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산 : 사방 물들인 맑고 푸른빛 그 아래 움튼 소박한 삶
밀양의 산 : 불의 맞선 기개 우직하게 솟았구나

사방 물들인 맑고 푸른빛 그 아래 움튼 소박한 삶

산청의 산

산청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 '뫼 산(山) 맑을 청(淸)'이다. 산과 강이 있는 고장으로 읽힌다. 대한민국 대표 산인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1915m)이 산청에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라는 주소도 있다. 이곳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수많은 골짜기를 타고 흘러 강으로 스며든다. '어머니 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방으로 뻗은 산줄기는 봉우리를 따라 그 아래 생명의 원천인 땅을 만들었다.

산청의 대표적 상징인 '산청 9경(九景)'의 근원 역시 산이다. 제1경인 지리산 천왕봉을 시작으로 비구니 참선 도량이 있는 대원사 계곡(제2경), 황홀한 봄 풍경이 장관인 황매산 철쭉(제3경), 왕산 자락에 있는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무덤인 구형왕릉(제4경), 적벽산·백마산·엄혜산을 따라 진양호까지 70리를 흐르는 경호강(제5경),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남사 예담촌(제6경), 지리산을 닮은 선비 남명 조식 유적지(제7경), 대성산의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그 풍경이 소금강에 비유되는 정취암 조망(제8경), 왕산과 필봉산을 한눈에 바라보는 동의보감촌(제9경)까지 산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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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쭉이 황매평원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매년 5월 초면 철쭉제가 열려 많은 사람을 불러모은다. / 유은상 기자

지명에서 보듯이 산청에는 수많은 산이 있다. 지리산 종주의 끝이자 시작인 웅석봉, 무기를 만들 쇠를 저장했다는 이름에서 유래한 둔철산, 지리산과 황매산을 조망하는 즐거움이 있는 정수산, 구형왕릉을 감싼 왕산과 필봉산, 백운동천을 굽어보며 웅석봉으로 향하는 이방산과 감투봉은 종주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산이 있어 아름다운 고장 산청에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 삶의 활력을 찾아보자.

지리산과 황매산 사이 아늑한 정취 머물다

산청 산의 제일은 단연 지리산이다.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천왕봉(1915m)이 산청군 시천면에 속한다. 하루 만에 천왕봉을 다녀오려는 이들은 시천면 중산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지리산 서북방향 끝자락인 웅석봉(熊石峰·1099m)과 왕산(王山·923m)은 산청군 중심 산청읍 바로 곁까지 다가와 있다. 지리산이야 사시사철 사람이 많지만, 산청에서도 유독 매년 5월이면 인파가 끊이지 않는 산이 있다. 산등성이를 철쭉으로 단장한 황매산(1108m)이다. 지리산을 빼면 이 황매산 산군(山群)이야말로 산청 산의 핵심이다. 경호강(남강)을 경계로 서쪽은 지리산이, 동쪽은 황매산이 우두머리를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멋지다, 꽃봉산 전망대

1700년대까지 산청(山淸)의 이름은 산음(山陰)이었다. 산음이 산청이 된 사연은 앞서 함양 편에서 한 적이 있다. 영조 43년(1767년) 산음 고을에서 7살 된 아이가 아기를 낳았는데, 왕이 이를 불길하게 생각해 음 자를 청자로 고쳐 산청으로 했다는 이야기다. <광여도>나 <해동지도> 같은 지도에는 산음으로,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산청으로 돼 있다.

옛 지도는 주로 황매산에서부터 시작해 산청 산맥을 그려내고 있다. 황매산에서 이어지는 정수산(淨水山·830m) 줄기가 산청 고을을 감싼다. 고을의 중심을 이루는 읍치(邑治)는 오늘날 산청읍 옥산리, 산청리 일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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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봉산 전망대에서 내려본 산청읍 전경. 꽃봉산 아래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 유은상 기자

조선시대 산청 고을의 진산(鎭山·나라에서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읍치 동남쪽에 있는 동산(東山)이다. 오늘날 꽃봉산(236m)을 포함한 옥산리 산 일대로 추정된다. 꽃봉산은 따로 화봉산, 화점산, 삼봉이라고도 불렸다. 함양 덕유산에서부터 지맥이 이어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동산에서부터 산줄기를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결국 덕유산에 가 닿는다.

