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10) 사천만 매향비에서 격납고까지

경남 갯벌 절반 분포한 사천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터전

갯벌 하면 어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느냐 물었을 때 선뜻 사천만이라 답하는 경남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전남 순천만이나 신안·무안 일대 서해안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천은 틀림없는 갯벌의 고장이다. 경남 갯벌의 절반이 사천에 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물론 사천만의 동쪽 부분인 사천읍·사남면·용현면 일대 갯벌이 매립되어 산업단지가 되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하지만 광포만까지 포함하여 사천만의 서쪽 부분은 그대로 살아 있다. 동쪽 또한 다치기는 했어도 꿋꿋이 살아남은 선진리~주문리 갯가는 이른바 '실안노을길'에서 가장 빛나는 길목이다.

남강댐에서 가화천을 통해 초당 최대 3250t이 쏟아지는 바람에 갯벌이 작지 않게 망가진 것도 분명하다. 그래도 잘피 우거진 사천만이 물고기 산란장 기능을 못할 지경은 아니다. 남해안 수산자원 형성에 여전히 이바지하고 있다. 사천만 갯벌은 지금도 마을 사람들에게 사철 마르지 않는 고방(庫房)이고 자식들 공부시키는 돈줄이며 다함께 어우러지는 놀이터다. 그래서 거기 깃들인 역사·문화도 유달리 풍성한 사천만이다.

사천만 갯벌.

조선시대엔 항구 역할 수행석장승 세워 무사안녕 기원

1760년 설치된 조창(漕倉) 가산창은 가화천이 바다를 만나는 어귀(축동면 가산리)에 있었다. 1660년 축동면 구호리에 들어섰던 장암창이 100년 만에 이리로 옮겨왔다. 조창은 옛적 조세로 거둔 곡식·면포와 특산물을 모아두는 창고이다. 관할 지역은 사천·진주·곤양·하동·단성·남해·고성·의령이었다. 조세물품은 임금이 있는 서울로 옮겨졌기에 조창은 강가·바닷가에 들어섰다. 경남에는 조선시대 조창이 셋 있었다. 사천의 가산창과 마산의 마산창은 바닷가에, 밀양의 삼랑창은 강가에 있었다. 물품을 끌어모으는 육로·수로가 좋았고 남해안·서해안을 거쳐 한강 하구까지 오가는 바닷길도 좋았기 때문이다. 가산창은 옛적 사천이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교통의 핵심이었음을 일러준다.(사천에는 고려시대에도 통양창이 있었는데 지금 용현면 선진리 일대다.)

사천만은 전통시대 훌륭한 항구였다. 지금은 대부분 이런 얘기를 믿지 않는다. 사천만 바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드나들지 못할 만큼 얕기 때문이다. 의문 한 자락은 남강댐 방수로에서 풀린다. 가화천으로 들어오는 방류수가 그 내만(內灣) 중선포천·사천강 등의 물길을 막았다. 덩달아 떠내려오던 모래와 흙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의문의 다른 한 자락은 선박 동력의 변화가 풀어준다. 바닥이 뾰족하고 깊이 잠기면서 모터로 프로펠러를 돌리는 요즘 배는 밀물·썰물 차이가 적고 물이 깊어야 좋다. 하지만 바닥이 편평하여 깊이 잠기지 않고 노·돛이 동력인 옛날 배는 달랐다. 밀물·썰물 차이가 크고 깊지 않아야 좋았다. 그래야 밀물 때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재물이 쌓이면 사람이 끓게 마련이다. 사람이 끓어야 일과 놀이가 생겨난다. 일과 놀이가 벌어져야 역사와 문화가 이루어진다. 가산창에서 생긴 문화 가운데 가산오광대는 놀이 관련이고 가산리 석장승은 일 관련이다. 가산창 수호신이 석장승이다. 뱃길에도 조창에도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석장승을 두고 뱃길도 평안하게 해주고 조창도 지켜주십사 빌었던 까닭이다. 갯일 뱃일이 편하면 장승을 세우고 무사안녕을 빌지 않았다.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했기에 이렇게 신상을 세우고 기댔던 것이다. 가산창이 없어진 뒤에도 석장승은 마을을 지켜주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십사 비는 대상으로 섬겼다.

가산리 석장승.

석장승은 지금도 사람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석장승 앞에 제사와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고 해서가 아니다. 가산리 석장승은 모두 네 쌍이다. 마을 들머리 언덕배기와 당산나무 아래에 제각각 남녀가 두 쌍씩 있다. 다른 데는 많아봐야 한 쌍이 고작이다. 언젠가 한 쌍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데 이를 1980년 새로 만들었다. 믿음이 끊어졌으면 굳이 새로 세울 까닭은 없었다. 가산리 석장승은 별나게도 생겼다. 보통 장승은 몸집이 크고 눈은 퉁방울이지만 여기 석장승은 문인석상처럼 생겼고 작다. 여자 석장승은 머리카락을 둘로 묶은 모양이 도깨비뿔처럼 보인다.

사천만이 교통요지였음은 남명 조식(1501∼1572)이 지리산 유람 첫걸음을 사천서 내디뎠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남명은 1558년 지리산을 둘러보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썼다. 남명은 4월 11일 삼가현 외토리 계부당(鷄伏堂)을 떠나 15일 축동면 구호리 쾌재정 앞(중선포中宣浦로 짐작)에서 배를 타고 하동 화개까지 거슬러 올랐다.

