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 이모보다 멋진 은반 위의 별 될래요"

우리는 아직 기억한다. 새하얀 빙판 위를 미끄러져 내달리던 그를. 그 위에서 힘껏 뛰어올랐다가 우아하게 착지하던 모습을. 음악과 하나 돼 세상을 감동시키던 연기를. 마침내 올림픽 시상대에 오른 그의 목에서 빛나던 금메달을. 태극기를 바라보는 그 얼굴에 흐르던 눈물을. 김연아 선수가 보여준 건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피겨스케이트 환경이 얼마나 척박한지 그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 많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김연아'라는 이름은 후배들에게 그 자체로 희망이 되었다. 아홉 살 소녀, 정소담 양도 '포스트 김연아'의 꿈을 빙판 위에 그리고 있다.

여섯 살 스케이트와 첫 만남, 각종 대회 수상 잇따라

지난해 대한빙상연맹 선수 등록도

"양산 신주초등학교 2학년 정소담입니다."

창원 의창스포츠센터 아이스링크에서 훈련 직전 만난 소담이. 들릴 듯 말 듯 여린 목소리도, 책을 읽는 듯 자기소개를 하는 말투도, 웃을 듯 말 듯 한 수줍은 표정도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하지만 스케이트 이야기를 하는 소담이는 야무졌다.

소담이는 여섯 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이 열린 해다.

이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는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했다. 하지만 홈경기 이점을 쥔 러시아 선수에게 내주고 은메달을 땄다. 아쉬웠지만 김연아 선수는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처음 소담이의 눈길을 끈 건 김연아 선수가 아니었다. 소담이의 어머니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이상화 선수의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가 TV에서 중계되고 있었어요. 그걸 본 소담이가 물었어요. '엄마, 저게 뭐야' 하고. 스케이트라는 걸 소담이가 그때 처음 본 거예요. 그리고 그날부터 스케이트를 타보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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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담 양산 신주초등학교 학생. / 박일호 기자

처음에는 말렸다. 그러다 몇 달 뒤 어머니는 결국 부산 북구에 있는 아이스링크에 소담이를 데리고 갔다. 스케이트를 타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해봐야 타고 싶다는 말을 더는 안 하겠구나 싶어서. 그런데 그날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고 얼음 위에 선 소담이는 곧 아빠 손을 놓고 혼자 미끄러져 나아갔다.

이후 소담이는 본격적으로 피겨스케이트를 배웠다. 여럿이서 배우는 단체수업을 하다가 전문 코치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소담이는 의욕이 넘쳤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연습시간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랑 좀 더 놀면 안 되냐고 엄마한테 말한 적이 없단다. 소담이에게 스케이트를 타면서 힘들었을 때가 있냐고 물으니 "처음에 단체수업을 받을 때 선생님이 저를 많이 안 봐주셔서 속상했어요"라고 했다.

실력은 쑥쑥 늘었다. 2015년 7월 경남 최연소 초급 승급 후 그해 부산시장배 빙상경기대회 등 여러 대회에서 잇따라 1등을 하고 12월에는 경남 최연소로 1급 승급을 했다. 지난해 5월에는 대한빙상연맹 정식 선수로 등록됐다. 역시 경남 최연소 기록이다. 이후에도 부산시장배·부산 북구청장배 대회에서 1위를 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적을 내고 있다.

빙상장 옮겨 다니는 훈련 중에도 학교 수업 성실히

의지도 목표도 당찬 아홉 살 소녀

소담이는 학교 수업을 빠지지 않으면서도 많게는 하루 다섯 시간 정도 훈련을 한다. 빙상장 대관 일정에 따라 일주일에 하루 정도 쉰다. 그런데 빙상장 대관이 쉽지 않다. 아직 국내에는 피겨스케이트 전용링크가 마련되지 않았다. 지역에는 빙상장 수도 적고 그나마 연습할 수 있는 빙상장은 부산·창원에 있어 소담이는 먼 길을 옮겨 다니며 훈련을 한다. 집과 학교가 있는 양산에서 조금 가까운 김해 아이스링크는 지난해 시작한 보수공사가 길어지고 있다.

"경남에서 피겨스케이트를 하는 선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전문코치도 드물고 훈련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아이들은 대부분 수도권으로 떠나요."

코치선생님과 함께 연습을 시작한 소담이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지만 소담이가 원한다면 계속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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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담 양산 신주초등학교 학생. / 박일호 기자

소담이 목표는 김연아를 뛰어넘는 것이다.

"연아 이모보다 더 멋진 선수가 되고 싶어요. 올림픽에도 나갈 거예요. 메달도 따면 더 좋겠어요."

당찬 소담이지만 눈앞의 과제는 점프다.

"연아 이모는 점프 비거리도 좋고 높이가 많이 올라가고 스핀도 깔끔하고 속도도 빠르고 회전도 잘 되고 해서 멋있어요. 저는 스텝은 가장 자신 있는데 점프는 좀 자신 없어요." 말은 이렇게 해도 연습 중인 소담이가 보여주는 점프는 꽤 매끄럽다. 어머니는 "여러 점프 중에서 소담이가 최근에 한 단계 더 나아간 점프를 시도하고 있거든요. 그게 잘 안되니까 속상한가 봐요"라고 한다.

"엄마가 계속 계속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올림픽에 나갈 때까지도요." 스케이트를 말할 때는 눈빛을 반짝이며 당차게 말하지만 아직 엄마 품이 좋은 소담이다. 그러면서도 얼음 위에서는 야무진 표정을 하고 올림픽에 나간 선수들 못지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연습에 열중한다. 가느다란 팔에서, 다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지금은 작게 빛나는 별, 그 뒤로 머지않아 세계의 별이 된 소담이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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