꽃봉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옛 진산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정상에 오르면 탄성이 나올 만큼 산청읍 일대가 시원하게 보인다.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달리다 산청읍 주변을 지나다 보면 꽃봉산 정상에 환하게 조명을 한 누각을 볼 수 있다. 꽃봉산 전망대다. 이곳에서 산청읍은 물론 경호강과 그 주변을 둘러싼 명산을 두루 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강변으로 경지 정리가 잘 된 농지와 그 너머 웅석봉이 우뚝하다. 서남쪽으로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것으로 알려진 돌무덤이 있는 왕산과 필봉산(858m)이 뾰족하다. 특히 해 질 녘 필봉산 뒤편으로 넘어가던 해가 비스듬히 햇살을 산청읍내로 비추는 모습은 장관이다. 북쪽으로는 고을을 휘감아 도는 경호강의 흐름이 선명하다. 동쪽으로 황매산이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지맥이 첩첩이 고을을 향해있는 게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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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봉산 오르는 숲길 신록이 눈부시다. / 유은상 기자

적벽에 배를 띄우고, 백마를 바라보다

오늘날 산청군 단성면, 신등면, 신안면, 생비량면 일대는 조선시대 산청과 별도로 '단성'이란 고을이었다. 더러 산청과 합쳐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 읍치는 단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고려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숨겨와 우리 의생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문익점(1329~1398). 그가 장인 정재익에게 목화씨를 처음 키우게 한 곳이 단성 고을, 정확하게는 지금 단성면 사월리다. 현재 문익점 면화시배지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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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성 내산. / 유은상 기자

단성 고을의 진산은 읍치 북쪽에 있는 내산(來山)이다. 지금 단성초교 뒷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야트막하고 그리 볼품이 없어 그런지 지금은 별다른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단성초교 자리가 바로 옛 단성 고을 읍치에서도 중심이었다. 옛 문헌은 내산이 저 멀리 지리산에서부터 지맥을 끌어온다고 기록했다. 앞서 산청 고을에는 덕유산 정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단성 고을은 지리산 정기가 맺히는 곳이니 결국, 지금 산청은 지리산과 덕유산의 정기를 모두 받아 안는 지역이라고 하겠다.

대부분 옛 지도에서 읍치 동쪽 경호강(남강) 건너에 '적벽(赤壁)'과 '백마산(白馬山)'을 표시하고 있다. 지금 지명으로도 적벽산(166m)과 백마산(286m)이다. 적벽은 강변으로 붉은 바위 더미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것 같아 붙은 이름이다. 사실 중국에 있는 적벽이란 지명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중국 적벽에서 놀며 <적벽부>를 지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선비도 이를 따라하며 경호강에다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한다. 심지어 적벽산 바로 앞 경호강을 적벽강이라고도 불렀다. 그야말로 조선시대 선비의 명소가 되겠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주자학 대가인 우암 송시열이 바위에 새긴 '赤壁'이란 글자가 아직 남아 있다. 글자가 제법 크다 해도 절벽이 워낙 넓어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적벽산에서 경호강 상류 방향으로 바로 이어져 있는 산이 백마산이다. 정상에 삼국시대 지은 산성이 있다. 그래서 강산성(江山城), 단성산성(丹城山城)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심리전으로 왜적을 물리친 곳이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남해의 전세를 살피는 길에 이 산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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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강에서 바라본 백마산. / 유은상 기자

산을 만들다, 조산(造山)

옛 산청 고을 지도 중 <해동지도>에는 읍치 남쪽으로 '조산(造山)'이란 산 이름이 나온다. 조산은 그야말로 산을 만드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산 문화의 독특한 부분이다. 주로 겨울의 찬 바람을 막거나, 흉한 모습을 가리거나, 풍수적으로 부족한 게 있으면 보충하려고 조산을 만든다. 산청 읍치에 있는 조산은 풍수적으로 허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만든 것이다. 현재 산청군청 뒤로 이어진 조산공원이 옛 지도에 나오는 조산이다.

