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일기]5화 스펙 공화국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기보단 현실은 토익·자격증 따기
기업 '탈스펙'선언해도 구직자 불안감에 계속 포기못해

나는 스펙 사회를 극도로 싫어한다.

"어느 정도 쌓았어?"

귀에 박히도록 묻는 이런 질문에는 혐오감마저 든다. 직장을 구하고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준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많은 직종으로 가는 관문들치고는 뭔가 지나치게 단조롭지 않은가. 공인 영어성적과 공모전 수상, 기업체 인턴, 외국연수와 관련 자격증 등은 있으면 유리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일상을 포기하고서 매달리는 동아줄과 같이 느껴졌다.

살면서 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가 가장 궁금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내가 좋아할 만한 글을 찾아 읽고 마음을 가꿔줄 노래 목록을 만들며 하루빨리 능수능란해지고 싶은 영어가 가득 쏟아져 나오는 영화를 보는 일에 묻혀 살았다. 사회가 무엇인지 좀 더 분석적으로 알고 싶어 선택한 사회학도 대학전공이 어떤 점에서 재미를 주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스펙이라는 말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느 곳을 가든, 어떤 즐거움을 느끼든 내가 흥미를 느끼는 다른 무언가를 배우고 있던 시간에도 마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외면한다는 듯 마음 한편을 따라다니며 갈비뼈 사이를 콕콕 찌르는 가시가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숨 쉬는 만큼 하루가 가는 게 가장 무서웠다.

오늘도 취준생인 우리는 직접, 혹은 인터넷을 통해 서로 묻는다.

"어떤 걸 하셨고, 얼마나 쌓으셨나요?"

같은 집단에 속한 이들 사이에서도 살아온 삶을 묻는 것이 무척 실례일 수 있건만, 기업에서 인정하는 개인의 '성능'은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 묻는 이와 답하는 이조차 스펙은 그 자체로 스펙일 뿐 이상의 의미는 갖기 어려운 모양이다. 취업 절벽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차츰 숨이 답답해질 무렵, 나는 가장 존경하고 아끼는 사람들로부터 여태 준비 안 하고 뭐 했느냐 하는 질문 아닌 질문을 들었다. 내가 좋아하고 가장 잘하며 보람을 느끼는 일에 열중한 데에 관해선 '그런 거 말고, 스펙이 될 수 있는 거 말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현실을 모르고 꿈 타령만 하는 '구체적이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건 외롭고 화나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대학신문 기자로 사는데 미쳤었다. 대학 내내 기자 일을 열심히 했지만 스펙으로 따지면 결국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됐다. 자명한 위기였다. 아무리 보람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일이었어도 자기소개서를 통해 구구절절 풀어질 이야기도, 기사로 채워질 수십 장의 포트폴리오도 자격 점수 하나를 이길 힘은 없었다. 면접장에서 말할 수 있는 단 몇 마디가 수년간 경험해 온 내 경험을 대변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스펙 혐오감은 더 커졌다.

대학 졸업을 두 해쯤 남겨둔 시점부터는 무슨 일이라도 기회가 닿으면 무조건 하겠다고 결심했다. 혐오스럽기에 오히려 더 파고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따로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생활비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기업체 인턴,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내가 누군지 설명하는 데 진땀을 빼야 했던 공공기관 객원직원을 하기도 했다. 이래저래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바쁘게 일하며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친구들의 연락은 끊겼다. 엄마는 내가 '다른 세상에 갔다 온 줄 알았다'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스펙과 비슷한 걸 쌓긴 했지만 모인 돈은 없었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선명했다.

탈스펙(脫 spec), 스펙보다 각 직장에서 꼭 필요한 역량을 갖춘 인재를 뽑는 데 주력하는 채용 방식.

"이제는 스펙이 아닌,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

인사담당자들의 이 말이 또 다른 현실로 부딪힌다. 상당수 사람은 기업들이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해도 여전히 스펙을 쌓겠다고 말한다. 언제 또 바뀔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것 말고는 내가 성장하는 방법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잘 살고 싶어 일상을 내려놨던 이들에게 인제 와서 정신 차리라며 눈을 가리고 있다. 돌아보면 그 '구체적 스펙'이라는 것만큼 추상적이면서도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게 또 있었을까.

/시민기자 이지훈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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