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준 게 아니라, 그저 갇혀 있기 싫어서 사람들 만난 것일 뿐"

19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후원자이자 전국 납세 순위 2위까지 갔던 거부, 하지만 유신독재가 시작되자 미련 없이 모든 사업체를 다 나눠주고 신용불량자로 살아가는 풍운아 채현국 어른. 전국 최연소 한약종상으로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며 번 돈을 지역의 학생·학교·뜻있는 단체를 수없이 후원했던 김장하 선생. 이분들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의 행적을 쉬쉬하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가 극히 적었다. 이런 사람이 마산·창원에도 있다. 마산 양덕동에 위치한 '박영민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박영민 마산YMCA 이사장이다.

본의 아니게 해방구 만든 치과대생

박영민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주위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이뤄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인터뷰 중에도 '임 기자 민망하다. 지금이라도 안 하면 안 되나'면서 기자를 아찔하게 했다.

박영민 이사장은 1960년생으로 고향은 함안이었지만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를 여러 곳에 옮겨 다녔고, 진해중학교와 마산고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그는 여느 아이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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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민 마산YMCA 이사장. / 박일호 기자

"함안에 있을 때 지금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 중인 말이산 고분군에 올라가서 많이 놀고 했습니다. 저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형님들하고 많이 놀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공부 안 하고 싸돌아다닌다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1979년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에 진학했다. 왜 부산대학교 치과대학일까?

"사실 저희 집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 교사의 급여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사립대와 국립대 등록금 차이가 제법 있었습니다. 돈이 없으니 국립을 가야 하는데 서울대 못 가면 당연히 부산대 가는 걸로 생각했고, 치과대학이 돈이 적게 들고 또 앞으로 유망하지 않을까 싶어서 갔습니다."

Q. 그런데 1979년이면 부마항쟁이 있던 해 아닙니까?

"그러게요. 고등학교 때까지 유신헌법을 배우고 박정희가 최고 잘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학생운동에 휩쓸린 겁니다.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어쨌든 신입생 시절부터 독재 타도 데모에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촌놈이니까 더 열심히 뛰어다닌 것 같습니다. 부산대학교 교문을 나서면 온천장 일대에서 경찰과 붙고 똥물 하천으로 도망가고, 집에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다시 데모하러 나오고 그랬습니다. 그러다 10월에 부마항쟁이 터지면서 휴교령이 내려져 마산 집에 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집 옆에 있던 회원1동 파출소가 불에 타 있었습니다."

Q. 부마항쟁 당시 상인들이 숨겨주고 학생들에게 호응해줬다고 하던데 사실인지요?

"네, 정말 그랬습니다. 상인들이 숨겨주고 박수쳐주고 할 뿐만 아니라 데모하면 빵이나 우유 같은 건 상인들이 다 알아서 챙겨줬습니다. 그래서 데모할 때 먹는 건 걱정 안 했습니다. 1980년 대학 2학년 때도 휴교령 때문에 학교를 반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운동권 학생처럼 보이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저는 운동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약간 운동권과 친해졌습니다. 제가 1981년에 치과대 학생회장을 했습니다. 학생회 차원에서 마당극을 해보고 싶었는데, 마당극을 하려면 풍물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우리 부산대뿐 아니라 동아대, 부산여대 풍물 동아리에서 지원을 해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다른 학교나 다른 단과대학에서는 행사를 못 열게 했습니다. 연극을 한다고 해도 학교에 있는 경찰이 대본을 검열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치대 학생회에서 하는 건 승인이 났습니다. 그래서 부산대학병원 잔디밭에서 마당극을 하는데 다른 대학 학생들이 연극을 본다는 구실로 와서는 사실상 잔디밭을 해방구로 하고 데모를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는데 교수님과 주위 사람들이 도와줘서 풀려나왔습니다."