산이라 할 수는 없지만, 조산 개념으로 만든 것이 또 있다. 산청읍 내수마을 입구에 있는 돌탑 두 개다. 마을 입구 도로 양편으로 한 개씩 세워져 있다. 주민은 이를 할머니, 할아버지 당산이라고 부른다. 이 돌탑은 마을 입구를 막아 산줄기를 타고 마을로 내려온 정기가 빠져나가지 못 하게 세운 것이다. 하지만, 마을 주민은 그저 좋은 일 생기라고 비는 곳,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예전에는 섣달그믐 새벽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월 대보름 새벽 5시에 지내고 있다고 한다. 내수마을이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이 정수산이다. 옛 지도에는 척지산(尺旨山)이라 돼 있다. 이 산속에 '개구리골'이라는 동굴 피난처가 있다. 공조판서를 지내던 달성 서 씨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다가 정착해 지금 내수마을을 이뤘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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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호강에서 바라본 백마산. / 유은상 기자

기암괴석에 푸른 소나무까지 한국화 그려놓았네

'경남의 산' 취재는 산행과 촬영, 기사 작성 등 쉽지 않은 작업의 연속이다. 하나 황매산(黃梅山·1108m)은 달랐다. 언제 가도 좋은 산, 다시 가보고 싶은 산이라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고민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산은 대체로 지역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이런 까닭에 '이 산을 어느 지역에 포함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항상 뒤따른다. 황매산은 더 그랬다. 황매산은 산청군 차황면과 합천군 대병면, 가회면의 경계에 있다. 더욱이 황매산은 주요 등산로가 합천군에 있어 합천의 산으로 더 알려졌기 때문이다.

산청, 함양, 하동을 아우르는 지리산은 첫 회에서 따로 떼어 소개했고 앞으로 합천편에서는 가야산과 매화산 등을 소개할 계획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300개 명산 중에 가보고 싶은 산 11위 황매산을 뺄 수도 없다. 부득이 산청편에서 싣게 됨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당부드린다.

영남의 금강산

모산재(767m)는 황매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줄기 끝에 형성된 산이다. 따로 떼어 산이나 봉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산 전체가 웅장한 바윗덩어리로 형성돼 있지만 특이하게 '높은 산의 고개'라는 뜻의 '재'로 불리고 있다. 산 아래 사람들은 잣골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성스런 바위산'이란 뜻의 영암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 산객은 모산재 아래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입구 울타리에는 수천 개 산행 리본이 매여 있어 얼마나 사랑을 받는 곳인지 깨닫게 된다.

소나무 숲길을 잠시 오르다 보면 곧장 화강암 바위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후 로프구간이 이어지고 다시 직각에 가까운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예열이 덜된 몸이 부담을 느끼며 거친 숨과 굵은 땀방울을 쏟아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힘겨움은 스릴로 변해 산행의 묘미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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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산재 돛대바위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 장쾌한 기암괴석 너머로 시원한 전망이 펼쳐진다. / 유은상 기자

고단함은 잠시, 몸이 했던 고생은 이제 눈이 보상받게 된다. 계단 끝 돛대바위에서 마주하는 탁 트인 전망은 가슴 깊이 시원한 바람을 불어 넣는다. 수직으로 쭉쭉 뻗은 기암괴석은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하고 푸른 소나무까지 어우러지면 한 폭의 한국화가 따로 없다. 이에 모산재는 설악산이나 금강산의 기암괴석을 옮겨놓은 듯 험준하고 장쾌해 '영남의 금강산' 또는 '소금강'으로도 불린다.

모산재 정상부에 조금 못 미친 곳에는 우리나라 제일 명당으로 알려진 무지개 터가 있다. 안내판은 풍수지리상 용이 승천하는 지세로 묘를 쓰면 자손 대대 부귀영화를 누리는 반면 온 나라가 가뭄으로 흉작이 든다 해 아무도 묘를 쓰지 못한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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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산재 정상에서 본 돛대바위 쪽 풍경. / 유은상 기자

모자람 없는 산

황매산은 정상에 올라서면 발아래 펼쳐진 평원과 산자락이 활짝 핀 매화꽃 잎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 아래쪽 모산재는 암석 지형이지만 700∼900m 지대에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정상인 황매봉은 다시 그 위에 300m가량의 뭉툭한 산을 얹어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황매산은 기대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며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특이한 지형 덕에 장쾌한 기암괴석과 바위산을 오르는 짜릿한 재미, 시원한 초원의 풍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다. 당연히 조망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정상에 서면 멀리 지리산과 웅석봉, 왕산, 필봉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정상 북동쪽으로 연결된 삼봉이나 중봉 쪽에서는 합천호의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황매산은 또 계절에 따라 다양한 메뉴를 내놓는다.

