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판매·금융…농협 업무 섭렵 30년 신뢰 바탕 신사업 추진

합천군 용주·대병 두 개 면을 관할하는 합천호농협. 손덕봉(55) 합천호농협 조합장실에 들어서면 '易地思之'가 새겨진 목판이 눈에 들어온다. 자주 접하는 사자성어이기에 큰 의미로 읽히지 않았다. 손 조합장과 2시간 동안 인터뷰를 이어갔다. 농민을 앞서 생각하는 마음, 아랫사람의 도리, 수장으로서 책임, 탓하지 않는 인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다시 한번 보게 된 역지사지(易地思之). 생각에서 비롯되지만 실천으로 확인되는 까닭에 한 자 한 자 묵직하게 읽힌다.

30년 함께한 농협

손 조합장은 2015년 전국동시조합선거에서 당선된 도내 137명 조합장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종 이력을 지녔다. 이사, 전무도 아닌 전 직원이다.

손 조합장은 1987년 농협에 입사해 구매, 판매, 금융 등 다양한 업무를 섭렵했다. 2002년 고향인 합천호농협으로 발령이 났고, 다양한 신사업을 펼쳤다. 이를 기반으로 2015년 조합장 선거는 초반, 당시 문외환 조합장과 양자구도가 형성됐다. 이후 문 전 조합장이 등록을 포기하면서 무투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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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덕봉 합천호농협 조합장. / 이혜영 기자

"당시 경제사업 총괄본부장으로 수차례 조합장 출마 의사가 없다고 밝혔지만, 젊은 조합원을 중심으로 추천이 많았습니다. 합천 농업환경 변화로 농민들의 미래 먹을거리 변화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제가 말을 번복하고 양자구도가 형성됐을 때, 문 조합장이나 저나 서로 잘 알기에 조합원들에게 도전 인사나 하는 정도지, 눈에 띄는 선거운동도 조심스러워했어요. 그러다 문 조합장이 '내가 키운 자식이랑 어떻게 싸우겠느냐'며 등록을 포기했어요. 단합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더 조심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손 조합장이 무투표 당선으로 조합원 신뢰를 받는 데는 30년 가까운 농협 생활이 전제됐다. 손 조합장에게 농협은 군대 제대 후 첫 직장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할아버지와 농사를 지었어요. 쌀이든 양파든 농작물은 무게가 있다 보니 시장에 내다 팔 때는 합판 밑에 발통(바퀴)을 달아 끈을 연결해 어깨나 머리에 두르고 끌고 가던 모습이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좀 더 편안하게 농사를 지었으면 하는 생각이 어릴 적부터 늘 있었습니다. 양파를 합천에 보급하고 수확 때는 어쨌든 농협 직원들이 수거에 나섭니다. 후배 직원들은 힘들다고 아우성이죠. 하지만, 보람을 느끼기 시작하면 신이 납니다. 한 날은 농작물 수거 지원을 갔는데, 온 벌판이 시뻘겋게 보일 정도로 많은 양의 양파를 차에 싣는 작업이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양파를 차에 다 실어나르고 마지막 차량 갓바(방수포)를 씌우자마자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는데, 그 쾌감과 시원함은 말을 못합니다. 중간에 비가 내리면 수확한 양파가 모두 물러져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땐 정말 쾌감을 느끼죠."

그렇게 농민들과 술 한잔하며 논밭을 함께 굴렀다. 선거 운동이 굳이 필요 없었던 이유다.

주요 작물의 변화

합천호농협에서 농가 수나 소득 면에서 벼농사 비중이 높지만 해마다 쌀값이 폭락하고 농가는 직불금 보전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합천군 전체 17개 면 가운데 용주면 경지 면적이 합천군 전체의 10%를 차지한다. 손 조합장은 아이러니하게 어떻게 하면 벼농사 면적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직불제에 의존하는 벼농사는 시책이 바뀌어 지원이 없으면 폐농만 양산할 가능성이 큽니다. 쌀은 쌀대로 농가 소득이 보장되는 고품질 쌀 단일품종을 재배해야 하고, 점점 면적을 줄여 품목 전환을 해야 농민들이 먹고살 수 있습니다."

합천호농협의 또 다른 대표 상품인 딸기, 버섯, 밤, 고사리 등은 기후변화와 고령화로 점점 쇠락해가고 있다.

손 조합장은 합천호농협 발령 후 겨울철 허허벌판인 들이 아까워 2004년 양파를 보급했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합천이 전국에서 3번째, 경남에서 가장 많이 양파를 출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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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덕봉 합천호농협 조합장. / 이혜영 기자

그리고 5년 뒤 마늘을 보급했고, 또 5년 있다가 생강을 보급했다. 이제 합천도 생강 주산지로 불리고 있다. 2011년 10개 농가로 시작한 생강작목반은 해마다 성장해 전국 총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파, 마늘 재배량 증가로 값이 하락하자 농가 소득보전 차원에서 대체 작물로 접목한 것이 큰 성과를 냈다.