Q. 대학 때 또 생각나시는 일이 없으십니까?

"김두관 도지사 때 정무부지사를 했던 강병기 부지사가 당시 부산대 공대에 있었습니다. 연극 연습하면서 같이 만났는데 연습할 때 일도 도와주고 인연을 맺었습니다. 나중에 출마하실 때 제가 조금 지원도 해주고, 부지사 하실 때 치과치료도 해 드리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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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민 마산YMCA 이사장. / 박일호 기자

"돈을 써야 돈이 들어온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마산에서 '박영민 치과'를 개업했다. 개업 이후 그는 말 그대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단체에 지원을 해줬다. 지금까지 기자가 파악한 것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문화예술 단체로는 놀이패 베꾸마당, 우리놀이 문지방, 소리바디, 마산오광대보존회, 선유풍물연구소, 문화동아리 문지방, 마당굿패 새물, 아이네 플루트 앙상블이 있다. 이중수 마산오광대보존회장에 따르면 "이 말고도 수많은 신생단체와 예술인들이 지원을 받았고, 전통예술 말고도 서양음악이나 이런 쪽으로 지원해 주신 곳도 많을 것이다"고 했다. 이어 시민사회단체로는 마산YMCA, 마창진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마산점, 경남이주민센터 등이 있다. 초창기에 목돈이 필요할 때 큰 지원을 했음은 물론이고, 그 후에도 수십 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단체 내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발 벗고 나서 중재를 서는 등 든든한 버팀목으로 역할을 했다.

Q. 왜 마산에서 개원을 하셨습니까? 부산이 대학 때 아는 분도 많고 돈이 더 될 것 같은데요.

"고향에 오고 싶었습니다. 또 마산에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Q. 풍물패 같은 전통예술단체에 많이 지원하셨는데 이유는 뭔가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면 늘 풍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풍물이나 전통문화 하시는 분들과 넓게 인맥이 형성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같습니다. 1988년 개원한 후 마산 서성동 당시 YMCA회관에 풍물을 배우러 갔습니다. 저는 장구를 배웠는데 지금도 사실 잘 못 칩니다. 그때 경남대 민소리 연구회라고 신성욱, 이중수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저에게 풍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모인 분들이 베꾸마당이라고 놀이패를 결성했습니다. 베꾸마당은 사투리로 시골에 보면 '앞마당'이라는 뜻입니다. 베꾸마당에서 시작해서 이분들이 나중에 각 지역에 전통예술단체를 곳곳에 세웠습니다."

Q. 문화행사를 후원하다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했었다고요?

"민소리 연구회에서 행사를 할 때 제가 팜플렛에 내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팜플렛에 후원자로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그걸 보고 안기부에 끌려갔었습니다. 저 말고도 마산고 선배이신 한의사가 같이 잡혀 왔습니다. 다행히 안기부 담당자도 마산고 선배라서 풀려났습니다.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은 멈출 줄 몰랐다.

"문화예술인이나 사회운동하는 친구들 보면 참 형편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같이 다니고 했습니다. 특히 1988년 이후 노동조합이 한창 결성될 땐데 풍물을 가르치러 많이 다녔습니다. 당시엔 노동조합 초창기라 자체적인 풍물패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풍물을 가르치러 가면 항상 저를 '노동자의 동지'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는 겁니다. 그게 참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서 저는 나중에 노조 하는 데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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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YMCA 이사장으로 취임되는 박영민 이사장의 모습. / 마산YMCA제공

Q. 이런 활동을 하고 계신 걸 가족, 특히 아버지께서 보수적인 분 같으신데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제가 말을 하진 않지만 모르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느 집안이나 부자간에 생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크게 다투거나 그러진 않았습니다."

Q. 제가 듣기로 '돈을 써야 돈이 들어온다'는 말씀을 하신다던데 이게 무슨 뜻인가요?

"무슨 대단한 철학이 아니라 제가 묘한 징크스가 있습니다. 어떤 단체에 목돈을 내면 제가 투자하고 있는 곳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겁니다. 제가 치과로만 돈을 벌지는 않습니다(웃음)."

Q. 대표적인 직함이 현재 마산YMCA 이사장이십니다. 어떻게 마산YMCA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1997년에 마산YMCA 윤경태 사무총장과 알게 되면서 인연이 됐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오며가며 얼굴은 알았지만 하루는 윤 총장과 술을 마시면서 속 깊은 얘기를 하는데 정말 저와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는 게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산YMCA에 이사로 들어가서 활동하려 하는데 위원회를 골라야 합니다. 시민사업위원회는 지역사회에 민감한 이슈도 다루기 때문에 언론에 노출이 될 가능성이 커서 청소년사업위원회를 선택해 위원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Q. 또 대표적인 직함이 창원시치과의사회장, 경남치과의사회장이 있습니다. 이런 건 어떻게 맡게 되셨는지요?