봄 산은 아무래도 꽃이다. 특히 황매산은 철쭉으로 유명하다. 5월 초에는 합천 쪽 아래 능선이 붉게 물들고 일주일쯤 뒤에는 그 위에 자리 잡은 산청 쪽 능선으로 불길은 옮겨간다. 그 면적이 만만찮을 뿐 아니라 황매산 능선의 아름다운 곡선미 덕에 더 장관이다.

인파를 피해 평일을 골라 올랐지만 헛수고였다. 붉은 철쭉이 반사된 때문인지 경치에 감탄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인지 산객들 얼굴 대부분은 홍조를 띠었다. 탄성 또한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철쭉제는 오는 14일까지 열린다.

철쭉 덕에 황매산은 봄이 더 유명하지만 사실 사계절 언제라도 좋다.

여름이면 푸른 숲과 녹색 융단을 깐 평원에 서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가을이면 이곳은 억새 명소로 탈바꿈하고 겨울이면 흰 눈이 수북한 겨울 왕국으로 변한다. 누군가 황매산 설경을 하얀 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청순한 신부 모습이라 표현했다.

황매산은 접근성 또한 뛰어나 자동차로도 750m 고지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평원은 예전에는 목장으로 사용됐지만 주차장으로 바뀌면서 길은 더 좋아졌다. 등산이 아니어도 또는 특별한 계획 없이 들러도 무방하다. 아니 그냥 기대 없이 찾았다면 더 큰 횡재를 하는 셈이다.

뛰어난 경치와 접근성 덕에 산은 오래전부터 영화·드라마 촬영지로도 각광받았으며 최근에는 캠핑족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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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듬직하게 솟은 웅석봉이 유유히 흐르는 경호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 유은상 기자

곰을 닮은 산? 곰이 죽은 산?

웅석봉(熊石峰·1099m)은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와 산청읍 내리, 삼장면 홍계리에 걸쳐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줄기가 중봉∼하봉∼새재∼깃대봉∼밤머리재를 지나 다시 우뚝 솟아 형성된 산이다. 지리산 줄기이면서도 지리산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산으로 알려졌다. 산세와 조망이 뛰어나 등산객 발길이 이어지면서 1983년 산청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웅석봉은 산꼭대기가 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청읍 쪽에서 보면 서쪽에 병풍처럼 웅장한 산세가 펼쳐져 있다. 반대로 산 정상에서 북쪽은 깎아지른 낭떠러지로 돼 있다. 산세가 험해 곰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계곡 또한 깊어 가뭄이 든 해에는 이 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옛 이름은 유산(楡山)으로 <조선지도>, <1872년 지방지도>, <광여도> 등에 표기돼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우리말로 곰석산으로 표기돼 있으며 주민도 곰석산, 곰바위산으로 불렀다.

산 정상에서는 천왕봉은 물론 왕산, 황매산, 가야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로는 산청읍 시가지가 펼쳐지고 경호강이 휘돌아 흐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가을이면 빨간 단풍이 온산을 물들이며 사람을 불러 모은다.

북사면 지곡 아래에는 통일신라시대 응진이 창건한 지곡사가 있다. 선종 5대 산문 중 하나였으며 산청의 대표 사찰로 <신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다. 등산로는 지곡사에서 오르는 것과 밤머리재에서 오르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불의 맞선 기개 우직하게 솟았구나

밀양의 산 

밀양은 경남의 북동부에 자리 잡은 내륙도시로 창원, 울산, 부산, 대구를 모두 잇는 영남의 교통중심지다. 낙동강과 밀양강을 마주한 남쪽을 제외한 동·북·서 삼면이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그 위세가 경남의 어느 지역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가지산, 천황산, 재약산, 운문산의 위엄은 밀양 산의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더해 경북 청도와 경계를 짓는 곳에 우뚝 솟은 화악산은 밀양의 진산으로 삭풍(朔風)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산이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高峰)이 즐비한 만큼 골짜기도 깊어 맑은 물이 사철 넘치는 곳 또한 밀양이다. 풍부한 일조량과 비옥한 토지는 최고 품질의 농산물로 보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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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산(재약산 사자봉) 정상에서 재약산 수미봉으로 향하는 길. 발아래 넓디넓은 사자평에 싱그러운 ‘신록’이 융단처럼 깔렸다. / 유은상 기자

밀양은 일제(日帝)에 맞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 투쟁의 산실이었다. 김원봉·윤세주 선생의 의열단 투쟁, 3·1 운동, 임시정부 참여, 군자금 모금, 광복군 활동 등 유독 밀양 출신 독립투사가 많은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높은 기개는 장엄한 밀양의 지형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산을 닮은 우직함이 있었기에 일제의 갖은 만행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독립만 생각했을 것이다.

