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일심교' 머무는 곳마다 역사·의미 가득한 통도사
사방팔방 문화유산 길동무이자 말동무

양산 통도사

새벽께 비가 내렸다. 갈라진 토양 사이로 찔끔 스며든 빗물이 지독한 목마름에 얼만큼의 위안이 될는지.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은 종일 짙은 회색빛이다.

모처럼 걷는 날 햇빛이 없어 다행이지만, 비를 쏟아낼까 말까 저울질하는 하늘의 모양새가 밉상이다.

통도사 매표소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시작한다. 왼쪽 길은 차가 달리고, 오른쪽 길은 사람이 걷는다.

소나무 숲에 첫발을 디디자, 솔향이 반긴다. 빗물을 머금어 향은 배로 깊다. 한걸음에 모든 위안을 얻은 기분이다.

123.jpg
▲ 양산 통도사 대웅전. / 최환석 기자

우람한 소나무 사이로 접시꽃 한 송이 생명을 피워낸다. 고귀한 생명은 하루 날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모습이다.

남은 날들은 참으로 짧지만/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듯 살 수 있는 길은/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도종환 시 '접시꽃 당신'으로 화답하며 솔길을 음미한다. 계곡은 마치 거울인 듯, 소나무 형상을 아로새긴다.

잠시 헤어졌던 길은 청류교를 지나 일주문에서 다시 만난다.

통도사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 일주문 현판에 쓰인 금빛 글씨는 '영취산(또는 영축산·靈鷲山) 통도사'다.

절을 품은 산의 이름은 영축산. 본래 취서산이라 불린 그 산이다. 산정상 바위가 독수리 부리 같다 하여 취서산, 신령한 독수리가 산다 하여 영취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영취산은 인도 옛 마가다국 산으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파한 곳이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이를 품은 산.

123.jpg
▲ 양산 통도사 일주문. / 최환석 기자

현판을 쓴 흥성대원군이 왜 취서산, 영축산이 아니라 '영취산'이라 하였는지 그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일주문 옆을 흐르는 물길 위로 돌다리가 있다. '삼성반월교'는 무지개 세 개를 안은 모습이다. 이름에 쓰인 '삼성반월(三星半月)'은 '마음 심(心)' 자를 풀어쓴 뜻이라고.

세 개의 점과 반월 형상의 한 획을 다시 하나로 모으면, 곧 '일심교'다.

'깨끗한 하나의 마음으로 건너야 하는 다리'라는 의미. 다리 이름 하나에도 깊은 뜻이 있음에 탄복한다.

통도사 가람배치(사찰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는 통도사 상징인 금강계단을 정점으로 한다.

금강계단 불사리탑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신 부처의 정골사리를 봉안했다.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으니, 대웅전에는 정교한 불단만 있을 뿐 불상은 봉안하지 않았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하로전에 다다른다.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 영역으로, 세 개 불전과 만세루가 삼층석탑을 둘러싼 형태다.

하로전 중심 건물은 영산전.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석가여래 일생을 여덟 가지 사실로 정리한 팔상탱화가 있다. 보물 제1826호.

123.jpg
▲ 일주문 옆을 흐르는 물길 위로 놓인 '삼성반월교' 모습. / 최환석 기자

통도사는 세 영역으로 나뉜다. 하로전에는 영산전과 더불어 세 개 불전이 있고, 이들이 삼층석탑을 두른 모양새다.

중로전은 불이문부터 세존비각까지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 등 세 전각이 하나의 중심축에 일렬 배치돼 있다.

금강계단과 대웅전이 중심인 곳이 상로전으로 구조는 참배객이 대웅전을 270도 돌아 금강계단 입구에 이르게 한다.

통도사 자체 설명을 보면, 이러한 공간 구조는 한국 건축 공간 가운데 유일하다.

각각의 건물 군집이 지닌 특징은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동서 축선이 각 세 개 노전 영역 중심선인 남북 축선과 직교하면서 또한 통합하는 구성이라는 설명.

이처럼 구조와 공간이 자아내는 특유의 향기는, 만든 이의 고뇌와 배려에서 나온다.

목조 사천왕이 각기 다른 형상으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천왕문을 지나 중로전으로 향하는 길에 불이문이 있다.

'불이(不二)', 즉 불법의 세계는 둘이 아닌 경지. 생과 사, 만남과 이별, 당신과 나라는 상대적인 모든 것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의미.

123.jpg
▲ 양산 통도사 불이문을 통해 중로전을 바라본다. / 최환석 기자

궁극적으로 부처와 중생은 다르지 않다는 뜻을 담은 불이문은 '해탈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경내 마지막 문 앞에서 이렇듯 세상 모든 것은 하나라는 깨달음에 한발 가까워진다.

고요한 경내 한쪽 벽면에 능소화가 보인다. '그리움'이라는 꽃말 때문인지, 둘이 아닌 하나였던 소중한 이들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아미타불 정토인 극락에서 편히 계실지.

이렇게/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당신이 보고 싶어/내 마음이 흔들립니다//옆에 있는 나무들에게/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나도 모르게/가지를 뻗어 그리움이/자꾸자꾸 올라갑니다

- 이해인 시 '능소화 연가'의 한 대목

이날 걸은 거리 1.8km. 3442보.

창녕 창녕읍

'섭씨 35도.'

국도 5호선을 따라 창녕읍으로 가는 길. 바깥 온도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걷는 날을 잘못 택한 듯하다.

그나마 국도 5호선이 여러 고속도로와 노선을 공유하는 덕분에 교통량이 적어 가는 길이 답답하지는 않다.

