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18) 합천의 진산들
북산·금성산·단봉산 등 마을 굽어살핀 산세 '늠름'
봉화대·바위투성이·큰 굴 굽이굽이 옛이야기 가득
논덕·오도산 선비 정신 어려

황강(黃江)은 합천 중심을 남북으로 가르며 흐른다. 합천 산세(山勢)도 이 강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뉜다.

북쪽 산군(山群)에서는 국립공원인 가야산(伽倻山·1430m)이 으뜸 산이다. 공원 전체로 보면 경북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상인 상왕봉(우도봉, 1430m)은 주소가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1번지로 합천에 속한다. 가야산에서 뻗은 줄기가 금강산의 축소판이라는 매화산(梅花山·954m)과 고려시대 조선 건국을 반대한 이미숭 장군의 전설이 서린 미숭산(彌崇山·755m)을 거쳐 황강 북쪽에 여러 봉우리를 풀어놓았다.

황강 남쪽에서는 덕유산 줄기를 이어받은 황매산(黃梅山·1108m)을 우두머리로 친다. 이 산에서 높고 낮은 등성이가 동쪽으로 뻗어나가 초계분지 둘러싼 대암산, 단봉산 등을 낳고 남쪽으로 의령 자굴산으로 연결된다. 황매산은 산청 편에서 자세히 소개한 적이 있다. 원래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는데, 1983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져 지금은 가야산과 함께 합천을 대표하는 산이 됐다.

합천읍 뒤편으로 진산으로 추정되는 산이 펼쳐져 있다.

◇합천 진산 3곳

지금 합천군은 조선시대 합천·삼가·초계 세 고을을 1914년에 합친 것이다.

합천 고을은 현재 합천읍, 가야면, 야로면, 묘산면, 봉산면, 용주면, 대양면 일대였다. 고을의 중심인 읍치(邑治)는 합천읍 합천리에 있었다. 지금 군청이 있는 곳 주변이다. 조선시대 합천 고을 진산은 북산(北山)이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읍주산(邑主山)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북산이란 이름은 쓰지 않는다. 당연히 지도에도 없다. 옛 지도에 나오는 대략적인 위치와 합천읍 영창리에 있다고 한 기록으로 봐서 영창 주공아파트 뒤편으로 200m 남짓한 백학산 언저리인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삼가 고을은 삼가면, 쌍백면, 가회면, 대병면, 봉산면과 거창군 신원면 일대를 포함한다. 읍치는 현재 삼가면사무소가 있는 금리 주변에 있었다. 삼가 고을은 조선 태종 때 삼기·가수 두 고을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원래 읍치는 현 대병면 합천호 근처였는데, 삼가 고을로 합쳐지며 금리로 옮겼다. 삼가 고을 진산은 기록상으로는 대병면에 있는 금성산(金城山)이다. 지맥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주봉이 읍치가 있는 금리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 실제 진산 노릇은 읍치 북쪽 150~200m 등성이 중 하나가 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계 고을은 지금 초계면, 적중면, 청덕면, 쌍책면, 덕곡면, 율곡면 일대였다. 동서로 6㎞, 남북으로 3㎞에 이르는 초계분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되겠다. 읍치는 현재 초계면사무소가 있는 곳 주변이었다. 초계 고을 진산은 단봉산(丹鳳山·201m)이다. 초계면사무소와 초계초등학교 뒤편으로 향교를 품은 산이다. 단봉산이란 이름은 지금도 그대로 쓴다. 요즘에는 운동기구들이 설치돼 있어, 주민이 아침저녁으로 운동 삼아 자주 오르는 산이다.

초계 고을과 진산인 단봉산.

초계 고을은 예로부터 사산팔수(四山八水)로 묘사됐다. 이는 조선 세종에서 성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이 초계분지를 둘러싼 산세를 보고 '사산(四山)이 위군거(圍郡去)하고 팔수(八水)가 포촌류(抱村流) 한다'고 읊은 데서 유래했다. 대암산, 태백산, 국사봉, 미타산 등이 고을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고, 이들 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 여덟 갈래가 고을을 휘돌아 나간다는 뜻이다. 초계분지 주변 높은 산등성이 능선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져 있는데, 의령편에서 간단하게 소개를 했었다.