밀양시 초동면 방동마을에서 출발해 방동고개~종남산~덕대산~남산리로 내려오는 '종남산~덕대산 구간(4시간 소요)', 산내면 송백리 산내초교~가라마을~구만사~구만폭포~구만산~봉의저수지~인곡으로 내려오는 '구만산 산행(5시간)', 원점 회귀가 가능한 산내면 석골마을~석골사~억산~문바위~수리봉~석골사로 이어지는 '억산 산행(4~5시간)'도 영남 알프스 못지않게 밀양 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등산 코스다.

터전 만든 줄기마다 사연 가득한 밀양의 산

밀양은 낙동강이 흐르는 남쪽을 빼면, 동·북·서쪽 모두 명산을 울타리로 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가지산에서 시작해 남으로 천황산, 재약산, 향로산, 금오산, 천태산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경북 청도, 울산 울주, 양산과 경계를 이루며 낙동강에 이른다.

북쪽으로는 가지산에서 뻗어 나간 줄기가 운문산, 억산, 구만산, 육화산까지 이어지다 밀양강을 건너 화악산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청도와 경계를 이루는 산 무리다. 서쪽으로는 천왕산에서 시작해 열왕상, 영취산, 종암산으로 이어지면서 낙동강을 만난다. 이는 창녕과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해가 잘 드는 낙동강 주변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이렇게 우람한 산이 사방을 두르고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었으니 밀양은 예로부터 따뜻하니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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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강 옆에 자리 잡은 아동산(영남루가 있는)과 왼편 아북산. 그 뒤편으로 추화산이 맥을 잇고 있다. / 유은상 기자

시·군 경계 이뤄

밀양 경계를 이루는 산 중 으뜸은 아무래도 가지산(加智山·1241m)과 운문산(雲門山·1195m), 천황산(天皇山·1189m), 재약산(載藥山·1108m) 산군이 되겠다. 태백산맥의 끝자락에서 이어진 지맥이다.

요즘에는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며 종주 코스가 유명하다. 이 중 가지산이 가장 높아 주봉(主峰)이 된다. 가지산은 옛날에는 석남산(石南山), 실혜산(實惠山), 시례산(詩禮山) 등으로 불렸다. 석남산은 산 중턱에 있는 석남사란 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실혜산과 시례산은 밀양 얼음골에 있는 마을 이름 '시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가지산은 '까치산'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 하는데, 석가의 지혜를 뜻하는 '가지(迦智)'와 비슷해 가장 널리 쓰였다고 한다. 가지산에서 얼음골로 건너가기 전 봉우리가 백운산(白雲山·885m)이다. 산 전체가 거대하고 하얀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 흰 구름처럼 보인다며 붙은 이름이다. 특히 산 정상 아래 하얀 호랑이가 웅크린 것처럼 드러난 백호 바위가 유명하다. 백호 바위가 마주 보는 산이 얼음골이 있는 천황산, 재약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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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진산 화악과 송전탑. / 유은상 기자

밀양과 경북 청도의 경계가 되는 운문산은 영남알프스에 속한 산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천황산 정상에서 맞은편으로 운문산을 보면 그 뒤로 억산(億山·954)이 숨은 듯이 보인다. 이름 그대로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많고 많은 산만 보인다. 억산에서 육화산, 구만산으로 연결돼 계속해 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밀양 진산, 화악산과 그 산맥

밀양은 조선시대와 지금이나 그 경계가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동래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주 큰 고을이었다. 고을의 중심이 되는 읍치(邑治)는 지금의 내일동 주변이었다. 현재 밀양부 관아가 복원돼 있어 읍치 위치를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밀양 고을의 진산(鎭山·나라에서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화악산(華岳山·932m)이다. 이 산은 밀양 북쪽 지역에서 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화악산 정상 주변 세 개의 봉우리가 중국의 오악(五嶽) 중 하나인 서악(西嶽) 삼봉(三峯)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서악의 다른 이름 화악(華嶽)을 그대로 가져와 이름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지도에는 '둔덕산(屯德山)'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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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북산 정상에 있는 돌무더기. / 유은상 기자

