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지 7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부문에서 우리 안의 식민 청산은 과제로 남아 있다. 그중 정부가 손을 놓다시피 한 것 중 하나는 원자폭탄에 피해를 본 국민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이었다. 지금까지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는 법률조차 없었으며, 경남도와 합천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조례가 있을 뿐이다. 지난 5월 비로소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원폭피해자법)이 제정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 법이 원폭 피해자 2세를 아예 외면함에 따라, 만들자마자 개정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2013년 당시 생존 피폭 피해자는 2519명이며, 같은 해 경남도 실태조사에서 경남 거주 피해자는 1186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정부와 일본의 외면에다 사회적 냉대까지 더해져 배상은커녕 치료도 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오죽하면 피해자가 개인 자격으로 일본 정부에 소송을 제기해 후유증을 치료받는 길을 터야 했을까. 일본 정부가 1968년 원폭피해자 지원을 법률로 제정한 것에 비하면 우리 정부의 피해자 지원에는 반세기가 더 걸렸다. 법 제정이 이토록 늦은 데다 피해자 2세를 법 적용 대상에서 빠뜨린 것은 원폭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추정한 원폭 피해자 2세는 7500여 명이다. 이 조사에서 상당수가 병을 앓고 있음이 밝혀졌다. 2013년 경남도 실태조사에서는 2세뿐 아니라 3세도 질환에 시달리고 있음이 보고됐다. 원폭피해자 후손들에게 질환이 대물림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외면돼서는 안 된다.

식민 지배는 끝났지만 원폭 피해자와 후손들에게는 종료된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이다. 그럼에도 많은 한국인은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고자 미국의 원폭 투하가 불가피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폭 피해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원폭피해자법은 경남도 조례처럼 2·3세에게도 지원을 확대하는 쪽으로 개정돼야 하며, 정부가 원폭의 가해자인 일본과 궁극적 가해자인 미국에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의 한을 풀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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