◇대병 삼산

합천군 대병면 회향관광단지 주변에서 합천호 건너 동쪽을 바라보면 준엄하게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마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다. 차례대로 왼쪽이 악견산(岳堅山·620m), 오른쪽이 금성산(金城山·592m), 금성산 너머가 허굴산(墟堀山·682m)이다. 세 산이 우뚝하니 대병면 장단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들을 '대병 삼산(三山)'이라 부른다.

금성산은 황매산에서 바로 이어져 솟았다. 고려시대부터 봉화대(烽火臺)가 있었기에 봉화산(烽火山)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남은 봉화대는 경남도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됐다. 금성산 서쪽은 수백 척 암벽이다. 중간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금반현화(錦盤懸花·비단 쟁반에 꽃을 달았다)로 불린다.

▲ 합천호에서 바라 본 악견산(왼쪽)과 금성산. 그 뒤편 허굴산.

악견산은 산 전체가 바위투성이다. 낭떠러지도 많다. 그래도 등성이에 올라서기만 하면 시원스레 합천호가 내려다보여 등산할 맛이 난다. 대단히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산 모양새가 웅장해 큰 산 악(岳) 자를 붙였다. 악견산은 의병활동과 관련이 깊다. 임진왜란 때 권양, 권해 형제를 포함해 박사겸, 박엽 등 선비들이 의병을 모아 이 산에 성을 쌓고 왜적과 싸웠다. 이때 쌓은 악견산성이 아직 남아있다.

동상 뒤편으로 우뚝 솟은 악견산.

의병과 관련한 전설도 전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악견산성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왜군이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옆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과 줄로 연결하고는 곽재우 의병장 같은 붉은 옷을 입은 허수아비를 매달았다. 의병이 달 밝은 밤에 줄을 당겨 마치 도력 높은 장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연출했다. 그러자 왜군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이야기다. 당시 왜군은 이 허수아비를 천강 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악견산이 마주 보이는 금성산 북쪽 합천호 근처에 임진왜란 때 의병을 기리는 임란창의기념관이 있다.

금성산 기슭 임란창의기념관에 있는 임진왜란 의병 동상.

허굴산 역시 경사 급한 봉우리가 많다. 산 중턱에 여름에 찬바람, 겨울에 더운 바람이 나오는 큰 굴이 있는데, 허굴이란 산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옛날 한 스님이 허굴산을 지나다가 산 중턱 굴 안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랑을 벗어젖히고 급히 올라가 보니 부처님은 없고 빈 굴만 있었다고 한다.

◇남명의 덕(德), 도선의 도(道)

조선의 큰선비 남명 조식(曺植·1501~1572년)은 삼가 고을(현재 합천군 삼가면 지역)에서 태어났다. 삼가 고을과는 거리가 있지만, 합천호 동쪽 지역에 남명과 관련한 산이 있다. 남명과 관련한 지명에는 대체로 덕(德) 자가 들어간다. 먼저 봉산면 계산리, 용주면 우곡리, 합천읍 인곡리에 걸친 논덕산(論德山·545m)은 산 이름을 남명이 지었다고 전한다. 이 산은 다르게 봉우리가 세 개란 뜻으로 삼봉산(三峰山)이라고도 한다. 봉산면 송림리에 있는 강덕산(講德山·563m) 역시 남명이 산세를 보고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묘산면 산제리, 봉산면 압곡리에 걸친 오도산(吾道山·1120m)은 합천 명산 중 하나다. 이 산은 신라 말 승려로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년)가 깨달음을 얻은 곳으로 전해진다. 원래 이름은 천촉산(天燭山)으로 '하늘의 촛불'이란 뜻이다. 까마귀머리처럼 산꼭대기가 검다 해서 오두산(烏頭山)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조선 전기 문신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일두 정여창(鄭汝昌)이 이 산이 마음에 들어 유도(儒道)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담아 오도산(吾道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의병 위패를 모신 창의사.

[참고문헌]

<합천군사>(합천군사편찬위원회, 2014)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국토지리정보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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