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지배 정당화 위해 기획한 행사
비극적이고 굴욕적인 어가행 분석
지역민 연대의식 강화 이바지 시각도
지역 관점서 재해석·연구 필요성 제기

1909년 1월 10일 오전 11시 25분,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2대 황제 순종(재위 1907∼1910)을 태운 궁정열차가 마산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부산역에서 출발한 지 2시간 25분 만이다. 조선 건국 이래 임금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온 적은 없었다. 당시 순종을 직접 보려고 수만 인파가 마산 거리에 모였다.

같은 해 1월 순종은 두 번 전국 순행(巡行)을 떠난다. 1월 6일부터 13일까지 대구, 부산, 마산을 방문하는 남순행(南巡行), 1월 27일에서 2월 3일까지 평양, 신의주, 의주, 개성을 돌아보는 서순행(西巡行)이 그것이다. 조선 임금으로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국 순행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일제가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기획한 행사로 본다. 한편으로는 순행이 도리어 조선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민족 일체감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 5일 창원시 마산합포구청 6층 중강당에서 '마지막 황제의 마산 방문-사실과 의미 그리고 활용'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는 순종 순행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지역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실제 대구 중구에는 이 순행을 주제로 '순종 어가길'이 만들어져 있다.

지난 5일 창원시 마산합포구청 6층 중강당에서 열린 '마지막 황제의 마산 방문-사실과 의미 그리고 활용' 세미나에서 패널들이 토론하고 있다. /김훤주 기자

◇마지막 황제의 순행길이 의미하는 것

먼저 경남대 송성안 강사(전 마산박물관 학예사)는 발제를 통해 순종 마산 순행 일정을 자세히 짚었다.

순종은 2박 3일 동안 마산에 머물렀다. 황제가 순행하며 다닌 도로를 '어가(御街)길'이라 하는데, 마산은 마산역(지금 합포우체국 근처)-행재소-창원부청-행재소-마산역이다. 행재소는 임금이 궁을 떠나 머무는 곳을 말한다. 마산에서 순종은 모두 65명을 만났는데, 마산구재판소 판사인 김종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제 관리와 군인이었다. 마산 지역민을 만나는 일정은 극히 짧았고 그마저도 극소수였다. 순종은 순행 지역에 있는 단체에 하사금을 줬는데 일본인 단체가 받은 금액이 훨씬 컸다.

순행지는 주로 일제 지배와 관련된 건물과 일제가 새로 조성한 시가지였다. 순종 알현행사도 일제 관련 격려 성격이 짙었다. 당시 마산 알현행사 좌석 배치도를 살펴보면 황제 바로 다음 자리에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이토는 10일 저녁 창원 부윤 신석린이 연 환영회에서 "한국 진해만은 세계 각국에 두드러진 항만이요, 한·일 양국 방어상에 가장 필요한 곳"이라고 했다. 이때 이미 진해를 해군기지화하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일제는 1910년 진해 군항 건설 공사를 시작해 1922년 완공한다.

1909년 1월 마산을 포함한 남순행을 마친 후 다시 떠난 서순행 중 개성 만월대를 찾은 대한제국 순종황제 행렬.

당시 마산은 일제가 개발한 대표적인 항구도시였다. 일제는 마산을 군사적인 요충지로 생각했다. 하지만, 군사시설 부지로 많은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는 등 지역민의 앙심도 깊었다. 일제가 순종을 마산까지 오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송 강사는 순종 황제가 마산 순행을 하면서 충군의식, 지역민 일체감, 연대의식 조성에 이바지한 바도 있을 것이라며 실제 당시 마산 지역 사회와 주민이 순행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했는지를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마산 순행,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어 대구 시간과공간연구소 권상구 소장은 대구 순종 어가길 조성 사례를 발표했다. 대구 중구가 국비와 지방비를 합해 70억 원을 들여 지난 4월 완공한 사업이다. 1909년 1월 순종의 남순행 중 대구 지역만 주제로 했다. 실제 이 길은 조성단계부터 제법 논란을 빚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강요한 순행이었고, 독립을 지키려는 조선 의병의 투쟁을 억누르고 일제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비극적이고 굴욕적인 어가행렬을 굳이 관광상품화하는 게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권 소장은 이와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가 1월 3일경 순행을 권고한 것은 맞지만 순종 역시 대구 순행이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본다"며 "역사를 틀에 맞춰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다양한 해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 1909년 1월 순종황제 순행 행렬을 보려 모여든 평양 사람들. /국립고궁박물관 유튜브 영상 캡처

송성안 강사는 순종이 남순행을 마치고 다시 서순행을 떠난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처음 순행은 이토 히로부미 강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나 그 과정에서 순종이 무언가 느낀 바가 있어 한 번 더 결행을 하지 않았나 싶다"고 설명했다. 순행이 낳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취지다.

패널 토론에서 마산 순행과 관련한 다양한 고민이 나왔다. 대부분 조심스러워하는 모양새였다.

마산역사문화보전회 허정도 부회장은 순종이 다닌 길을 현재에 맞게 재구성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벽산블루밍아파트 입구에서 출발해 신마산 쪽으로 좌회전하다 그 당시 주변에서 가장 큰 현대식 건물이었던 일본인 전용 '마산 신상 고등 소학교', 지금의 월영초등학교를 보며 감탄했을 것이라는 식이다.

경남대 사회학과 지주형 교수는 순종 순행을 도시재생 콘텐츠로서 활용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 차라리 지역 여행 주제로 삼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창원시정연구원 김기영 관광학 박사 역시 관광자원화에는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순행길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교육 목적으로는 충분하지만 관광 측면에서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며 "순종의 순행에 부정적인 면이 없지 않은지 현재로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니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옥선 창원시의원은 "당시 마산 지역민들은 마지막 황제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를 보러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며 "그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 미래를 통틀어 리더의 역할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순행길 주변에 4·3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장소가 있는데 이를 순행과 묶어 도시재생과도 연관지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끝으로 경남대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는 "순종 순행을 지역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고, 그러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며 "그렇기에 지역 대학의 역할 또한 중요하고 자치단체의 격려도 필요하다"고 정리했다.

※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