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피랑에 서면 (삼도수군)통(제)영이 보인다.

영남지역의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이 자주 찾는, 매년 적어도 한두 번은 다녀가는 곳이 통영과 거제다. 그곳까지 가는 국도가 잘 닦여 있고, 가볼 만 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풍경이 일품이다. 모터사이클 라이딩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해안 일주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내 경험으로는, 예전에는 통영보다 거제를 더 자주 갔었다. 통영은 거제에 가고자 스쳐 가는 도시였다. 거제지역의 해안도로가 워낙 잘 만들어져 있고, 풍광도 빼어나서 모터사이클을 타기 시작한 초기에는 통영은 제쳐두고 거제 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몇 년 새 상황이 달라졌다. 거가대교가 개통되고 거제지역 주요 시가지와 관광지의 교통 정체가 심해졌다. 해안도로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거북이처럼 기어가는 차 꽁무니에 붙어서 가야만 한다면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에게 그것만큼 고역도 없다. 거제지역은 돌아볼 만큼 돌아봤고, 교통정체도 심해져서 자주 찾지 않는 곳이 됐다.

라이더 입장에서는 통영도 예전에는 시내 교통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강구안 쪽도 차가 너무 많고, 미륵도 쪽으로 건너가고자 해도 길이 좁고 오르막 내리막이 많아 소통이 원활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몇년 사이 우회도로가 새로 개통되고 기존 도로가 확장되면서 다니기가 한결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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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피랑에서 보이는 삼도수군통제영. 여러 건물 중에서 규모가 큰 세병관이 도드라져 보인다. 통제영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서포루와 통제영 본영이 성벽이나 담장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을까? / 조재영 기자

 

통영 원문고개를 지나 서피랑으로

토요일 잠시 시간이 났다. 장마 때는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르기 때문에 채비를 하고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한편으로는 잠시라도 해가 났다 싶으면 앞뒤 재지 않고 달려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다. 하필이면 주말마다 비가 이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마는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다.

비 맞을까 무서워서 못 타느니 타다가 비를 맞더라도 나가는 게 좋겠다 싶어 카메라를 챙겨서 나섰다.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고, 바람 쐬기 안성맞춤인 통영으로 출발했다. 14번 국도를 신나게 달린다. 구름이 엷게 깔려 있어서 햇살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고성읍을 지나고 통영이 가까워질 무렵 길 양쪽에 옥수수를 삶아 파는 노점이 빼곡하다. 생각만 해도 먹음직스럽다. 나중에 돌아갈 때 한 봉지 사 가야지.

통영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원문고개를 지나면서 잠시 고민을 한다. '어디로 가지? 동피랑? 서피랑? 달아공원?' 산양읍에 있는 달아공원까지 갔다 오려면 시간이 조금 촉박할 듯하고, 동피랑은 너무 많이 가서 설렘이 별로 없다. 서피랑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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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피랑 언덕 왕후박나무쪽으로 가는 산책로에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있다. / 조재영 기자

 

동피랑에 '개발'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는 좀 어울리지 않지만, 어쨋든 동피랑은 이제 거의 개발 완료형이다. 서피랑은 이제 막 시작하는 곳이라고 봐도 되겠다. 그동안 이것저것 많은 것을 손보고 만들어놨지만 동피랑처럼 되려면 아직 할 일이 많다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런 의문도 든다. '꼭 동피랑처럼 만들어야 할까? 그냥 지금 그대로 내버려 두고 기본적인 관리만 해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서피랑이 동피랑과 거의 같은 모습이라면 서피랑에 와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사실 서피랑을 둘러보면 약간은 엉성하고, 약간은 폐허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런 모습이 '이곳에 사람이 살았었고, 또 살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만든다.

서피랑 왕후박나무

공용주차장에 모터사이클이 주차하고 자켓을 벗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자켓인데도 그것을 벗으면 한결 시원하게 느껴진다. 장마지만 여름은 여름이다.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걷는다. 우선 서피랑 구경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거기서부터 천천히 걷는다. 도로는 서피랑을 한 바퀴 도는 길인데 좁고 구불구불하다. 하지만 보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어서 걷는 데 불편함은 없다. 저 건너편에 낮게 내려온 구름 속에 꼭대기를 감춘 미륵산이 보인다. 그 아래로 바닷가에는 조선소가 보인다. 아마도 작업을 멈춘 지 제법 오래되었을 터다. 그곳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열심히 쇠를 갈아내고, 용접하고, 전선 깔고, 페인트를 칠했을, 그리고 일거리가 그곳에서 쫓겨나야 했을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말씀을 써놓은 계단에서 잠시 머무르다 언덕에서 툭 튀어나온 듯이 서 있는 왕후박나무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을이 오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있다. 무릎을 꿇고 코스모스에 카메라를 갖다 댄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살랑살랑 흔들린다.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찍으면 그 속에 바람도 함께 찍히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셔터를 누른다.

