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한 책임] (4) 원자폭탄 피해자와 후손들
1세대 나병환자 취급받아 자녀들, 높은 질병 이환율 정신적 후유증도 시달려
의료지원 등 대책 전무해 "원폭피해자법 개정, 2세대 실태조사·지원 포함해야"

원자폭탄 피폭 대물림으로 원폭피해자 후손들이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5월 19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원폭피해자법)'이 통과됐고, 지난 5월에는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원폭피해자 지원위원회를 통해 실태조사를 비롯한 지원활동이 예고된다. 어렵사리 원폭피해자법이 통과됐지만 원폭 피해자 2세를 비롯한 후손에 대한 조항은 전혀 없다.

합천 평화의집에서 만난 강대현(69) 한국원폭2세환우회장은 "내 팔을 봐라. 피부병이 심하다. 우스갯소리로 군입대 때 피부를 계속 긁어서 벌겋게 만들어 면제를 받을까도 생각했었다. 내가 우리 가정의 가장이었으니까"라며 유전적 피해를 본 자신의 삶을 전했다.

강 회장의 부모는 모두 일본 히로시마로 강제노역을 갔다. 먹을 것이 없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밑에서 하인처럼 농사를 짓다 변을 당했다. 부모는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냉대를 받아오며 견뎌야 했다. 당시 원폭 피해자 1세대는 나병환자 취급을 받았다. 사람들과 교류조차 쉽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 후손도 사회생활에서 차별을 받았다.

강대현 한국원폭2세환우회장.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강 회장 역시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원폭 피해 후유증으로 생기는 질병은 더 고통스럽게 했다. 강 회장은 피부병을 앓고 있고 둘째 동생은 38살 젊은 나이에 암으로 숨졌다. 셋째 동생 역시 피부병을 앓는가 하면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다.

한국원폭2세환우회 자료를 보면 피해자 2세는 일반인보다 빈혈 88배, 심장계열 질환 89배, 우울증 71배, 백혈병 13배, 갑상선 질환 10배 등 높은 질병 이환율(일정한 기간 내 발생한 환자 수의 인구당 비율)을 나타냈다.

강 회장은 젊은 시절에 대해 "지옥보다 참혹한 세상을 살았다. 어릴 때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인 아버지의 부재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성인이 된 뒤에는 동생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잦았다"며 "지금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은 지옥보다 못한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지원 정책이 없다 보니 원폭 피해 후손을 찾아 피해자협회나 지부 가입을 권해도 냉대하는 말만 돌아온다. 치부를 드러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국내외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와 사흘 뒤 9일 나가사키에 투하돼 터진 원자폭탄 한국인 피폭자만 7만 명에 이른다. 폭사자는 4만 명, 생존자는 3만 명이고 이 중 귀국한 한국인은 2만 3000명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등록된 한국거주자는 2394명에 불과하다. 원자폭탄이 터진 지 72년이란 세월 속에 목숨을 거둔 피폭 피해자도 있지만 상당수는 가입을 꺼렸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원폭 피해자 2세들은 이 때문에 원폭피해자법 개정을 촉구한다. 원폭 피해자 1세대 역시 그들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법을 고쳐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강 회장은 "원폭 2세 등 후손들은 국가 차원의 의료지원이나 지원대책이 없어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과 피해 대물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부모가 피폭됐다는 이유 하나로 평생을 사회적 편견, 유전적 질환으로 병마 속에 살아가는 원폭 2세들 고통과 아픔은 어떻게 치유하냐"며 "정부와 국회는 원폭피해자 지원특별법을 개정해 후손들 실태조사를 하고 지원대책에 포함해줘야 한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살 수 있게 도와달라"며 호소했다.

원폭 피해자 후손들은 지원특별법 개정과 별개로 또 다른 싸움을 시작했다. 바로 원자폭탄을 쏜 미국과 소송이다. 원폭 피해자들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구지부' 도움을 받아 미국과 핵무기제조 기업 등으로부터 피해보상을 받기 위한 법적 투쟁을 시작했다.

원폭2세환우회 초대 회장을 맡았던 고 김형률 씨 부모와 원폭 피해자 2세인 한정순 씨와 아들 등 4명은 지난 3일 대구지법에 미국 정부 등을 상대로 원자폭탄 투하 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을 요구하는 조정신청을 했다. 피신청인에는 미국 정부 외에도 원자폭탄 제조·투하에 관련된 듀폰, 보잉, 록히드 마틴 등 3개사와 한국 정부도 포함됐다.

강 회장은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 원자폭탄 투하는 결국 미국이 결정하고 선택한 일이다. 아직 미국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곳은 없다"며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국가다. 당당하게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외롭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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