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마저 현대판 논개로 비춘 여성
여성 대거 포진 정부에 탁현민 왜 건재?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한광복회 인사와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나란히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진을 보았다. 광복회 소속 인물이라면 독립투사이면서도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혹독한 피해를 겪은, 살아있는 신화이기도 하다. 위안부 피해자 역시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피해자이므로 두 인물은 일제로부터의 수난이라는 공통의 속성을 공유하는 동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에게는 노구의 두 분이 함께 있는 장면이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몇 년 전 대한광복회가 시민단체에서 서울 서대문독립공원 안에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자 공식적으로 반발한 일이 떠올랐다. 어떻게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외면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광복회가 내세운 반대 이유는 순국선열의 혼이 서린 서대문독립공원에 위안부 관련 건물을 짓는 것은 선열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뭐라고 할 말을 찾기 어려울 만큼 기막힌 일이지만, 적어도 광복회 인사들의 인식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성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공동체에서 배척하는 것은 가부장 남성들의 전통적인 시각이니 대수롭지 않으며 낯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광복회의 성격상 아무리 보수적인 남성 노인들이 다수인 조직이라고 해도 일제에 인권을 처절히 유린당한 여성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행동은 자기모순임을 모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광복회가 일제가 식민지 여성들에게 천인공노할 성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감추고 싶어하는 조직임을 스스로 감수한 것은, 독립투사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으니 광복회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더는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을까.

최근 개봉한 영화 <군함도>와 원작소설도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다. 소설에서, 지하 갱도에서 채탄하는 일에 강제징용을 당한 조선인들이 지옥 같은 섬을 탈출하는 데는 섬에서 일본인 상대로 유곽 생활을 하는 조선 여성의 도움이 절대적인 것으로 나온다. 일본인 감시인을 유혹하여 경계를 느슨하게 하여 조선인들의 탈출을 돕고 그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현대판 논개 같은 이 여성의 활약을 보니 실소를 참기 어려웠다. 조선인 남성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정도로 그 여성의 생명은 하찮은 것으로 다루어져도 좋은지 의문이다. 하필 그 여성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가장 천대받는 처지의 여성일 것은 무엇인가. 실제 군함도에서 일어났을 리 없는 이 여성 희생의 서사는 일제-식민지 조선 남성-조선 여성-조선 하층 계급 여성이라는 중층의 여성억압을 잘 말해준다. 식민지 조선 여성, 특히 하층 여성은 일제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 남성의 식민지이기도 했던 셈이다.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한가, 그렇지 않은가. 광복회 노인들과 <군함도> 작가의 덜떨어진 생각은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현실이 감안된 것일 뿐이기를 바란다. 국권을 잃었던 암담했던 시대에는 약자의 인권이 평상시보다 더 열악했을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을 수도 있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은 세상에 비유적으로라도 '식민지'라는 고색창연한 말을 쓰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기도 할 것이다. 여성 인권도 과거보다 매우 좋아진 세상에서 '식민지'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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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성이 국가보훈처장을 하고, 여성이 외교부 장관을 하고, 여성이 국토교통부 장관을 하고, 여성이 고용노동부 장관을 하고, 여성이 청와대 사회문화수석을 하고, 진보적인 여성 학자가 여성가족부 장관을 하는 나라에서, 탁현민은 왜 아직도 건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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