"그거야 제가 오래 활동했고, 지역에서 꾸준히 있었으니까 으레 하게 될 처지였습니다. 회장이 되면서 저는 생각한 게, 몇몇 치과 원장들이 일회성 봉사활동을 하고 신문에 광고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게 아니라 의사회 차원에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치과의사끼리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창원에 치과의사보다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버는 돈 해봐야 대기업 직원 수준에서 조금 더 버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치과의사들이 사회봉사를 하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소년소녀 가장 무료 치료도 하고, 이주민노동자 덴탈클리닉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름다운 가게에 낼 기증품을 내라고 하니 안 내더라고요. 그래서 이사 한 명을 시켜서 1톤 트럭을 가지고 회원들 집에 찾아가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최근 창원경상대병원 안에 장애인치과치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은 일반 치과에서는 진료를 못 합니다. 마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데 진주의료원에 있었습니다. 진주의료원이 폐업된 후 그 장비들이 개인병원에 있었는데 이를 회수해서 창원경상대병원에 넣은 겁니다. 이런 식으로 지역에 기여하는 '치과의사상'을 만들려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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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최초의 청소년 전용 공간 ‘마산청소년문화의집’. / 마산YMCA 제공

Q. 개인적으로 후원하시는 곳을 제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다소 진보적인 성향의 단체가 많아 보이는데, 다른 의사들이 '왜 그런 곳에 후원하냐'는 지적 같은 건 없었습니까?

"글쎄요. 그런 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특별히 운동권도 아니고(웃음). 의사 사회도 사회와 똑같습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진보적인 사람도 있고."

Q. 지금 마산YMCA 이사장도 하고 계시고, 한국YMCA 경남협의회장도 하고 계신데 어떻게 되신 겁니까?

"치과의사회와 비슷합니다. 제가 20년 넘게 이사로 활동하다 보니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마침 우리 마산YMCA가 또 순번이 돌아서 경남협의회장을 할 때가 된 것입니다."

Q. YMCA는 어쨌든 기독교 바탕에서 생긴 사회단체인데, 혹시 종교가 기독교이십니까?

"저는 모든 종교와 두루 친합니다. 그래도 주기도문 정도는 욀 줄 압니다. 처음에는 교회분들이 이사장을 하셨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 앞에 앞에 이사장 때부터 비기독교인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소년들도 교육감, 도지사 선거 투표해야"

Q. 국가공인 청소년지도사 자격증도 있으시고, 관련해서 활동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격증을 완전히 딴 건 아니고 수료는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전문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자격증은 못 받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2002년에 마산YMCA 청소년사업위원 12명이 모두 결의해서 모두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을 따기로 한 겁니다. 다 직업이 다른데 매주 2~3번 모여서 몇 달에 걸쳐 공부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전원이 합격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지금보다 시험이 조금 쉬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Q. 마산YMCA 청소년사업으로 어떤 것을 하셨습니까?

"일단 시설 자체가 부족했습니다. 특히 마산지역에요. 제가 청소년사업위원 맡을 당시만 하더라도 청소년수련관이니, 청소년문화의집이니 이런 청소년 전용 시설은 마산에 한 곳도 없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모여서 같이 취미를 하거나 배우거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공간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마산YMCA에서 실태 조사를 해서 발표하고 시장님도 만나고 공무원들 설득해서 올림픽기념관 3층에 마산 최초로 청소년 전용 공간인 '마산청소년문화의집'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춤추는 친구들, 노래하는 친구들, 영상에 관심 있는 친구들, 만화를 그리고 싶어하는 친구들,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이 공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정부가 시행하는 활동평가에서 전국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후 마산지역에도 청소년 시설이 하나둘 늘어나 다행이라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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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민 마산YMCA 이사장. / 임종금 기자

