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문화 르네상스 이룬 인사동
사람 몰리자 상업화로 고유가치 망가져

대한민국 최초 '문화지구' 인사동(仁寺洞)이 몰락하고 있다. 문화지구로 지정하면 문화가 피폐해지는 이 역설적인 상황, 변형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글로벌 도시답게 서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인사동은 골동품, 화랑, 미술관, 표구사, 필방, 전통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 맛집 등이 집중되어 있어 전통문화의 보고였다. 인사동 유래는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한다.

인사동은 조선시대 이후 문화와 예술의 메카였다. 인사동에는 조선 풍속화의 두 거장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당대 가장 뛰어난 화가인 어진화사(御眞畵師)들이 활동했던 왕립미술학교이자 한국 전통 회화의 요람 '도화서(圖畵署)'가 조계사 근처에 있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학자 이율곡, 조선 최고의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의 가택이 있었다. 충정공 민영환이 태어난 곳이며 치욕적인 을사늑약에 자결한 곳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도 있었다.

연암 박지원이 탑골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연암의 제자인 박제가도 이곳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 이들이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인 원각사의 '흰색 10층 석탑(白塔)' 부근에 모여 이용후생(利用厚生) 실학을 논의해 백탑파(白塔派/북학파)가 나왔다. 이들은 문학이나 철학, 서화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최고 미술평론가들이었다.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 사상과 문화의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도 바로 인사동이었다.

인사동은 사대부 집안이 많았던 북촌·삼청동·서촌과 맞닿아 있어 조선시대 이후에도 진귀한 골동품이나 그림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고미술이 유명해졌고, 전국의 유명 작품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고미술품의 매매가 활발히 일어나자 신예 화가들이 여기서 전시회를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등용문 역할도 하여 신구의 조화로 문화예술의 메카가 되었다.

한 달 동안 '갈매기의 꿈(갈꿈회)' 후원으로 윤갤러리에서 연 '부산갈매기 5인 5색' 기획전 때문에 자주 찾았던 여름 폭염 속 인사동. 국적 없는 먹거리와 상품들로 관광객을 현혹하는 풍광이 점령해가고 있었다.

수많은 갤러리, 화랑 등의 미술 전시회 때문에 서울여행 때에는 꼭 방문했던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전시회 오픈식 때 뒤풀이 장소로 화가들과 즐겨 찾았던 전통음식점들…. 예술가와 국내,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자 임대료가 오르고 이곳을 살렸던 화랑, 원주민이 비싼 임대료로 타지로 내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프랜차이즈 체인점, 화장품 가게, 국적 불명의 기념품이 넘쳐나면서 문화예술 공간이 급격히 위축되어 '인사동 고유의 차별성'이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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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없으면 관광도, 인사동도 죽는다! 역사와 전통, 스토리텔링의 '가치'가 무궁무진한 인사동. 전통문화를 살리려 하지 않고 관광에만 초점을 맞춘 문화정책이 이어진다면 지역 장소성과 정체성 상실로 인사동의 장래는 어둡다.

문화가 살아있으면 관광객은 모여들게 마련인데, 주객이 전도된 상업주의 난장(亂場), 인사동에서 코리아 문화관광 정책의 허실을 아프게 체험했다. 그리고 제2, 제3의 인사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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