화악산에서 두 줄기 산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리는데, 한 줄기는 종남산을 지나 하남읍 덕대산으로 이어진다. 다른 한 줄기가 읍치 쪽으로 뻗는데, 옥교산(玉轎山·538m)을 지나 추화산(推火山·243m)까지 이어진다. 밀양 읍치는 바로 이 추화산 아래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추화산이 실제 진산 노릇을 했지 않았나 추정한다. 옛 기록을 봐도 추화산은 작은 진산으로 불렸다. 또 정상 주변에 추화산성이 있어 유사시에 고을 주민이 대피할 수 있었다.

추화산에서 '추화'란 이름은 밀양의 옛 이름 미리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다. 미리벌은 밀불, 밀벌이라고도 하는데, 밀 추(推)자와 불 화(火) 자를 써서 적었다고 해석한다. 화악산과 추화산을 연결하는 산이 옥교산이다. 이 산이 밀양 시내를 굽어보고 있어 현대적인 진산이라 하겠다. 옥교산은 정상이 가마같이 생긴 봉우리라고 하여 가마 교(轎)를 썼다. 이 산에는 선녀가 옥가마(玉轎)를 타고 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우리나라 창조신 격인 마고 할미 전설도 있다. 마고 할미가 낙동강을 건너 화악산으로 가다가 오줌이 누고 싶었다. 옥교산 정상 근처 병풍바위와 탕건바위에 한 다리씩 딛고 오줌을 눴는데, 이 때문에 옥교산 정상이 팼다는 이야기다.

읍성을 이은 산과 그 주변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아동산(衙東山·87m)과 아북산(衙北山·118m)은 옛날 밀양읍성을 이루던 산이다. 아동산은 밀양읍성 관아(官衙)의 동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 산자락에 보물 제147호 영남루가 있고, 밀양읍성도 복원해 놓았다. 아북산은 아동산과 마찬가지로 관아 북쪽에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산 중턱에 밀양여고가 있고, 정상 주변에 체육공원이 있다. 정상에 오르면 밀양 시내와 그 너머 옥교산, 화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풍수적으로 보면 밀양시 부북면에 있는 종남산(終南山·663m)이 안산이 되겠지만 거리가 너무 멀다. 옛 지도를 보면 읍치에서 밀양강 바로 건너에 율림(栗林)이란 숲이 있다. 지금 삼문동 지역이다. 이 숲이 실제로 안산 노릇을 했다. 기록을 보면 밀양 읍치 아래로 흐르는 밀양강 동쪽 용두산과 서쪽 마암산이 두 마리 용이고, 영남루 주변이 구슬인데, 두 용이 하나의 구슬을 다투기에 이 기운을 다스리려고 율림으로 조산(造山·산을 만듦)을 했다고 한다.

또 밀양강이 삼문동을 한 바퀴 돌고 내려간 반대편 강 건너에 장림(長林)이란 숲도 있었다. 율림과 장림은 풍수적으로 허한 곳을 막는다는 것 말고도 현실적으로 하천 범람을 막는 기능도 했을 것이다. 현재 두 숲 모두 흔적을 찾기 어렵다.

독특한 이야기가 깃든 산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경주산(慶州山·213m)은 옛날에는 경주산(競珠山)이라고도 불렸다. 우선 경주산(慶州山)이라고 할 때, 경주는 실제 경북 경주를 말한다. 옛날 마고 할미가 경주에 있는 산을 등에 지고 밀양으로 오다가 짐 끈이 풀려서 산이 그 자리에 떨어졌다. 그게 경주산이다. 후에 경북 경주 사람이 전설을 핑계로 해마다 산세(山稅)를 받으러 왔다고 한다. 이 지역에 살던 한 할머니가 손자를 업고 산세 낼 돈을 꾸러 다니다가 이 손자가 훌륭한 아이디어를 낸다. 경주 사람에게 우리는 이 산이 필요 없으니 와서 다시 가져가라고 한 것이다. 그 후로는 경주 사람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주산(競珠山)에서 이때 경주는 한자 그대로 구슬을 두고 다툰다는 뜻이다. 이 산을 둘러싼 용암산(龍岩山)과 용회산(龍回山) 등 주변 6개 봉우리가 마치 용처럼 생겼는데, 이 용들이 구슬처럼 동그랗게 앉은 경주산을 빼앗으려 서로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만어산(萬魚山·670m)만큼이나 환상적인 전설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삼국유사> 중 어산불영설화(魚山佛影說話)에 전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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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산 정상은 시원한 전망이 압권이다. 눈높이에 맞춰 시원한 하늘이 열리고 그 아래로
영남 알프스 준봉들이 경계를 이루며 사방으로 쭉 이어진다. / 유은상 기자

