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2주년 기획 정의를 위한 책임] (1) 노예로 끌려간 강제 징용자
일제 강제 동원된 조선인, 중복 포함 780만 명 추산
일본, 보상커녕 역사 왜곡

어느덧 광복 72주년. 일제 강점기 시작부터 셈하면, 무려 107년이 흘렀다. 일제 강점기에 겪은 고통과 아픔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나라 잃은 국민은 탄광과 군수공장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위안부로 유린당하고, 심지어 원자폭탄 피해까지 입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에겐 몸과 마음에 고통이 아로새겨졌다. 아픔은 당사자에게 그치지 않았다. 고스란히 대를 잇는다. 아직 제 나라 땅을 밟지 못한 피해자와 유족도 많다. 세월이 지났지만,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왜 우리 이웃에 사할린 동포가 영주 귀국해 살고 있는지', '한국인이 왜 원폭 피해를 당하였는지'를 모르는 이들도 있다. 다행히 과거 아픔을 기억하고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고,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현재 진행형인 '야만의 역사' 상처를 이제 하나하나 치유해가야 한다. 광복절을 앞두고 5편에 걸쳐서, 피해자와 그 2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의를 위한 책임'이 무엇인지 고민하고자 한다.

영화 <군함도>를 본 관객 수가 500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는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의 삶을 재현해 주목받고 있다. 영화나 소설이 아닌 실제로 그 삶을 살아낸 김삼수(95·고성) 옹이 있다.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에 강제 동원된 생존자다. 김 옹을 만나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인터뷰했다.

조선인 수용소가 있던 북쪽에서 바라본 하시마(군함도). /민족문제연구소

지난 2005년부터 정부가 조사한 하시마 탄광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로 밝혀진 신고 건은 134건. 이 중 생존자 43명이 직접 자신의 피해 내용을 알렸다.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2017년 8월 현재를 기준으로 하시마 탄광에 강제 동원됐던 생존자는 6명, 이 중 경남에 살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가 김 옹이라고 밝혔다.

일제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78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영화 <군함도> 배경인 하시마 탄광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500∼800명이 강제 동원됐다고 추정된다. 일본 나가사키현 나가사키항에서 18㎞ 떨어진 작은 섬 '하시마'. 일본은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선 곳', '일본 근대화를 뒷받침한 탄광'이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하시마 등을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했다. 올해 말까지 일제 강제징용 역사를 알려야 하는 권고를 받았지만 일본은 이행하지 않고 있다.

해저 탄광인 하시마 탄광은 개발 초기부터 노동환경이 열악하기로 악명 높아 '감옥섬'으로 불렸다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이 총동원체제를 내려 하시마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해마다 늘었다.

김 옹은 처음부터 하시마 탄광에 간 것이 아니었다. 19살에 동네에서 모집돼 구주(규슈)의 한 탄광에 갔다가 6개월 만에 하시마 탄광으로 가게 됐다. 4년간 하시마 탄광에서 일한 김 옹은 "하시마는 나는 새도 못 나온다"고 말했다. 갇혀서 빠져나오기 어려운 그곳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김 옹은 나가사키에서 또 다른 노역을 하다, 원자폭탄 피해로 이중 고통을 받았다. 기구한 운명을 버텨낸 김 옹은 "지금까지 오래 사니까 자식들 살아가는 걸 볼 수 있어서 좋다. 그게 내 자랑이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경남 유일 군함도 생존자로 알려진 김삼수 옹이 팔을 걷어보이고 있다. /박일호 기자 iris15@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지난 2012년에 발표한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 실태 기초조사'를 보면 김 옹을 포함해 이곳에서 지낸 이들의 참상이 나온다.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열악한 노동 환경 등으로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1986년 하시마에서 발견된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화장 기록에서 한국인 사망자 122명이 확인됐다. 이 중 경남 고성군 출신자가 20%로 가장 높게 기록됐다. 전체 강제 동원 노동자 수, 화장되지 않은 사망자 등을 확인하기 어려워 실제 비율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 옹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해,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민초들이 겪었을 고통은 그가 살아온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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