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해변의 여인'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피서지를 찾는 여름철이면 누구나 떠올리는 여름 노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여름을 대표하는 노래를 조사할 때마다 어김없이 최상위에 오르는 노래가 있다. 바로 '해변의 여인'이다. 혼성 트리오 쿨과 나훈아가 불러 대중의 인기몰이를 했던 노래다. 나훈아와 쿨의 노래 제목은 같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곡이다.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은 나온 지 오래된 가요지만 그 인기는 여전하다. 부르기 쉽고 노랫말이 서정적이어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트럼펫 소리의 긴 여운 따라 해거름에 접어든 바다의 풍경을 음미하듯 불리는 노래는, 곡명과 달리 바다가 아닌 강과 관련된 사연이 있다.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은 포항 출신 작곡가 박성규가 작사·작곡한 노래다. 작곡가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안고 상경한 박성규는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가 되었지만 월급조차 변변하게 받지 못하는 무명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1969년 여름 어느 날, 남이섬에서 임직원들과의 야유회가 열렸다. 나훈아와 같은 소속사의 박성규도 그날 야유회에 끼여 참석했다. 하지만 평소 말수가 적고 침묵하는 스타일인 그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혼자 강변을 거닐었다. 그러다 나무 그늘 아래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강 건너 높은 바위에 앉아 상념에 잠겨있는 어떤 여인을 보게 된다. 바람결에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인상 깊어, 자신도 모르게 항상 지니고 다니던 오선지를 꺼내어 그 풍경을 스케치하듯 떠오르는 악상과 이미지를 메모해 두었다. 야유회를 마친 그 날 밤 서울로 돌아온 박성규는 밤을 새워가며 악보를 다듬어 나갔다. 멜로디가 완성되자 남이섬에서 본 긴 머리가 휘날리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사를 써내려갔다. 창밖이 뿌옇게 밝아올 무렵 노래의 제목을 '호수의 여인'으로 적으며 노래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레코드사로 나온 친구이자 가수인 나훈아에게 악보를 내보였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노래를 읊조리던 나훈아는 "노래 제목을 '해변의 여인'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우리나라는 호수가 별로 없는 대신 삼면이 바다고 해변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성규는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부산 출신인 나훈아의 조언이 일리 있다고 받아들여, 노랫말 속 호수를 해변으로 바꾸고 노래의 제목도 '해변의 여인'으로 결정했다. 곧바로 음반이 나왔지만 당장의 반응은 별로였다. 그가 쏟은 열정에 비해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 한데는 작곡가의 인지도가 떨어지는 데다가, 나훈아 역시 톱가수 대열에 오르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다. 이후 '해변의 여인'은 발표한 지 2년이 지나도록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나훈아는 1947년 2월 11일 부산 동구 초량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 여러 친구와 잘 어울리며 쾌활하게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는 가수가 돼야겠다는 꿈을 늘 품고 있었다. 악기를 능숙하게 잘 다루었으며 피아노 연주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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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규 작곡집 ‘해변의 여인’, ‘가슴아픈 사람끼리’.

1966년 여름 나훈아는 가수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막연한 배짱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의 주머니 속엔 백오십 환뿐이었고, 그마저도 설렁탕 한 그릇을 사 먹으면서 무일푼이 됐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낯선 골목을 헤매며 잠잘 곳을 찾아다녔다. 그 뒤로 거의 석 달 동안 제대로 쉴 곳 없이 떠돌던 나훈아는 굶어서 얼굴이 퉁퉁 붓고 눈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핼쑥해졌다. 그렇게 거리를 떠돌다 우연히 오아시스레코드사 간판을 발견한 그는 사무실로 올라가 손진석 사장에게 무조건 일자리를 청했다.

사환 자리를 얻은 나훈아는 회사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그의 사환 생활이 2년째로 접어들던 1968년 가을 즈음, 드디어 가수의 꿈을 펼칠 우연한 기회를 잡게 된다. 장충동의 녹음실에서 앨범 녹음 때문에 오아시스레코드의 직원들과 전속작곡가들이 모였는데 정작 녹음하기로 한 가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속이 타들어 가던 손진석 사장의 눈에 부산에서 올라와 온갖 잡일을 도맡았던 사환 최홍기의 투박한 얼굴이 들어왔다. "에라이 홍기야, 이 노래 너나 한번 해봐라"며 농담 섞인 권유를 했다. 나훈아의 노래가 시작되자 녹음실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손진석 사장은 즉석에서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야말로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서라벌예고 2학년이던 나훈아와 계약을 하고, 대신 녹음한 '천리길'을 발표하며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시킨다. 소속사는 본명 최홍기라는 대신 '최훈'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다. 그러다 너무 흔한 이름 같아 다시 '훈아'로 개명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훈아, 나훈아'하고 부르면서 '나훈아'로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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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71년 오아시스레코드사 최고의 인기 가수인 나훈아가 경쟁 소속사인 지구레코드사로 옮기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지구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인 김영광의 작품이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3시간 만에 28곡을 녹음할 정도로 부르는 대로 히트곡을 쏟아냈던 나훈아를 상대 레코드사에 빼앗겼다는 것 자체가 오아시스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더군다나 지구레코드사에서 '가지마오', '머나먼 고향' 등이 연이어 히트하자,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조바심은 한층 더했다. 결국 맞불 작전으로 나훈아의 또 다른 노래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지구레코드사에서 발표하는 신곡의 이미지를 흐려놓자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이미 발표된 여러 곡을 선정해 재발매를 하기로 하였다. 그때 눈에 띤 곡이 '해변의 여인'이었으며, 음반에 깔려있던 이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해 나훈아의 앨범을 새로 만들었다. 이전과 달리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노래가 만들어져 발표된 지 2년이 지나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해변의 여인'은 무명 작곡가 박성규에게 운명을 바꾸어준 노래가 되었다.

작사가 금나영은 작곡가 박성규와 그의 '해변의 여인'을 두고 "말하자면 타고난 작사가는 아니라도 나름대로 꾸준히 노력해 왔던 바탕에다 전율하듯 받아들인 일순간의 감성을 놓치지 않고 진솔하게 메모해 둔 '작가적 기질'이 이런 히트곡을 낳게 한 것이다"라며 평가하였다.

이제 최고의 여름 음악인 '해변의 여인'을 감상하며, 나훈아 노래에 얽힌 또 다른 사연을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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