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밤은 별보다 빛났다
"시내 구경 해볼래?"호스트 제안에 첫 나들이
생각지 못한 밤 드라이브, 긴장 풀리며 오감 '활짝'

안녕하세요, 박채린(26)이라고 합니다. 우선 저에게 여행 글을 쓸 기회를 주셔서 무척 감사드려요. 저는 우연적인 여행을 추구하는 편이에요. 우연 그 자체를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우연인 줄 알았던 여행의 지점들이 나중에는 어떤 '필연적인 것'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감도 있고요. 앞으로 쓸 여행기의 절반 혹은 절반 이상은 러시아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해요. 가장 최근에 한 여행이기도 하고, 혼자서 떠난 여행이라 모든 경험들이 더욱 직접적으로 와닿았거든요. 11월 안으로 또 여행을 떠날 기회가 생기면 그 이야기도 담아보려고 합니다.

'정말 내가 혼자 가도 될까? 괜히 가는 건가?'

또, 또, 또! 나는 여행을 앞두고 걱정에 휩싸였다. 5월 초, 휴가를 다녀온 지인에게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치안이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얼른 5월 말 비행기 티켓을 구했었다. 황금연휴를 일하는 데 몽땅 써버리고 피로가 겹겹이 쌓인 상태였다. 그러나 한껏 들뜬 여행 하루 전, 또 다른 지인에게서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며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본인의 지인들이 겪은 일을 말해주는데, 그 순간부터 두려움이 여행의 설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5월 26일 금요일, 아침 수업이 없는 시간에 환전 신청을 해놓은 200달러를 받았다. 6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퇴근길에 올랐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무리해서 운전하는 편이 아닌데 이날은 괜히 차도 많이 막히고 마음이 급해서 속력을 더 냈다. 집에서 미리 싸놓은 캐리어를 냅다 챙기고 곧바로 김해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연인과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홀로 공항으로 들어섰다. 긴장감이 일었으나 발권 대기줄에 서 계신 아주머니들과 어르신들 무리를 보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경계심은 완전히 수그러들었다. 아시아인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밤늦게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함께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 별로 무서울 게 없었다. 오후 7시 25분에 떠나는 아에로플로트 항공 비행기다.

비행기 창 밖 풍경의 낭만을 누리려면, 이륙할 때 압력과 허공에서 안정적인 상태를 벗어날 때의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내 몸이 위치한 곳이 확실한 안정을 제공해주지 못할수록 창 밖 풍경은 거부할 수 없이 아름답다. 특히 해가 지는 하늘 위를 날고 있으면 황홀감을 거둘 수가 없다. 저 하늘의 에메랄드빛과 분홍빛이 만들어내는 그러데이션을 들이마실 수 있다면 그 어느 칵테일에서도 느낄 수 없는 '하늘을 날 듯한 취함'을 느껴볼 텐데.

독수리언덕에서 바라본 금각교.금각교가 박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밤 풍경은 사뭇 특별했다.

아에로플로트 항공은 러시아의 국적기라서 북한 위를 곧장 날아갈 수 있다. 그 베일에 감춰진 땅덩어리가 어떤 모습인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지만 극세사 같은 구름들이 야무지게도 틈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러시아 승무원들은 투박하면서도 친절했다. 그 투박함은 기내에서 제공해준 치킨샌드위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날 내 인생에서 가장 질긴 치킨샌드위치를 물어뜯었으니까.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생선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의외로 무척 맛있었다!)

비행기가 급강하할 때는 정말이지 간이 쪼여 들어서 없어져버릴 만큼 무서웠다. 고도를 낮추는 15분 동안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흔들리더니 어느 순간 창밖으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블라디보스토크구나. 출발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일본보다 가깝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한 시간의 시차가 발생해 이곳 시간으로는 9시 20분쯤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내가 당분간 지낼 집이 있는 티그로바야(Tigrovaya)로 향했다. 혹시나 안 좋은 일을 당할까봐 긴장을 잔뜩 했었다. 다행히 아내를 옆에 태운 택시기사는 끝없이 아내와 대화를 이어나갔고 손님인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니 호스트인 에브게니가 1층에 내려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다.

직사각형으로 길쭉하게 생긴 노란 방에 짐을 풀면서 바깥 풍경도 흘끔흘끔 보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낯선 건물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빨리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씻을 준비를 하던 찰나, 에브게니가 말을 걸어왔다.

박채린 씨.

"나 지금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나갈 건데, 너도 볼래? 아니면 시내 구경을 해볼래? 너 편한 대로 해."

엥? 완전 뜻밖의 제안이었다.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부글부글 끓었다. 영화는 보고 싶었던 것이라 솔깃했으나 러시아어로 더빙이 돼 있다는 말에 포기했다. 이대로 첫날의 밤을 마무리하는 건 또 그것대로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시내 구경을 가보자!"

이렇게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탐험이 펼쳐졌다. 생각지도 못한 밤 드라이브였다. 내가 카메라를 품에 안은 걸 보고 에브게니는 이 도시의 밤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장소, 독수리언덕으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에브게니는 우리가 지금 금각교(Golden Horn Bay Bridge) 위를 달리고 있다고 알려줬다. 이번 여행 중에 가장 보고 싶었던 그 다리를 벌써 보게 될 줄이야!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멈추는 순간,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불빛들이 아른거리고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낮에만 하더라도 교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밤에는 저 찬란한 금빛 다리를 보고 있다. 파리 시내의 높은 전망대에서도, 이탈리아 포지타노 언덕에 즐비한 집들의 불빛도 아름다웠지만 금각교가 박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밤 풍경은 사뭇 특별했다.

언덕에서 적당한 거리에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자유롭게 거리에 나눠어서 춤을 추든 노래를 부르든 각자의 밤을 즐겨도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는 모습들이 좋았다. 마침 주차장 아래에서는 젊은 음악가들이 술과 함께 황금을 노래하고 있었다. 아주 차가울 줄 알았던 블라디보스토크의 밤바람도 약간 쌀쌀한 정도였다. 잠시 말을 잊고서 이 모든 광경에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감각들을 열어놓았다. /글·사진 시민기자 박채린(진주시)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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