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15) 진주 둘러싼 비봉산·자굴산 줄기
남덕유산서 뻗은 산줄기 '마음의 고향' 비봉산 낳아
강씨 가문 뒤얽힌 역사 이름 변경·맥 끊는 아픔 대나무 숲·봉란대 남겨
영험함 뽐내는 영봉산 풍수지리 명당 매화산 남강 굽어살핀 송대산 사람 살기 좋은 터 일궈

진주에는 높은 산봉우리나 험한 산마루가 없다. 남강 주변 평지를 둘러싼 산은 대체로 100~200m다. 다른 시·군과 경계를 이루는 산이 500m 정도로 그나마 높은 편이다. 그렇지만, 진주는 고려시대부터 많은 속현(屬縣)을 거느린 큰 고을이었다. 옛사람은 이 땅을 두고 산하금대(山河襟帶)라고 표현했다. 산을 옷깃처럼, 강을 띠처럼 두르고 있다는 풍수지리 개념이다. 특히 옛 진주 고을 읍치(邑治·관아가 있는 고을 중심)를 둘러싼 산세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이라 평가받는다. 한겨울 찬 북서풍을 막고 농사지을 물이 풍부하다는 말이다. 장풍득수에서 풍수라는 개념이 나왔듯, 진주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산세였다.

◇큰 고을 진주의 진산, 비봉산

진주 사람 중에 옛 MBC진주에서 방송하던 <비봉산의 메아리>란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테다. 비봉산(飛鳳山·138m)은 남강과 함께 오랜 세월 진주 시민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고을의 진산(鎭山·국가가 지정한 고을 수호산)이었다.

비봉산은 산맥의 근원을 남덕유산(1507m)에서 찾는다. 남덕유에서 뻗은 산줄기가 황매산(1108m), 자굴산(897m)을 거쳐 집현산(集賢山·572m)으로 이어진다. 집현산은 현재 주봉이 산청에 속하지만 조선시대까지 진주 고을에서 가장 우뚝한 산이었다. 산 이름은 현자가 모인 산이라는 뜻이다.

비봉산이 동서로 넓은 품을 펼쳐 진주 시가지를 감싸고 있다.

집현산이 남강을 향해 뻗은 줄기 끝에 비봉산이 맺혔다. 비봉(飛鳳)은 봉황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말한다. 예로부터 봉황은 제왕의 기운을 상징한다.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말도 있다. 또 봉황 이름을 지닌 산 아래서는 인물이 많이 난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고을 진산 중에 유독 비봉산이란 이름이 많은 이유다. 조선시대 지리서는 비봉산을 두고 '봉황이 날개를 크게 펼쳐 고을을 감싸고 있다'고 표현했다. 말티고개와 선학산(仙鶴山·135m)이 동쪽 날개, 두고개(137m)와 당산재(140m)가 서쪽 날개다.

현재 선학산 정상에 전망대가 들어서 있는데,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와 그 너머 진주성을 바라보는 전망이 특히 좋다. 비봉산은 진주 시민이 운동 삼아 즐겨 찾는 동네 뒷산이기도 하다. 실제 올라보니 동네 산치고는 숲이 깊고, 생명력이 넘쳐서 비범한 산이란 느낌이 든다.

◇봉황을 잡아라! 비봉산 수난사

비봉산은 고려시대까지 대봉산(大鳳山)이라 불렸다. 고구려 명장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한 진주 강씨가 터를 잡고 뿌리내린 곳이 대봉산 아래다. 이후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진주 강씨는 대표적인 무인 가문으로 유명했다. 봉황은 이 가문의 상징이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대봉산 아래 진주 땅에서 많은 인재가 났고, 가문의 위세도 당당했다. 위세가 지나치게 높아져서일까, 진주 강씨 가문은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당시 대봉산 위에 봉암(鳳巖)이란 바위가 있었는데, 이 바위 기운 덕에 강씨가 융성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고려 인종 때 이 소문이 '이곳에서 황제가 난다'는 모함으로 둔갑해 조정에서 봉암을 부숴버렸다. 그러고 나서 봉황이 날아가 버렸다는 의미로 산 이름을 비봉산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 초에는 진주 강씨를 견제하려 비봉산 동쪽으로 산맥을 끊어 고개를 냈는데, 이것이 지금 말티고개다. 왕이 무학대사를 시켜 비봉산의 맥을 끊었다는 말도 있다.

