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위한 책임] (2)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 김용생 씨
일제강점기 탄광 강제징용 "부모님 그리워한 고향 찾아"
2009년 김해로 집단 이주 "자녀와 생이별 힘들어"

"거기 러시아 사람들 사는 곳이에요."

김해시 율하동 한 아파트 단지 경로당을 묻자, 주민에게서 무심하게 돌아온 답이다. 지난달 31일 율현마을 사할린경로당으로 김용생(74) 김해시 사할린동포협회 회장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주민에게 "러시아 사람이라고요?"라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영주 귀국 사할린 동포는 러시아 사람도 맞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과 러시아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말도 어눌하다. 김 회장은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다. 그는 "한국말 아직 부족하다"라며 웃었다. 무더위에 한산한 경로당에서 만난 이들은 한국말을 썼지만, 단어가 막히면 러시아말을 했다.

대부분 7월 말부터 석 달간 방학 기간에 손자, 손녀 만나러 러시아 고향을 찾는다고 했다. 이들은 지난 2009년 10월 사할린에서 이곳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한국 고향은 다 제각각이지만, 고향 땅을 밟고 싶은 마음에 영주 귀국해 이곳에 자리 잡았다. 현재는 91명이 같은 아파트 3개 동에 살고 있다.

김해시사할린동포협회 김용생 회장.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 김해에 모여 사는 이들을 부르는 말이다. 김 회장과 함께 만난 김정자(71) 씨는 "이웃 주민들은 우리가 왜 여기 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저 러시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부 지원도 받고 있기에 "한국 돈으로 먹고산다"고 쉽게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사할린에서 태어나고 고령인 이들이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이 먼 곳에 왜 왔을까. 더군다나 부모님 고향이 김해도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통한(痛恨)의 역사'에 답이 있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간 데서 아픔은 시작됐다.

과거 일본에서 죄인들을 보낸 '지옥의 섬' 사할린.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령을 내렸고, 사할린에 조선인을 집단 모집, 강제 징용 등으로 끌고 갔다. 중일 전쟁으로 석탄 수요가 늘자, 탄광 개발 등에 동원했다. 56개 탄광 중 35개 작업장에서 조선인이 노역했다. 해방 후 한국인 4만 3000명이 사할린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사할린 귀환자>를 쓴 이순형 서울대 교수는 "정확한 수도 알 수 없어 6만 명에서 8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사할린 탄광과 군사기지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고 적었다.

사할린 강제 징용자는 이중, 삼중 고통을 겪었다.

사할린에서 노역하던 조선인 3200여 명이 '전환 배치'라는 명목으로 다시 규슈 등 일본 탄광으로 보내져 '이중 징용'을 당하기도 했다. 사할린에서 집단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사할린 거주 일본인은 대부분 본국으로 송환됐지만, 조선인은 일본 국적이 아니어서 배에 오를 수 없었다. 한국, 일본 모두 송환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냉전시대 소련은 한국과 적대관계인 데다 한인들의 노동력 확보를 기대했고, 미국은 이를 묵인하면서 사할린 한인들은 억류됐다. 사할린에 살아남은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어려운 삶을 살았다.

1980년대 말 한국과 소련 관계가 개선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고향방문이 추진됐고, 사할린 교포 정착촌이 생겼다.

1990년대 초반부터 강원 춘천시 사랑의 집, 경북 고령군 대창양로원에 사할린 동포가 입주했다. 1994년 한·일정상회담에서 사할린 한인 지원이 논의됐는데 한국이 건립터를 제공하고 일본 측이 건설경비 지원 등을 하기로 결정됐다. 이때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사할린 한인 1세(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에 이주해 계속 거주 중인 자)로 정해졌다. 이후 2004년에 사할린 이외 대륙에 거주하는 한인 1세도 포함됐다. 2008년부터 1세와 혼인한 배우자, 장애인 자녀도 지원대상이 됐다.

그렇게 서울, 인천, 안산, 김해 등에 사할린 한인이 모여 살게 됐다. 영주귀국자들에게 임대아파트, 생계·주거비 등이 지원된다.

생계비 지원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는 2015년 기준으로 영주귀국 인원은 총 4368명이고, 사망하거나 역귀국자를 빼면 현재 국내 체류인원은 3035명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5년 말에 한·일 공동 영주귀국 사업은 끝났고, 2016년부터는 우리 정부가 단독으로 매년 20명 이내를 대상으로 정해 진행하고 있다.

김용생 회장은 "부모님 고향은 경북 안동인데, 일제강점기 강제 모집으로 탄광에 끌려가서 결국 고향 땅을 못 밟고 돌아가셨다. 부모님이 생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을 많이 하시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러시아에서 신경과 의사로 일하며 잘 지냈지만, 부모님이 그리워한 한국 땅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지원받는 생계비가 부족해 벌이에 나서고 싶어도 지원에서 공제되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했다.

영주귀국자들은 또 다른 고통도 안고 살아 간다. 한국에 오면서 다시 이산가족이 됐기 때문이다. 사할린에서 나고 자란 자녀를 데려올 수 없어서다. 가족과 생이별을 견디지 못한 영주 귀국자는 다시 사할린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김정자 씨는 "부모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인데, 이곳에 오게 됐다. 자식들도 영주귀국 등의 방법으로 이곳에 정착할 수 있게 했으면 한다. 부모 세대가 강제 징용으로 이산가족이 됐고, 우리도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들, 딸 가족과 함께하지 못해서 이산가족이 됐다. 가족, 친척이 다 그곳에 있으니, 근심 걱정이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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