제품들은 잘 안 팔렸는데 진영은 시골이니까 되레 잘 팔리는 겁니다. 본사에서 2000원에 받아서 6000원에 팔았습니다. 9월 한 달 만에 당시 돈으로 5500만 원을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후배들이 저를 따라서 많이 창업하곤 했습니다."

Q. 온라인에 선생님 이름을 검색하면 아모레퍼시픽피해대리점주협의회장 이런 식으로 기사가 뜹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회사 구조가 지주와 마름 관계와 똑같습니다. 서경배 회장은 악질이 아닙니다. 다만 서 회장도 돈이 어떻게 벌리는지 고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쪽 지점에 소비자 300명을 가지고 있으면 100명을 본사에서 저쪽 지점으로 넘기라면 넘겨줘야 합니다. 공짜로 해줘야 합니다. 그걸 구역 세분화라 합니다. 주부사원도 일 잘하는 주부사원이 있으면 본사에서 저쪽 지점에 떼줘라고 하면 보내줘야 합니다. 제 재산인데 그걸 자꾸자꾸 빼앗기는 겁니다. 약탈의 역사입니다. 초기에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저는 부위원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협상이 안 들어옵니다. '어차피 서금성이 한테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고 소문이 나 있는 겁니다. 그러다 손 모 전무가 대전역에서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만난 이후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실적 부진으로 계약연장을 못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가 2007년인데, 제가 '실적이 제자리걸음인 것은 회사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 광고를 안 했거나 제품이나 서비스 지원이 부족한지 총체적으로 살펴야지 이런 식이 어디 있냐'고 따졌습니다. 그렇게 밀고 당기다가 최종적으로 합의한 내용이 진영 대리점은 넘겨주고, 주부사원 30%는 장유에 넘기고 장유대리점을 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2013년도에 다시 아모레퍼시픽피해대리점주협의회 회장을 했습니다."

Q. 당시 협의회 요구가 뭐였습니까?

"아모레 대리점이 650개가 있는데 온갖 갑질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거나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저희 요구는 단순합니다. 악행을 인정하고, 악행을 사과하고, 책임을 지라는 겁니다. 그리곤 총 보상금액을 600억 원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20억 원으로 정리됐습니다. 대리점주 76%가 여기서 종결하자고 했습니다. 1개 대리점 당 6600만 원씩 보상하고, 여기에 대한 소득세는 회사가 부담하는 걸로 종결됐습니다. 저는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 본사 직원이 퇴직하면 대리점을 빼앗아서 직원에게 줬습니다. 빼앗아서 인수할 때도 그 전에 대리점주가 투자하고 교육한 비용은 하나도 인정 안 하고 그대로 빼앗아 버립니다. 미스터피자 이런 곳도 아모레퍼시픽 갑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까 말했듯이 이건 서경배 회장이 지시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 회장 밑에 있는 마름(간부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Q. 이런 문제에 대해 정치권이나 언론이 관심을 가지지 않던가요?

"정의당 김제남 의원이 신경을 써 주셨는데 '지금 우리 당세로는 어려우니 민주당에서 도와줄 겁니다'라며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이학영 의원에게 소개해 힘을 보태줬습니다. 언론 중에서는 제가 <한겨레> 주주고 창간 때부터 봤던 독자라 해도 크게 신경을 안 써주다가 한 번은 <한겨레> 기자·간부와 함께 바이칼 호수를 여행할 일이 생겼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바이칼호까지 72시간 기차를 타야 하는데 그동안 제가 많은 얘기를 나누니 <한겨레>에서 보도가 되는 겁니다. 그때 기차에서 김진철 기자, 권호성 기자, 박창식 국장 이런 분과 만났습니다."

213.jpg
▲ 서금성 한겨레 독자모임 부산경남 대표. / 임종금 기자

"한국교육 '무엇을 하느냐'에 매몰돼"

Q. 보통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신데, 선생님은 드물게 진보적인 것 같습니다.

"저도 1971년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박정희를 찍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하는 꼴을 보니 너무 엉망인 겁니다. 그때 부산에 김영삼 전 대통령 사무실에 들락거리면서 야당 사람들과 만나곤 했습니다. 얼마 후 1979년에 YMCA총장을 지냈던 임동기 씨와 같이 '김대중 선생 보러 가지 않겠냐'고 하는 겁니다. 당시 김대중 선생이 중앙정보부에 납치됐다 풀려나서 가택연금 상태일 땝니다. 소문에 '사람이 미쳤다더라', '아예 거동도 못하는 병신이 됐다더라' 말이 많았습니다. 저도 궁금하기도 해서 동교동에 가 보니까 사람이 풍기는 기품이 김영삼 하고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이때부터 김대중 선생에 대해 말하고 다녔습니다."

