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63 일대에 있는 밀양 수산제 수문입니다.

수산제는 전북 김제의 벽골제, 충북 제천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와 삼한시대 3대 저수지 중 한 곳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제방의 전체 길이는 1km(밀양시청 홈페이지 기록)에서 4km(수산제 현장 안내문 기록)으로 추정되는데, 수산리와 인근 귀명리, 초동면 검암리와 금포리까지 걸쳐 있는 대규모 저수지였다고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20리였다는 기록도 있다 하니,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수리 시설이었습니다.

이처럼 밀양 하남읍 수산리 일대에 대규모 저수지가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당시 농업의 중심지이면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밀양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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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하남읍 수산제 수문. / 김구연 기자

미리(彌離)는 용(龍), 즉 크다(大)는 뜻이고 미동(彌凍)은 물둑 혹은 제방을 뜻하는 말로, 물과 관계되는 커다란 제방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수산제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고대 읍락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밀양의 옛 기록인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신라왕이 이곳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충렬왕 원년(1274년)에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 김방경(金方慶)이 몽고군사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이곳에서 제방을 고쳐 쌓고 군량미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국영농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도 합니다.

융성했던 수산리 지역이 점차 쇠퇴하고 지금의 밀양시 방면으로 그 중심권이 이동하면서 수산제의 역할도 점점 미미해지기 시작합니다.

땅속의 역사로만 존재하던 수산제는 1986년 11월 24일 수문의 발견으로 고대의 번성했던 역사가 다시 재조명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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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하남읍 수산제 수문. / 김구연 기자

하남읍 수산리 972번지 지하 자연암반에서 발견된 수산제 수문은 높이 181cm, 폭 152cm였습니다.

암반을 굴착해 만들었기 때문에 낙동강 지류인 용진강의 범람을 막고 물을 조절하기에 적당한 구조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새로운 수리시설을 만들면서 모두 파괴해 버렸다고 합니다.

현재 밀양시에서 발굴 조사작업을 거쳐 옛 제방의 일부를 복원했고 1990년 12월 20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02호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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