수로왕이 가락국을 세우고 다스리던 시절 옥지라는 연못에 살던 사악한 용과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불교에서 말하는 사람 잡아먹는 귀신)가 연애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졌다.

그러기를 4년, 보다 못한 수로왕은 주술로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부처에게 설법으로 이들을 교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나찰녀는 불교에 귀의하고, 사악한 용은 물론 동해에 사는 용과 물고기들도 설법에 감동해 만어산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만어사 앞 커다란 돌무더기 '어산불영' 전설이다.

주민 9만 명 안은 산

밀양시 산내면과 청도군 매전면의 경계를 이루는 구만산(九萬山·785m)은 임진왜란 때 주민 구만 명이 이 산으로 피난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밀양시 산외면에 있는 낙화산(落花山·626m)에도 임진왜란과 관련한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민씨 성을 가진 부인이 붉은 옷을 입고 이 산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왜군의 추격은 끈질겼다. 더는 피할 곳이 없던 부인은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고 만다. 그 모습이 한 송이 꽃이 떨어지는 듯했다고 해 낙화(落花)란 이름이 붙었다.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골짜기에 정승동이란 마을이 있다. 지금은 펜션이 여럿 들어섰지만, 원래 밀양에서 전기가 가장 늦게 들어간 오지 마을이다. 지금도 들어가기가 만만치 않다.

이 골짜기에서 볼 때 가장 높은 봉우리가 실혜산(828m)이고 바로 옆이 정승봉(政丞峰·803m)이다. 흥선대원군 시절 천주교 박해를 피해 한 정승이 식솔을 이끌고 이 골짜기로 들어왔다. 정승봉 아래서 도자기도 굽고 교의도 퍼트리며 살았는데 그것이 지금 정승동이 됐다.

깊은 산 속 드넓은 땅, 갈 곳 없는 이 넉넉히 보듬어

밀양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높은 산맥이 거대한 병풍을 이루고 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밀양강이 되어 지역을 유유히 휘감아 흐르다 남쪽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밀양강과 낙동강은 오랜 시간 비옥한 토양을 축적해 너른 평야를 펼쳐 놓았다.

산과 강, 평야 그냥 구색만 갖춘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당당하고 빼어나다. 이들은 인간의 눈에는 대립적이고 경쟁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잘 어우러져 온갖 생명을 키워냈다. 그 혜택은 사람에게로 돌아왔고 결국 산과 강은 사람을 키웠다. 그러니 밀양은 천혜의 땅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풍요의 시작은 밀양의 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영남 알프스'는 밀양의 대표 산맥이지만 경남은 물론 영남, 더 넓게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하다.

시원한 전망, 기암괴석 압권

구름과 눈높이를 맞추는 산 그 아래 산지 평원이 하염없다. 우리나라 일반적인 산악지형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 때문에 유럽의 알프스에 비유되면서 '영남 알프스'로 불린다.

영남 알프스 넓은 품은 지리산 영역에 필적할 만하다. '3도 5군의 산' 지리산처럼 영남 알프스도 경남 밀양시·양산시, 경북 청도군·경주시, 울산시 울주군 등의 3개 시·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다. 최고봉인 가지산을 비롯해 천황산, 재약산, 운문산, 신불산, 간월산, 영축산, 고현산 등 1000m가 넘는 7개 산군이 주축을 이루며 연결돼 있다.

