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옆 동네에 고추 따 먹는 할배가 있었다. 여기서 고추는 밭에서 키우는 작물이 아니다. 할배는 당신 집안에서 아이의 고추를 땄다. 그리고 먹었다고 들었다. 혼자 다니는 아이를 몰래 지켜본 뒤,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가 고추를 따서 먹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비록 고추는 없었지만 힘없는 아이였던 나는 고추 따 먹는 할배가 너무 무서웠다. 옆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갈 때면 할배 집을 숨도 쉬지 않고 냅다 뛰거나 저 멀리 안전한 길로 돌아갔다. 내 기억 속 고추 따 먹는 할배, 지금 생각하면 아동 성추행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어른들은 성추행범을 동네에서 추방하지 않았을까? 왜, 아이들을 성추행범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았을까? 돌아보면 어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소싯적 일화가 있다.

중학교 1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우리 또래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나쁜 오빠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언니들이 있는 집을 급습한다는 것이다. 헛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도 오빠들이 나와 언니가 자는 방에 들어왔다. 차단기에서 전기 스위치를 내린 뒤, 바깥채에 있는 우리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잠결에 누군가 방에 침범한 것을 눈치 챈 언니는 냅다 발차기로 얼굴을 가격한 뒤, 도망치는 놈 중에 한 명을 붙잡고 옆에 자고 있는 나에게 SOS를 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나는 언니의 난투극을 돕지 못했다. 한번 자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는 죽일 놈의 숙면 때문이었다. 다음날, 언니는 나를 데리고 용의자로 추정되는 오빠들을 찾아갔다. "이 ×××야! 죽고 싶어?"라는 욕설과 함께 침을 확 내뱉었다. 언니의 화끈한 복수에 발끈하는 오빠도 있었지만 동네에서 짱 먹던 언니의 깡다구를 아는지라 그날 이후 우리 집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우리 또래들 사이에서 나돌았던 소문은 점점 더 흉흉해졌다. "누구 언니가 오빠한테 당했다더라…." 어른이 되고 난 지금,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어른들은 그 오빠들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쉬쉬했을까?" "왜, 어른들은 성폭행범들을 그대로 내버려뒀을까?"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의 행동을 현재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분노까지 치민다. 3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을 고려해야 그나마 의문이 풀린다. 그 시절 아동 성추행은 범죄가 아니었다. 할배가 아이의 성기를 만지거나 먹는 시늉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풍습과 비슷한 행위였다. 아동의 성기를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놀이문화가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고추 따 먹는 할배가 우리의 고추를 백번이고 따 먹는다고 해도 별스러운 노인의 희한한 취미일 뿐 범죄는 아니었던 것이다. 언니들의 방을 급습하러 다닌 오빠들도 마찬가지. 사춘기 아들들의 별스러운 일탈행위일 뿐 성범죄로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성폭행 피해 여성을 가해 남성이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조차 올바른 성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던 때였다. 뿌리 깊게 박힌 남성우월주의와 청소년 성교육의 부재가 빚어낸 참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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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흘러간 그때 그 시절이 아니다. 지금이다. 여전히 여성의 미니스커트가 성폭력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둥, 남성의 성욕은 참을 수 없는 본능이라는 둥 남성우월주의 이데올로기는 살아있다. 피해 여학생의 학교를 찾아가 제 아들 인생을 책임지라고 난동을 부리는 가해 부모도, 아동을 등장시키는 포르노에 열광하는 어른들도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30년 전, 고추 따 먹는 할배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있는 것이다. 더 은밀하게. 더 치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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