가까이 가서 마주한 왕후박나무는 예상보다 컸다. 나무 앞 안내판에 이렇게 적혀있다. '항남동과 서호동의 경계를 이루는 서피랑 먼당에 있는 벼랑 위의 고지대다. 1999년 8월 태풍으로 언덕이 붕괴된 후 2000년~2003년 사면보강 사업을 통해 정비된 곳이다. 이곳에는 5옥타브의 피아노 계단과 황소 형상의 수고 16m 200년생 후박나무가 있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것처럼 나무 옆에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 모양이 피아노 건반 모양이다. 모양만 피아노인 것이 아니라 계단을 밟으면 피아노 소리가 난다. 열심히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여러 명이 합심하면 간단한 노래는 연주할 수도 있겠다 싶다. 아이디어가 좋다. 왕후박나무 모양이 황소를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무를 봐도 황소 모양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고 계단을 오른다.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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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옥타브 피아노 계단. / 조재영 기자

 

서피랑 서포루

서피랑을 한 바퀴 도는 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오른다. 중간에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옆에는 빨간색 등대 모형이 있다. 뱃머리 모양 전망대에는 십자가 모양의 돛대와 방향키도 만들어져 있다. 전망대는 미륵산을 향해 있고, 미륵산 아래는 작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방향키를 돌린다. 내가 이 거대한 서피랑 호를 이끌고 저 남해로 나아가는 상상을 한다. 여성 관광객 2명 중 1명이 뱃머리에 올라 영화 <타이타닉>의 명장면을 흉내 낸다. 나머지 1명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순간 맞바람이 불어준다면 금상첨화이겠다 싶다. 사실 이 주변은 어느 곳에서나 통영항과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전망대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을 만들어 놓으니 추억을 담을 수 있는 소재가 되는구나 싶다.

그곳에서 몇 발자국 더 오르면 서포루에 닿는다. 서피랑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일종의 망루다. 동피랑 꼭대기에 동포루, 서피랑 꼭대기에 서포루가 있고, 동피랑과 서피랑 사이 가운데쯤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다. 그러니까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보면 동쪽에 동피랑(동포루), 서쪽에 서피랑(서포루)가 있다. 양쪽 망루는 높은 곳에 있어서 적의 접근과 이동을 살피기 좋다. 적의 움직임이 보이면 통제영에 알려주는 역할을 했으리라.

서피랑에서 보면 건너편 산 아래자락에 자리 잡은 삼도수군통제영이 빤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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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영 망일루에서 보면 오른쪽에 서피랑이 있다. 높은 곳 나무에 가려진 곳에 서포루가 있다. / 조재영 기자

 

삼도수군통제영·세병관

서피랑에서 내려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간다. 입구까지 3분도 걸리지 않는다. 구름에 가려 있던 태양이 잠시 얼굴을 내민다. 갑자기 땡볕이다. 3000원을 내고 입장권을 사서 통제영으로 들어섰다. 삼도수군통제영, 통제영, 통영. 통영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통제영 안에는 수십 채의 건물이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세병관'이다.

통제영의 관문 격인 망일루를 지나 세병관에 오른다. 그 웅장함이 경이롭다. 운동장 하나가 꽉 찰 만큼 큰 건물이다. 400여 년 전에 어찌 이리 큰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싶다.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위쪽을 자세히 보면 나무를 이어붙인 흔적이 있다. 어떻게 이렇게 큰 기둥을 저토록 정교하게 이어붙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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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 400여 년 전에 지은 건물 치고는 위압적일 만큼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 조재영 기자

 

 

안내판에는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 2002.10.14 지정.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이곳에 통제영을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제35대 통제사 김응해가 1646년 규모를 크게 해 다시 지었으며, 제194대 통제사 채동건이 1872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 단층 팔작집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 기둥, 2익공 양식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시설한 것이나, 안쪽의 중앙 3칸만은 한단을 올려 전패단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로 꾸민 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세병관>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가 쓴 글씨이다'라고 적혀있다.

문화재·유적 안내판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 나기도 한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말로 적어놓으면 어떻게 알아먹으란 말인가. '우물마루', '연등천장', '전패단', '소란반자' 따위를 도대체 누가 이해하겠는가? 아마도 이곳에 찾아와 이 안내문을 읽은 사람 중 99%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안내문을 만든 사람은 제대로 이해했을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안내문인가? 하루빨리 쉬운 말로 고쳐져야 한다. 전국에 있는 모든 문화재·유적 안내판에 해당하는 말이다.

세병관의 넓은 마루에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나도 잠시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가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살랑 바람에 머리를 옆으로 뉘었다. 마루에 누워서도 낮은 담장을 너머로 통영 바다가 슬쩍 보인다. 아마도 시가지에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금보다 바다가 더 잘 보였으리라. 이순신 장군도 이 마루에 앉아 바다를 굽어보며 나라를 걱정했을까?

 

사실 삼도수군통제사 하면 쉽게 떠올리는 분이 이순신 장군이지만 이 삼도수군통제영과 이순신 장군은 아쉽게도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인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회복 불능으로 대파하고 당신도 목숨을 잃었던 노량해전이 1598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이곳에 터를 닦아 통제영을 옮겨온 것이 1604년이었다. 그러니 이곳 통제영이 이순신 장군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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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안 수항루 뒤에 서 있는 소나무. 몸과 굵은 가지가 바다쪽으로 향해 있다. / 조재영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통제영에서는 어쩐지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된다. 세병관에서 수항루쪽으로 돌아서 나올 때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잔가지를 쳐놓아서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간 훤칠한 줄기가 드러나 있다. 몸도, 굵은 가지도 바다 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그 모습에 어쩐지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후방의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곧 쓰러질 듯이 피폐한 수군을 다독여 이끌고 먹구름처럼 바다를 뒤덮은 적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심정이 어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부하들을 눈에 뻔히 보이는 사지로 이끌고 가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가슴 아프고 괴로웠을까? 그리고 무섭지 않았을까? 아마도 무서웠을 것이다. 모든 걸 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난중일기에도 쓰지 못한 '심정'이 있지 않았을까? 소나무를 한 번 더 쳐다보고 망일루를 나섰다.

해는 다시 구름 뒤에 숨었지만 그가 내려쏘는 열기는 미세한 침처럼 머리와 목덜미, 어깨, 팔에 수없이 내리꽂혔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바람에 옥수수를 잊고 왔다. 아쉽지만 입만 다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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