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수의 ‘고향역’

시대를 막론하고 유행하는 대중가요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시절의 사회현상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을 가져온 1970년대는 정치와 경제, 사회가 급변하며 혼란스러운 때다.

너나할 것 없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취업과 학업으로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시기마다 찾아오는 명절은 그야말로 나라 전체의 축제이자 인구의 대이동이었다. 요즘과 같이 다양하고 편리한 교통체계는 아니었지만, 여력만 된다면 불원천리라도 달려가 부모형제를 만나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던 시대였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 누구나 한결같았을 것이다. 그런 국민적 정서를 담아낸 무명 작곡가 임종수의 '고향역'은 70년대 사회문화를 고스란히 응축하고 있다.

1942년 전북 순창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임종수는 학창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그는 계수남 음악학원에 장학생으로 와서 음악공부를 하며 본격적으로 노래수업을 받았다. 임종수는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임시원'이라는 예명도 지었다. 그 무렵 남상규, 오기택 등 쟁쟁한 가수들과 함께 시민회관 무대에 서기도 했던 가수 임시원은 1967년 작곡가 나화랑에게 '호반의 등불'이란 곡을 받아 녹음하게 된다.

하지만 노래를 녹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수는 나화랑 선생을 찾아가 가수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자신의 음색과 창법에 개성이 없고, 비주얼의 문제와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작곡가 나화랑은 그의 결심에 대해 수긍하면서도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하면 너는 가수가 되고도 남는다"라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너 오늘부터 작곡을 해라"라고 제안하며 작곡을 해오라는 숙제를 내주었고, 작곡법을 배우지 않았던 그가 머리를 쥐어짜내 만든 곡이 '돌아가 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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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훈아와의 만남으로 무명 작곡가 신세를 벗어난 임종수.

임종수는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곡을 써 내려갔다. 그의 노트엔 이미 많은 곡들이 작곡돼 있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힘들게 고생하는 자신의 처량한 삶을 빗대어 '차창에 어린 모습'을 썼다. 그렇게 무명 작곡가로 생활하던 중 자신의 노래를 나훈아가 부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 임종수는 나훈아가 전속해 있는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그는 나훈아를 만나기 위해 오아시스레코드사 직원처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4~5시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기를 석 달이 지나서야 나훈아를 만났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간 나훈아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사장실에 한참 있다 나온 나훈아가 사무실 현관문을 밀고 나가려는 순간, 5분 만 시간을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나훈아는 5분 만이라는 말에 그를 따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한 소절을 부르는 사이 등 뒤에 서 있던 나훈아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임 선생님, 지보다 더 노래를 잘 하시네예. 한번만 더 해주이소"라며 노래를 세 차례나 청하여 들었다. 세 번을 듣고 난 나훈아는 자신이 따라 해 보겠다며 노래를 불렀다. 나훈아는 그 자리에서 악보에 사인을 했다. 녹음하겠다는 뜻이었다.

1970년 3월 9일 나훈아가 노래를 녹음했다. 그다음 날 레코드사를 찾아가니 '차창에 어린 모습'이 타이틀곡으로 편집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동료작곡가와 사무실 직원들이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5월 초 막상 나훈아의 음반이 나왔을 때 '차창에 어린 모습'은 타이틀곡이 아닌 세 번째 곡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는 기성 작곡가들의 반발과 전속금 문제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레코드사의 조치였다. 이후 가사의 내용과 멜로디가 소위 정부가 주도하는 의식개혁운동에 맞지 않는 노래로 판정 나 방송 불가방침이 내려지며 '차창의 어린 모습'은 방송 한 번 못 나간 채 사라졌다.

임종수는 여전히 무명 작곡가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있던 1971년 12월 말,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들렀다가 나훈아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런데 나훈아가 느닷없는 제안을 해온다. 그는 "선생님,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아깝십니더. 어차피 방송도 안 되었으니 슬픈 가사를 띠고 건전하게 고쳐 주이소. 리듬도 트로트에서 고고로 바꿔 주시고예. 고고로 바꾸면 경쾌하게 들리지 않겠어예"라고 운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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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수의 앨범.

그런 나훈아의 제안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고향역'을 두고 임종수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임종수는 집으로 돌아와 노랫말을 놓고 여러 날을 고민했다. 불현듯 중학교 2학년 때 황등역에서 이리역까지 통학하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익산군 삼기면 형님 집에서 산길을 넘어 황등역으로 가 통학 열차를 타야 하는데, 형수가 해주는 밥을 먹고 이십 리 산길을 넘어 열차 시간에 맞춰 가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아침밥을 굶고 뛰다시피 하여 겨우 열차에 타면, 발판에 걸터앉아 이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몰아쉬곤 했다. 그때 기찻길 옆에 핀 코스모스를 보면서 고향의 어머니가 생각나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서글펐다. 그런 모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면서 제목을 '고향역'으로 정하자 가사는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1972년 2월 8일, 나훈아는 새롭게 선보인 '고향역'을 녹음했는데 이번에도 타이틀곡이 아니었다. '고향역'은 또다시 주목받지 못했다. 실의에 빠져있던 임종수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나훈아가 오아시스에서 지구레코드사로 전속사를 옮기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나훈아를 데리고 온 지구레코드사가 '녹 슬은 기찻길'을 발매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오아시스레코드사는 맞불을 놓기 위해 방송국 PD들에게 나훈아의 앨범에서 타이틀곡을 제외한, 알려지지 않은 곡 중 베스트10을 골라달라는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때 베스트10에 올라간 곡 중에 '고향역'이 1위를 차지했다. 오아시스레코드사는 '고향역'을 타이틀곡으로 새 음반을 출시했고, 전국은 온통 나훈아의 '고향역'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대거 도시에 몰리면서 객지 생활로 지치고 힘들어할 때, 추석이 다가오면서 '고향역'은 그리움과 향수를 대변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전북 익산시의 코레일 익산역에서는 매시 정각과 30분에 가수 나훈아의 '고향역'을 방송하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고향역'의 배경이 익산역임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이곳이 바로 고향역의 무대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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