Q. 주로 부산·경남에서 사업을 하셨는데, 김대중 선생 지지자라고 하면 힘들지 않나요?

"네, 그래서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찍혔죠. 물론 호남출신 간부들은 제 말이 시원했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 외에 특별히 탄압 받은 건 없고, 이런 적은 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시국에 대해 얘기하면서 '좋은 세상 올 겁니다' 이렇게 하니까 택시기사가 파출소로 가는 겁니다. 저를 신고하려는 거죠. 그래서 택시에서 억지로 내리니까 택시기사가 '빨갱이 잡아라'고 하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사방에서 달려오는데 큰일 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오늘 저 때문에 일하시는데 지장이 있었죠? 죄송합니다'면서 만 원을 줘서 겨우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Q. 교회 장로님이신데 지금은 교회를 안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1987년에 교회 장로를 했는데 장로가 되고 나니 이게 패거리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혹시 저라는 존재가 교회 융화에 지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61살에 교회를 떠났습니다. 물론 가끔씩 교회에 가서 얼굴은 서로 봅니다. 보면 반가워하고 제 본심이 교회가 미워서 떠난 게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떠난 걸 알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안 가고 집에서 예배를 올립니다."

Q. <한겨레> 독자모임 대표는 어떻게 되셨는지요?

"2007년 부산 누리마루에서 한겨레가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그때 <한겨레> 사람들과 독자들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2015년에 부산대 하일민 교수가 대표로 부산·경남 독자모임이 결성됐습니다. 민주인사인 배다지 회장님이 고문으로 하고 저는 그냥 평회원입니다. 늘 모임 때마다 참석했는데 얼마 전에 배다지 회장님에게 연락이 오는 거에요. 들어보니 '하일민 교수가 서울로 가는데 할 대표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3월에 대표로 첫 모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처음엔 70명 정도 오다가 지금 30명으로 줄었습니다. 또 모임을 하다 보니 비용이 나가는데 다른 건 다 알아서 하겠는데 장소 사용료가 문제입니다. 한겨레 본사도 지금 어렵고. 그래서 지금은 모임을 할 때 짝수 달에는 저희가 책임지고 진행하고, 홀수 달에는 <한겨레>에서 강사만 파견하는 식으로 인문강좌를 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 부산·경남 지역 <한겨레> 독자들을 늘려야 하는데 어떤 복안이 있으신지요?

"지금 유아교육(유치원)과 보육교육(어린이집) 통합과 관련된 얘기가 많지 않습니까? 6월 13일에 경남·부산·울산 유치원 원장과 어린이집 원장 450명을 모아 놓고 유아교육의 미래에 대해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한겨레 사장도 와서 깜짝 놀라고 갔습니다. 이걸 보고 7월 12일에 서울시청에서 유아교육 혁신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유아교육 관련 행사로 독자를 300명 정도 늘렸습니다."

Q. 원래부터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습니까?

"저는 우리나라 교육이 '어떻게 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방점이 찍혀 이 모양이 됐다고 봅니다. 독일은 31%만 대학을 가지만 블루칼라가 포르쉐를 타고 다닙니다. 우리나라는 대학생이 토익 점수를 쌓다가 환경미화원이나 집배원을 합니다. 사농공상 문화가 남아서 '사' 자 붙은 직업에 혈안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유아교육부터 굉장히 획일화된 교육이 시작되는 겁니다. 김상곤 교육부총리가 교육감 시절 혁신학교를 했듯이 한 지역을 특화해서 혁신 유치원을 만들어서 다만 유아교육이라도 좀 다양하게 재미있게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123.jpg
▲ 부산지역 민주화 원로 인사 문재인 대통령.

Q. 우리나라 현실이 갑갑한 부분이 많은데 교육 다음으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뭐라고 보십니까?

"아모레퍼시픽처럼 기득권자들의 갑질로 공정경제가 훼손되는 것이 참 심각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 농촌이 황폐화됐는데, 농촌이 살아야 출산율도 올라가고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부분은 민족문제입니다. 민족문제가 해결돼야 우리나라에 활로가 생깁니다. 늘 북녘 동포와 남북평화협정을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가장 분개하는 것이 주체적인 것을 방해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을 볼 때 정말 답답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Q. 선생님은 남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까?

"요즘 저에게 주어진 천명이 뭘까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같이 하라'는 것이 저에게 준 천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겪었던 모멸도 다 더불어 같이 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기쁨을 주기 위해 제 인상부터 다듬으려 노력합니다. 이웃이 제 얼굴을 보면 조금이라도 좋은 기분이 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슬픔도 없고 분노도 없으면 애국자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국을 사랑한 청년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는 병원에 가면 '스트레스가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뭘 이루려고 목표를 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집 입구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새긴 돌을 세워 놓고, 어차피 모든 건 순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게도 배움이 있다고 한다. 그가 겪은 풍파의 천분의 일도 겪지 못한 기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옆집에 이런 어르신이 계시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