고려 말기에 세워진 매향비삶 고달픈 민중 '희망' 투영

사천 매향비는 곤양면 흥사리 들판과 산기슭이 만나는 언저리에 있다. 고려 우왕 13(1387)년 세워졌다. 매향(埋香)·침향(沈香)은 금강석보다 단단하고 냄새는 어떤 꽃보다 향긋하다. 흠향하게 될 부처는 현세불(석가모니)도 내세불(아미타)도 아닌 미래불(미륵)이었다. 고통스러운 백성들에게는 미래에서만 희망이 허용되었다. 고려 말기 민중들은 겹으로 고달팠다. 안으로는 권문세족한테 시달렸으며 밖으로는 왜구한테 당했다.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비원이 56억7000만 년 뒤에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었다.

<사천시사> 437쪽에는 빗돌의 재질이 흑운모 화강암이라 적혀 있다. 하지만 가서 보면 그렇게 믿기지 않는다. 화강암보다 무른 화성암 계열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새긴 글자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닳았다. 매향의 주체가 중앙의 존귀한 귀족이라면 사천 바닷가 아무데서나 구해지는 무른 돌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목은 "많은 사람이 계를 모아 미륵불 왕생을 기원하며 향을 묻는 글(千人結契埋香願王文)"이다. 끝머리에는 "모두 합해 4100(都計四千一百)"이라 적혀 있다. 4100이라는 숫자가 예사롭지 않다. 1425년 나온 <경상도지리지>에 곤남군 호구가 210호에 3062명으로 나온다. 매향비는 옛적으로 치면 곤남군에서 발견되었다. 금품을 내고 발품을 내고 조직을 내고 지식을 낸 인원이 고을 전체보다 많다. 민중들의 대규모 결집은 지배계급에게는 위력시위로 작용되었을 수도 있다.

매향비.

일제강점기엔 격납고 설치비행장 있던 항공기 등 숨겨

사천공항은 경남 유일 공항이다. 사천은 '항공산업의 메카'를 꿈꾼다. 사천만 갯벌을 매립하고 들어선 산업단지들도 많은 경우 항공 관련이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중선포천과 사천강 사이 사천읍 수석리 일대에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이 깔려 있다. <사천 항공 63년사>(2016년) 16쪽은 이렇다. "1939년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사천평야에 군용 비행장 건설에 들어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은 사천비행장에 전투용 항공기를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버려둔 채 물러났다. 사천비행장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사천시사>(2003년)의 1552쪽 기록은 이렇다. "사천비행장은 일제가 1940년대 초에 건설을 시작하여 마무리 단계에서 패망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경폭격기와 연습기가 비행장에서 활공을 하였다는 지역 촌로들의 진술을 들을 수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격납고(格納庫)는 비행기를 감추어두는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격납고가 사천에 있는 줄 처음 알게 되었다.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전국교사모임 윤병렬 대표와 함께 정동면 예수리를 찾았다가 보았다. 성황당산 북쪽 기슭 사천강 사이에 자리잡은 논배미 옆에서 호박덩굴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콘크리트 두께는 20㎝쯤 되었다. 철근을 섞어 만든 때문인지 몇 군데만 금이 나 있었다. 지름이 20m 남짓 되는 납작한 반원형이었다. 비행기가 드나들었을 뒤쪽은 너비가 10m 안팎, 높이가 3~4m였다. 앞쪽은 좁고 낮아서 너비가 5m 안팎, 높이가 1m 남짓이었다. 지번을 확인하니 예수리 180-2였다.

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성황당산 북쪽 기슭에 있는 비행기 격납고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집과 논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면 당연히 적지 않게 알려졌을 법했다. '사천 격납고'로 인터넷에서 검색했으나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았다. 윤병렬 대표는 "한때 예수리에 살아서 2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20채 넘게 있었는데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주변에 더 있을 것이다"고 했다. 또 "사천읍에 있던 비행장에서 비행기가 격납고까지 모래사장을 타고 굴러왔다는 얘기를 동네 어른들한테 들었다"고 덧붙였다.

사천만 갯벌은 일제에 짓밟힌 자취도 아프게 간직하고 있다. 제주도 알뜨르비행장의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와 밀양시 상남면의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 두 군데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이름이 올라 있다. 사천 이 격납고도 고유한 특징과 의의가 확인되고 사천시민의 관심을 끌게 되면 언젠가는 근대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계 일행 작도서 노닐어습지·자연 이치 논하기도

이 밖에 곤양군수로 있던 스승 어득강을 1533년 퇴계 이황이 찾아와 함께 노닌 자리 작도정사(서포면 외구리 105-1)도 있다. 퇴계 일행은 밀물이 빠질 때 배에서 내려 까치섬(작도=鵲島)에 올랐다. 고기를 회치고 술을 잔질하며 습지와 자연의 이치를 논했다. 이를 기리는 건물이 작도정사다. 지금은 뭍 한가운데에 있다. 일제 말기인 1938년 일본 사람 야마타(山田)가 간척해 논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도정사.

대섬(용현면 통양리 산 15-1111)도 찾을 만하다. 대나무가 우거져 대섬인데 지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썰물 때 100m 정도 걸으면 들어갈 수 있다. 다양한 지층이 어지럽게 나타나 있다. 그런 지층을 따라 화석도 여러 가지 나온다. 특히 볼 만한 것은 나무 화석이다. 한 방향으로 쓰러져 있지 않고 이리저리 어긋나게 쓰러져 있다. 땅이 흔들렸거나 하늘이 흔들렸거나, 아니면 둘 다 흔들렸거나 했을 것이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