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국을 방문하는 친한 독일인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경주의 골굴사에 선무도를 배우러 왔었는데, 한국의 음식에 적응하느라 고생하던 과거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는 한국음식도 잘 먹는 지한파가 되어 독일 현지에서 선무도 수련도장을 개설해 한국의 문화와 사상, 불교무술 그리고 음식까지 성실하게 소개하는 민간외교관을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016년 여름에는 독일 고등학생인 수제자를 한국에 데려와 함께 경남 밀양과 하동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 수제자의 이름은 Oliver인데, 자기는 한국의 면 요리가 가장 맛있고 기억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Oliver가 맛있었다고 하는 면 요리는 바로 비행기 기내에서 먹은 한국식품 회사의 컵라면이었습니다. 자극적인 인스턴트 식품을 처음 접하고 선호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젊은 학생들의 공통적인 모습인 듯합니다.

저는 틈이 날 때마다 Oliver에게 한국의 마트를 구경시켜 줬습니다. 비행기에서 한 종류의 컵라면만 봤다가 많은 종류의 컵라면, 동일한 회사의 다양한 봉지라면을 보고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더불어 한국식 중화요리인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기스면과 한국의 여러 종류의 면 요리와 수타면을 대접해 줬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컵라면과 봉지라면에 대한 선호가 점점 사라지고, 화학조미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수타면으로 입맛이 기우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만약 Oliver가 인생에서 컵라면만 경험했더라면 자신의 기억에는 한국의 면 요리는 비행기 기내에서 만난 컵라면이 전부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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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생두를 구입해 매일매일 벌레 먹은 커피콩을 가려내고, 이 콩들을 로스팅해 그 결과물을 손으로 분쇄하는. 그걸 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먹는. 커피를 너무나 좋아하고 애용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 독일 학생의 경험의 확장과 생각의 변화가 한국의 커피시장의 상황과 변화, 그리고 커피를 소비하는 소비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 한국 전쟁 당시 미군들이 즐겨 먹던 인스턴트커피가 소개되었고, 이 인스턴트커피에 설탕과 프리마를 섞어 마시던 한국식 다방커피가 한국 커피시장의 활성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한 봉지에 넣어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마실 수 있는 커피믹스가 등장하면서 커피시장은 급속도로 팽창하게 됩니다.

순발력 있는 독자 분들이시라면 상기의 커피믹스와 컵라면이 유사하다는 걸 간파할 수 있을 겁니다. 컵라면과 커피믹스 모두 뜨거운 물만 부으면 라면과 커피의 형태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빠르고 편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후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브랜드 인지도를 가진 커피체인의 한국 진출은 한국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바탕으로 한 진한 에스프레소 그리고 아메리카노와 여러 변형 커피를 알리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상기 체인의 커피머신의 다양한 변형커피는 봉지라면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에스프레소와 여기에 물을 첨가한 아메리카노는 사실 그렇게 고급스러운 커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경험한 유럽은 노동자의 권익과 인권은 상승하게 되었고, 임금과 처우 등, 다양한 복지 분야에서 여러 요구들이 분출하게 됩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도 상류층과 마찬가지로 식사 후에 최소한의 커피를 마시고자 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고용하던 대량생산 체계하의 초기 기계화된 공장에서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커피를 추출하고 소량으로 커피를 마셨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커피머신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스프레소(Espresso)의 의미는 빠르다(Express)는 의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에게 최대한 빨리 커피 한 잔을 추출해서 제공하는 커피머신의 발명과 유통은 시대의 필연적인 산물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 한국의 커피믹스가 존재하였다면 커피머신은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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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왜 한국의 많은 카페에서는 편하고 빠르기는 하지만 고급스럽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한 커피머신을 바탕으로 한 에스프레소와 여기에 뜨거운 물을 첨가한 아메리카노, 그리고 우유나 크림을 첨가한 변형 커피인 카페모카, 카페라떼, 카푸치노 등을 주메뉴로 팔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편의성에 있다고 봅니다. 카페 주인의 입장에서는 커피머신을 이용하면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기에 용이하고 여기에 뜨거운 물만 첨가하면 아메리카노가 되니까요.

봉지라면이 컵라면보다 손이 더 가고 더 나은 맛을 제공하지만 인스턴트 음식이라는 한계는 명확합니다. 봉지라면에 계란이나 파를 첨가하고, 면을 끓이는 시간과 물의 양에 변화를 주더라도 인스턴트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처럼, 커피머신을 바탕으로 한 에스프레소, 여기에 뜨거운 물을 첨가한 아메리카노와 여러 변형 커피들도 커피머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문에 손으로 직접 콩을 가리고, 직접 로스팅을 하고, 손을 이용한 수동 도구로 커피를 분쇄해서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는 드립커피는 수타면과 닮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우리 밀을 직접 반죽해서 면을 뽑고, 바탕이 되는 국물을 화학조미료를 배제하고 천연재료만 사용하는 수타면의 가치는 컵라면과 봉지라면보다는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과정을 수제로 처리해 커피 본연의 맛을 구현하는 드립커피의 가치도 인스턴트 커피믹스와 기계를 사용하는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보다 높아야 할 것입니다.

필자에게 지인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편하게 기계를 이용하면 되지, 왜 모든 과정을 손을 이용해서 힘들게 추출해서 마시냐는 겁니다. 편의성을 따진다면 기계가 나을 것이나, 사람이 힘들게 무언가를 행하는 것에는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더불어 행위를 하는 이가 선한 마음과 올곧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비록 한 잔의 커피지만 그 속에는 그 사람의 철학과 인생역정 그리고 긍정의 기운과 에너지가 담기게 됩니다.

제대로 된 커피는 보약과도 같습니다. 이왕 마시는 커피라면 보약 같은 좋은 커피를 바르게 마셔야 합니다. 필자는 드립커피가 좋은 커피에 가장 부합하는 커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드립커피는 좋은 커피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이제 저와 같이 드립커피의 충분조건을 찾아서 천천히 다양한 커피의 영역을 다루어 보는 커피 여행을 떠나 보는 것이 어떨까요? 우리 다 같이 되새기고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드립커피처럼 사람의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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