망진산에서 바라본 진주 풍경. 진주성 옆으로 푸른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날아가려는 봉황을 붙잡으려는 진주 강씨 가문의 노력은 치열했다. 심지어 조선시대 진주 읍치 구성이 봉황을 붙잡으려는 장치로 이뤄졌다는 연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남강변 대나무 숲이다. 대나무는 봉황의 먹이다. 지금은 진주교와 천수교 사이에 집중돼 있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진주성 건너편 강변이 대부분 대나무로 덮여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홍수를 막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봉황을 잡아둔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17세기 초 편찬된 진주목 읍지 <진양지>에는 신령한 기운을 보존해 고을이 망하지 않도록 대숲을 잘 보호하라는 당부가 적혀 있다.

진주시 상봉동 주택가에 있는 봉란대(鳳卵臺·일명 봉알자리)는 알 낳을 자리를 만들면 봉황이 돌아온다는 조언에 따라 만든 것이다. 안내판에는 진주 강씨 가문이 날아간 봉황을 부르고자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봉란대는 원래 가야시대 고분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상부에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 유허비가 서 있고 그 아래 움푹 팬 자리에 봉란석(鳳卵石)이 있다. 진주 시내를 조망하는 또 하나의 명소 망진산(望晉山·178m)도 원래는 한자가 망진산(網鎭山)이었다고 한다. 그물망(網) 자를 써서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막겠다는 취지다.

망진산 봉수대.

◇옛 반성 고을 산과 자굴산 줄기

진주 동쪽 일반성면과 이반성면은 고려시대까지 반성현이란 고을이었다. 남강으로 합류하는 반성천을 따라 이 지역에도 일군의 산맥이 이어져 있다. 이반성면에 있는 영봉산(靈鳳山·397m)은 이 지역 중심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으로 만수산(萬壽山·456m), 보잠산(寶岑山·453m), 오봉산(五峰山·525m) 등 훨씬 높은 산이 늘어섰으나 예로부터 영험하기로 이 산을 최고로 쳤다. 옛 반성 고을 사람은 이 산에 올라 마을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영봉산의 신령스러움은 서쪽 골짜기에 있는 용암사지(龍岩寺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돌부처, 석등, 어느 고승의 사리탑만 하나씩 남아 쓸쓸한 풍경이다.

하지만, 옛날 도선국사가 삼한 통일을 기원하며 선암사, 운암사, 용암사 세 개 사찰을 지었는데, 이 중 용암사가 바로 용암사지에 들어서 있던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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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가 삼한 통일을 기원하며 지었다는 영봉산 서쪽 골짜기 용암사지에는 돌부처, 석등, 사리탑만 하나씩 남아 쓸쓸한 풍경이다.

보잠산 줄기인 매화산(梅花山·140m)은 일반성면에 있는 신령한 산이다. 산은 낮아도 주변 지세가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한다. 역시 보잠산 줄기에 해당하는 작당산(鵲堂山·249m)은 까치가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 끝자락에 경남도수목원이 있다.

의령군 칠북면과 진주 대곡면 경계에는 망룡산(442m), 천황산(345m), 방갓산(381m) 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들도 자굴산 줄기에 속하는데,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오지다. 이정표나 안내표지가 없어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등산을 권하지 않는다. 이 산줄기가 남강으로 향하다가 강변에서 솟아 올린 봉우리가 송대산(松臺山·312m)이다. 정상 주변으로 산성 흔적이 있는데, 발견 당시 규모가 제법 커서 주목을 받았다. 조선 초기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는데 남강 전망이 훤해 진주로 통하는 뱃길을 장악하기에 좋은 요새였던 것 같다. 경남도 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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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건너편 강변을 따라 대나무밭이 조성돼 있다. 홍수를 막고자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비봉산 봉황을 잡아두고자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풍수사상에 의한 진주의 지형해석과 공간개조에 관한 연구>(신상화, 2005)

<조선후기 고지도에 재현된 지역경관>(최원석, 2013)

<진주의 대나무 임수와 풍수설화>(김덕현, 2010)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국토지리정보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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