Q. 요즘 관심을 두고 계신 청소년 사업이 있습니까?

"이번 대통령 선거 때 우리 마산YMCA뿐 아니라 한국YMCA에서 18세 참정권 운동을 하고 청소년이 직접 뽑는 대통령 모의투표도 진행했습니다. 특히 청소년 모의투표는 민주주의 강의로는 해낼 수 없는 참여민주주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실 청소년을 어른은 무슨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주체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18세 청소년 참정권 문제만 하더라도 이걸 불안해하거나 정략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내년 지방선거 때 청소년들이 직접 경남도지사와 교육감을 뽑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Q. 직접 지원도 하시지만 많은 사업의 경우 관공서의 지원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은데 어떻게 지원을 이끌어 내십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직접 시장과 공무원을 자주 만나고, 우리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오히려 저쪽에서 더 해주고 싶어 합니다."

Q. 혹시 정치나 이런 곳에서 오라고 하지는 않던가요?

"안 그래도 그런 오해를 받습니다. 한 번은 안홍준 의원 사무실에 갔는데, 거기 마침 도의원이 몇 명 있더라고요. 그런데 얼마나 견제를 하는지, 그게 느껴지잖아요. 그 뒤로 다시는 의원 사무실에 가지 않습니다. 상의할 일 있어도 보좌관을 밖으로 불러서 얘기해서 전하고. 저는 정말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좀 있으면 사회에서 은퇴할 나이입니다."

Q. 은퇴 얘기가 나와서 질문 올립니다만 지역에서 어떤 분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돈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산 사람으로…. 제가 하루 종일 병원에 갇혀 있잖아요. 낮에 햇볕도 못 보고. 그래서 밤에 많이 다녔을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는 데 신경을 썼는지도 모르죠. 지금 후배들 보면 자기랑 가족밖에 모릅니다. 치과의사회도 잘 안 오는데, 그러면 말 다 한 거죠. 사회활동을 거의 안 합니다. 자기만 최곤 줄 알고, 갇혀 사니까 착각하고 사는 거죠. 그 대신에 잃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갇혀 있다 보니 사람 만나는 폭도 좁아지고 세상 보는 것도 좁아지는데…. 이런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안타깝죠."

Q. 말이 나왔으니 저는 얼마 전 외국어고등학교 재학생이 쓴 글을 봤습니다. 요지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자기 친구들이 나중에 사회 엘리트가 될 건데 걱정이라는 글입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교육정책을 좀 바꾸자는 말이 많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저도 큰 애를 현대 청운고(자립형 사립고)를 보냈고 작은 애들은 일반고에 보냈는데. 물론 점수야 외고나 자사고 학생들이 더 나올 수 있겠죠. 워낙 공부를 시키니까, 기숙사에 3년 내내 가둬서 말입니다. 그래서 자사고나 외고를 폐지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합니다. 자사고나 외고 이런 데가 대단한 게 아니라 거기 잘하는 학생만 모아 놓으니까 명문대에 많이 가는 겁니다. 우리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산고 교육프로그램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마산고에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이니까 명문대를 많이 가는 겁니다. 저는 입시제도가 내신성적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그나마 기회가 다양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학부모들은 그냥 수능 성적 하나만으로 쭉 줄 세워서 대학 보내자고 하고, 그게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러면 일반고 학생들은 지금보다 더 못하게 될 겁니다. 그 생각을 못 하는 겁니다. 외고나 자사고 보내는 학부모도 보면 우리 애가 중학교에서 1등을 했으니 자사고 가서도 1등을 할 거라고 착각을 하고, 자사고 못 가면 실패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그는 세 자녀를 각각 의대, 한의대, 치과대학에 진학시켰다.

이번 인터뷰는 힘든 인터뷰였다. 원장실이라고 해봐야 두 평 남짓한 공간이라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지도 못하고 카메라 각도도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인터뷰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밥 먹으러 갑시다'며 나서는 바람에 많이 묻지도 못했다. 식사를 하면서 들은 얘기, 며칠 뒤 사진을 찍으면서 20~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겨우 몇 가지 물어볼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조합해 어렵사리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기사는 박영민 이사장의 스토리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기자가 알아낸 사실보다 모르는 사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많은 것을 알아내지는 못했으나 분명한 것은 훗날 '우리 시대의 어른'이라 불릴만한 분을 이렇게라도 찾아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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