읍내를 찾아 가장 먼저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 중심부에 놓인 널찍한 공간에 들렀다. 석탑 주변으로 공원화가 한창인 모습이다.

이중기단 위에 삼층 탑신을 올린 모습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 석탑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지난 1965년 문화재관리국은 동 삼층석탑을 해체해서 수리·복원을 하다 사리 7과와 사리장엄구(사리함, 사리병과 더불어 사리를 봉안하는 장치를 아우르는 말)를 발견했다.

123.jpg
▲ 고즈넉한 진양 하씨 고택 모습. / 최환석 기자

탑 이름에 '동(東)'이 붙은 까닭은 무엇일까. 마침 이 탑에서 직선거리로 떨어진 곳에 '술정리 서 삼층석탑'이 있다.

한 절터 안에 탑 두 개를 세워서가 아니라, 술정리에 두 개의 탑이 있기에 동과 서로 구분하여 부른다고 한다.

뜨거운 햇볕 탓에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른다. 그늘을 찾으려 고개를 돌리니, 고즈넉한 저택이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 뒤로 초가 안채가 남향으로 자리한 곳. 보통 초가삼간이라 부르는 일자형 홑집인 안채가 국가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진양 하씨 고택'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지만, 현재 누군가 사는 명백한 가정집이다. 주말을 빼고, 평일에만 시간을 정해 조용히 둘러볼 수 있도록 문을 열어뒀다.

주인장의 넉넉한 마음씨에 고마움을 느끼며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그늘진 마루에 앉아 숨을 고른다.

햇빛에 그대로 노출한 석탑보다는, 고택이 더욱 정감 있고 여유가 흐른다.

3일과 8일 장이 서는 창녕 상설시장을 지나 창녕경찰서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경찰서 건물 옆으로 낮은 언덕에 자리한 만옥정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봄철 벚꽃이 장관이라는 공원은, 여름엔 그늘이 일품이다.

123.jpg
▲ 술정리 동 삼층석탑. / 최환석 기자

어디 그뿐이랴. 신라진흥왕척경비, 창녕 객사, 퇴천삼층석탑, 창녕척화비를 한 데 모았다. 면적은 1만㎡이나, 볼거리는 한가득.

전형적인 객사는 가운데 주 건물이 있고, 좌우에 익사가 있는 구조다.

창녕 객사는 다른 객사에 비해 높이가 무척 낮다. 벽이나 창호도 없이 기둥과 지붕만 덩그러니 남아 애처로운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시장을 세운다는 이유로 본래 위치에서 술정리로 옮겨졌고, 1988년 현재 자리로 다시 옮겼다고 하니 잦은 이동이 까닭인 듯하다.

옮겨진 문화재는 객사뿐만이 아니다. 원래 교하리에 있었던 척화비는 광복을 맞은 후 공원으로 옮겨졌다.

말흘리에 있던 신라진흥왕척경비 또한 원래 말흘리에서 발견한 후 10년 뒤인 1924년 공원 한쪽에 놓았다. 비를 발견한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워놓았다고.

높이 178cm, 너비 175cm, 두께 약 30cm 규모 척경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라 진흥왕이 세운 기념비다.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비·마운령비·황초령비·창녕비가 있는데, 왜 창녕비만 공식적으로 순수비가 아니라 척경비라 부를까.

다른 진흥왕 순수비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 쓰여 있는데, 창녕비에만 빠져있다는 이유에서다.

123.jpg
▲ 창녕 객사. / 최환석 기자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닌다'는 뜻의 '순수' 없이 새 점령지 정책과 관련자 이름을 열거했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 경계를 넓혔다는 뜻으로 '척경비'라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순수라는 말이 없더라도, 실제 내용은 순수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밖에 비의 성격, 내용을 놓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어쨌든 이 비석이 지닌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신라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자료로 충분한 가치가 있겠다.

헌데 실제 비를 보자면, 읽기가 무척 힘들다. 안내문이 없다면, 그저 커다란 돌덩이다. 돌을 발견한 이는 누구일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책 <답사여행의 길잡이>에 따르면, 화왕산 기슭에 소풍 온 한 학생 눈에 띄어 그 존재가 드러났다.

1914년 조선총독부 위촉으로 창녕 고적을 조사하던 도리이 류조가 신라시대 비석이라고 확인했다고.

123.jpg
▲ 길바닥에 진흥왕행차길과 송현이길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 최환석 기자

비문 첫 마디에 '신사년 2월 1일 입'이라 쓰여 있어, 건립 연도를 진흥왕 22년인 서기 561년으로 추정한다. 그러니 다른 순수비 3개보다 앞서 세운 비석이 된다.

창녕군은 척경비가 있는 만옥정공원과 더불어 여러 문화재를 잇는 길 두 갈래를 홍보한다. 이른바 '진흥왕행차길'과 '송현이길'이다.

송현이길에 붙은 '송현이'라는 이름은 무얼까.

전문가들은 송현동 고분군 1500년 전 순장 흔적에서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던 인골 1구를 복원한다. 153cm, 16세 여성으로 밝혀진 순장 소녀에게 붙인 이름이 바로 '송현이'다.

진흥왕행차길과 송현이길이 겹치는 교동 고분군에 들러 읍내를 둘러본다.

한때 비사벌이라 불렸던 고장. 이곳에 터를 잡아 세력을 키웠을 비화가야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고는, 다시 현실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이날 걸은 거리 2.6km. 4601보.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