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미술계에 아로새긴 20여 년 세월
동판·목판 소재로 '자연', '인간' 표현
메디치상 수상 영예, 내년 미국서 개인전
"의도치 않은 우연성 판화 예술 완성시켜"

초등학교 미술 시간 고무판을 조각칼로 파내던 기억이 있다. 구상해 놓은 밑그림 따라 씨름하다가 잉크를 들입다 묻혔던 게 어렴풋이 떠오른다. 흰 종이로 찍어낸 부위에 투박하고 강한 선이 새겨졌던 것도. 거칠고 날카로운 칼자국이 자아낸 형상이었다. 흑백의 선명한 대비 속에 붓이나 연필로 그린 그림과 다른 특유의 질감이 묻어났다. 순간, 한참 판을 파냈던 수고스러운 과정은 잊히고 쾌감과 보람이 슬쩍 밀려왔다.

"판화로 찍어낸 흑색은 깊이가 있어요. 화려하지 않지만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힘을 느낄 수 있죠."

어렸을 적 경험한 판화에 대한 단상을 꺼내자 정원식(57) 작가가 희미한 기억에 선명함을 싣는다. 창원 의창구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새기다 만 동판을 앞에 두고서. 그는 도내에서 20년 넘게 판화 작업을 해온, 몇 안 되는 작가로 손꼽힌다.

◇동판화 거쳐 목판화로

판화는 나무나 금속, 돌의 평면에 표현하고 싶은 대상을 새겨 잉크나 물감 등으로 찍어내는 예술매체다. 볼록판화, 오목판화, 평판화 등 제작 방법에 따라 종류가 나뉘고 표현하는 기법도 다양하다. 흔히들 어렸을 때 학교에서 해봤을 법한 고무판화는 볼록판화에 해당된다. 나타내고자 하는 형상을 따라 필요 없는 부분을 파내고 튀어나온 부분에 잉크를 묻혀 찍어 내는 작업이다. 반대로 오목판화는 새겨지고 파인 부분에 잉크를 채우고, 튀어나온 부분에 묻은 잉크는 닦아낸 다음 종이를 덮어 찍어내는 형태다. 동판화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정 작가의 초창기 작품에서 동판화를 주로 찾아볼 수 있다. 묵직할 것만 같은 그림은 흑백의 조화 속에 세밀함을 뽐내고 있다. 판을 무수히 긁어 홈을 새긴 후 그 틈에 잉크를 묻혀 내는 메조틴트 기법으로 정밀함을 완성했다.

정 작가가 자신의 작품인 '자연과 인간'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문정민 기자

섬세한 선들이 그려낸 사물은 현실감을 더했고, 결 따라 묻어 나온 명암은 형상을 더욱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정 작가 작품이 마치 연필, 목판 따위로 그린 소묘처럼 사실적인 묘사가 탁월해 보이는 이유다.

흰 종이를 물들인 검은색 여운은 서양화를 전공한 그를 판화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마치 심해의 빛을 길어 올린 듯 깊고 농밀한 흑색에 반한 것이다. 캔버스를 수놓았던 화려한 색채와 달리 흑백의 단순한 색감에서 되레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내구성이 강한 동판에 새겨진 형상은 정물처럼 절제됐다. 색도 표현도 회화의 그것보다 제한적이었지만 정 작가는 붓 대신 조각칼을 들었다.

그렇게 수년간 동판을 새기던 그가 꿈틀대기 시작한 건 목판화로 옮겨가기 시작한 2000년 초 즈음이다.

"한계에 점차 부딪혔어요. 정제된 표현에 답답함을 느꼈죠. 자유로움에 대한 갈증을 풀고 싶었어요."

정 작가는 동판에서 표현하기 힘들었던 기하학적인 형상을 목판에 새기며 전에 없던 추상미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흑백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색깔도 입혔다. 나타내고 싶은 색의 수만큼 목판을 파고, 찍고를 반복하는 소멸기법을 활용했다. 겹겹이 쌓여 중첩된 색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동판보다 비교적 덜 단단한 목판은 그동안 묶여있던 창의력을 펼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였다. 정 작가는 작업을 거듭할수록 생각을 더했다. 신문지나 벽지 등을 오려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적용해 작품 표면에 사포를 덧붙이기도 했다. 판화는 작가의 손짓에 질세라 독특한 효과를 발산했다.

정원식 작 '봄'. 나뭇가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을 형상화했다.

◇'자연과 인간'

그의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로 귀결된다. 자연이다.

'봄'이란 이름을 단 작품은 나뭇가지에 붕대를 감았다.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을 형상화했다. 봄에 피어나는 새싹처럼 새살이 돋아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았다.

'물의형태'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만물의 근원인 물의 형태를 파란색으로 나타냈다. 작품 속 토마토, 감, 레몬, 사과 등 과일은 하나같이 푸른 빛깔을 띤다. 과일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상한다. 바람과 태양으로 빚어진 가장 경이로운 산물을 뜻한다. 작가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푸른빛 물의 색으로 이를 표현했다.

정 작가의 작품 세계는 때론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을 예기치 않은 공간에 두어 표현하는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와 닮았다. 관습적이고 틀에 박힌 사고를 벗어난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자연과 인간을 함께 표현한 최근 작품에 활용되는 실제 나뭇잎들. /문정민 기자

자연과 인간을 함께 표현한 최근 작품에서 이러한 성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검은색으로 칠한 사람 모형의 종이를 판화 위에 올리고 그 위에 나뭇잎을 얹었다. 찍어낸 그림은 어두운 사람 이미지와 그 위에 새겨진 흰색 나뭇잎 실루엣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찍을 때마다 나뭇잎 위치와 모양이 미묘하게 다르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성이 판화의 예술을 완성시켜요. 단 한 장만 찍을 수 있는 모노타이프 기법은 희소성을 높이고 작품 가치를 더하죠."

평소 환경 보호에 관심이 많던 정 작가는 달걀판과 스티로품에 예술을 불어넣기도 했다. 소머리와 떡 문양을 찍어내는 도구로 조형화한 것. 그는 이와 같은 작업으로 2015년 제25회 동서미술상을 수상했다.

정 작가는 지난 17일 세 번의 도전 끝에 메디치상을 품에 안았다. 메디치회 후원으로 내년 5월 미국 뉴욕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국외 전시는 2006년 멕시코 할리스코주에서 진행된 이후 두 번째다. 당시에도 작가 교류차원 도립미술관 지원으로 개인 전시회를 열게 됐다고. 현지 반응이 좋아 할리스코주청사에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 흔들림 없는 열정으로 새긴 그의 작품을 뉴욕시청사에서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정 작가가 창원 의창구 자신의 작업실에서 조각칼로 동판화 작업을 하고 있다. /문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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