"지금은 합천군이 양파 강세 지역이지만 아열대 기후로 바뀌면서 다른 대체 작물을 고민해야 합니다. 옛말에 양파는 추풍령 위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경기도 여주까지 올라갔습니다. 시범재배 단계인 경기도에서 양파를 왕성하게 재배하면 영남권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같은 가격에 팔아도 운송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죠. 합천 생강은 생강 주산지인 안동·서산과 수확 시기가 7~10일 정도 차이가 납니다. 영남권 이내 생산지는 합천밖에 없다는 장점이 있죠. 우리나라 생강 소비 70% 이상이 김장철인데, 합천 수확 시기가 가장 인접해 저장고를 거치지 않는 장점이 있어요. 생강 재배 확대를 위해 저온창고도 건립 중인데, 가을에 수매해 저장했다가 농가에 종자를 저렴하게 보급하고자 합천군으로부터 80% 예산을 받아 추진하고 있습니다. 생강도 언제까지 주효할지 모릅니다. 대체 작물 고민은 어느 지역 농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농협은 대개 신용사업에서 수익이 발생해 지도사업비와 신사업 추진비 등으로 사용한다. 합천호농협은 이러한 비용을 신용사업에서 80~90% 충당하고 있다. 손 조합장은 이러한 구조를 일 년에 2%씩이라도 경제사업부문에서 올릴 계획이다. 신용사업이 앞으로 점점 어려워지리라 판단하는 손 조합장은 1년에 2%라도 조금씩 경제사업 수익 규모를 늘리다 보면 10년이면 20%로 증가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를 위해 생강저온창고를 비롯해 벼 건조시설, 햅썹(HACCP) 기준을 충족하는 농산물 가공공장 설립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호평 일색 농촌인력 중개사업

농촌 고령화로 농협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토지, 자본, 기계 다 있지만 사람이 없어 농사를 포기한다는 게 현실이다.

합천호농협은 합천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특화사업으로 농촌인력 중개사업을 진행해 조합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조합원 좌담회를 진행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어려움이 일손 부족이에요. 농사 규모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어 사람만 있으면 농가소득이 수직으로 상승할 수 있습니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시장이 결정하지만 원가는 노력에 따라 줄일 수 있고, 농가 소득으로 연결됩니다. 작년부터 서둘러 시작하게 됐습니다."

작년 하반기 시작한 이 사업으로 합천호농협 조합원 농가에 인력 2406명을 지원했다. 올해 상반기는 벌써 1000명이 넘었다.

농가부담인 일당 11만 원을 8만 원으로 줄이고, 무엇보다 안정적으로 필요할 때 인력을 지원받을 수 있어 조합원 만족도가 높다. 손 조합장은 농촌-도시농협 상생 사업으로 확대를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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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덕봉 합천호농협 조합장. / 이혜영 기자

올해 초 합천호농협은 2016년 종합업적평가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 상은 전국 1131개 농축협을 대상으로 1년에 20개 농축협만 선정한다. 경남에서는 3개 농협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손 조합장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2015년 연말 평가에서 우리 농협은 2등을 했었습니다. 시상식에 가니 2등은 종이 한 장 주는데 1등은 자동차 키를 주더군요. 하하. 시상식을 다녀온 후 직원들에게 우리도 차 키 한번 받아보자고 격려했습니다. 조합원 좌담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차 키를 받으면 열심히 태워드리겠다고 독려했습니다. 사실 성장 폭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축돼 있다 1등 하는 것보다, 2등에서 1등 하는 것이 어려워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조합원과 직원들을 격려했고, 저도 놀랄 정도의 성과를 냈습니다. 조합원들의 남다른 애정에 감동했습니다."

사실, 손 조합장은 최우수상이 목표는 아니었다. 1등을 목표로 최고 수준으로 경영 상태를 올려놓고 관리해 유지만 해도 농협이 안정적으로 잘 운영될 것이란 밑그림을 그렸다. '따라오라'는 손짓이 아니라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자 상상 이상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합천호농협 조합원들이 똘똘 뭉치는 비결은 뭘까?

"저는 직원들에게 화를 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다 겪은 일이어서인지,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하면 화를 낼 일이 없습니다. 조합원 민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양 부모님을 일찍 잃어 나이 든 조합원은 부모님 같아 좋고, 젊은 사람들은 형제 같아 좋습니다. 먼저 찾아가고 인생 상담하고 밭에서 같이 거들고 농사를 지으니 농협 일이라면 직원들이 사정하지 않아도 부녀회장, 영농회장들이 먼저 지원사격해주고 있습니다. 자식이 부탁한다고 여긴 듯합니다. 부모 섬기듯, 직원들을 동료로 지금처럼 운영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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