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취적 분리파 종말엔 시민 부재가 원인
촛불정부 잡음 많아도 시민 있어 희망적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에 들렀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제체시온(Sezession)이었다. 1897년에 개관한 이 건축물은 서양 현대미술의 상징이자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체시온은 우리 말로 '분리파'로 해석된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던 새로운 예술 사조를 가리키는 용어인데, 같은 이름을 한 이 건물은 분리파만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된 곳이었다.

제체시온이 뜻하는 분리는 과거와의 단절을 가리킨다. 정확하게는 당시 대다수 미술가가 소속돼 있던 '빈 미술가연맹'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 연맹은 20세기를 앞둔 세계사적 전환에 눈감고 자기들의 기득권에 안주해 정부와 공공기관의 후원을 얻어내는 프로젝트에 주로 몰두하고 있었다 한다. 이에 반발해 젊은 예술가들이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바로 제체시온이 시작됐다.

그 선봉에 <키스>로 유명한 구스타프 클림트가 섰다. 이 운동의 초대 회장을 맡은 클림트는 연맹에 보내는 편지에 '해외 미술과의 지속적인 접촉', '순수한 목적의 미술전시 구성', 그리고 '공공단체들의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 촉구'로 요약되는 분리파의 예술 지향을 제시했다.

19세기 마지막을 향하던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는 런던 파리와 함께 유럽을 대표하는 도시 중의 하나였다. 문화예술 부문은 물론이고 대단한 석학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활기와 달리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전망하는 비엔나의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변화에 굼뜨고 문화적으로는 고루했다. 오죽했으면 분리파와 지향을 같이하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가 "세계가 종말을 맞게 될 때, 나는 비엔나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20년 늦게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자조했을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얻은 분리파의 성과는 그래서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분리파 활동에 정점을 보여준 그 전시에서 비엔나 시민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새로운 희망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면서 진정으로 제국의 미래를 걱정했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들 분리파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다. 황제는 노회한 기득권 사회를 돌파하기 위한 지렛대로 파격적이고 진취적인 예술가들을 활용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체시온의 수명은 그리 길진 않았다. 1902년에 인상적인 성과를 올린 지 불과 2년 만인 1904년 분리파 자체가 분열하고 만다. 정확하게 10년 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오스트리아 제국 또한 종말을 맞았다. 제체시온은 공동체의 소멸을 걱정하는 일종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성공회대의 정윤수 교수는 제체시온과 오스트리아의 실패를 설명하며 '시민의 부재'를 제일 큰 이유로 꼽았다. 영국과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유럽은 19세기 말 기득권의 상징인 왕족과 귀족을 시민이 혁명으로 없애거나 위축시켰으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중부 유럽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체시온처럼 일부 계몽된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변화를 외치며 사회적인 의제를 던져도 이 메시지를 받아줄 시민계급이 부실했기에 변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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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문재인 정부를 흔히들 '촛불 정부'라고 부른다. 문재인의 개인기가 아니라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낸 정권이라서 그렇다. 그러나 촛불 정부의 미래가 마냥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북핵 문제로 충돌하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부터 도시재생을 둘러싼 온갖 잡음에 이르기까지 이 정부 앞에 놓인 개혁 과제들을 나열해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다행인 점은 촛불 정부가 시민의 힘과 함께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 사실 때문에 촛불 정부의 미래는 제체시온보다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문재인 정부가 끝까지 시민 편에 선다는 전제 조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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