밀양시 단장면·산내면과 울산 울주군 상북면에 걸쳐 있는 천황산(天皇山·1189m)은 영남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사자평과 어우러져 영남 알프스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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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산 정상 능선 하늘정원길. 뒤편으로 운문산과 가지산이 보인다. / 유은상 기자

일제강점기 천황을 숭배하고자 만들어진 명칭이라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에 밀양시는 '우리 이름 되찾기' 운동의 하나로 재악산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국가지명위원회에 올렸지만 2015년 부결됐다. 16세기 후반 고지도에 천왕산으로 표기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천황산은 '재약산 사자봉'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제 이름 찾기 시도 탓에 혼란을 빚기도 했지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는 높게 살 만하다.

천황산 정상은 시원한 전망이 압권이다. 눈높이에 맞춰 시원한 하늘이 열리고 그 아래로 영남 알프스 준봉들이 경계를 이루며 사방으로 쭉 이어진다. 북쪽으로 운문산과 가지산이, 동쪽으로 간월산·신불산·영축산이, 서쪽으로는 화악산과 창녕 화왕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도심의 미세먼지로 더럽혀진 눈과 가슴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발아래에는 초록의 평원이 납작 엎드리고 있지만 오히려 그 선명함은 하늘과 경쟁하는 듯하다.

남쪽으로 길을 잡아 발길을 옮기면 천황재를 지나 재약산(載藥山·1108m) 정상에 어렵지 않게 도달한다. 재약산 정상은 '수미봉'으로도 불린다. 재약산은 신라의 한 왕자가 샘물을 마시고 병이 나아 '약이 실린 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수미봉은 천황산 정상과 달리 쭉쭉 솟은 기암괴석이 각각의 생김새를 뽐낸다. 서쪽으로는 깎아진 절벽이다. 역시 정상에 서면 동남쪽 발아래로는 넓디넓은 사자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천황산과 재약산에 붙은 '삼남금강', '외유내강의 산'이라는 수식어가 쉽게 이해된다. 산 안에는 고산 평원의 부드러운 산세를 하고 있고 그 바깥쪽 테두리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돼 있다. 깊은 산속에 상상하지 못했던 넓은 평지와 공존하기 어려울 것 같은 수려한 바위가 함께 하면서 그 감동은 배가된다.

이 밖에도 산이 품은 흑룡폭포, 층층폭포, 금강폭포, 표충사, 얼음골과 깊은 계곡, 싱그러운 숲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힘겨운 삶 품었던 사자평

험준한 산 속에 펼쳐진 평원, 몹시 이국적이다. 앞에서 말했듯 영남 알프스의 비교우위 품목은 뭐니 뭐니 해도 고산 평원이다. 영남 알프스에는 넓은 평원이 곳곳에 있다. 신불산과 취서산 사이의 신불평원이 약 200만㎡(60만여 평), 간월산 밑과 간월재에 약 33만㎡(10만여 평), 고헌산 정상 아래 70만㎡(약 20만여 평)의 억새가 피는 평원이 있다.

특히 샘물상회에서 시작해 천황산 정상 동쪽을 돌아 재약산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사자평은 평균 해발 800m 고지 400만㎡(120만여 평)에 이른다. 전국 최대 규모다. 산 아래 웬만한 들판보다 더 넓은 고산 평원, 처음 보는 이들이 감탄하고 그 매력에 빠져 다시 찾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사자평 이름에서 동물의 왕 '사자'를 연상하지만 넓은 들판을 뜻하는 우리말 '사'와 산의 옛말 '자'의 합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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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골 케이블카. / 유은상 기자

이곳 평원은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수련장으로,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의 승병 훈련장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예전부터 억새밭은 아니었다.

사실 억새평원은 사람이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스키장을 만들고자 숲을 베어냈지만 강설량이 적어 백지화하면서 훼손만 시켰다.

그 이전 조선 말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고, 한국전쟁 후에는 빨치산이 활동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그 뒤로는 살길 없었던 백성이 이곳에 기대어 거친 삶을 풀어나갔다. 하나둘 모여든 민초들이 밭을 일구고자 불을 질러 숲을 없애면서 지금의 평원이 형성됐다.

우수한 목초지 덕에 목장도 들어섰다. 한때 이곳에는 화전민 80여 가구가 살았고 이들 자녀를 위해 1966년 고사리분교가 지어졌다. 또 등산객이 늘어나면서 흑염소 요리, 닭백숙 식당도 생겨났다. 하지만 학교는 30년간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7년 폐교됐고 식당도 동물 살생과 계곡 오염 등을 우려한 땅 소유주 표충사의 퇴거 요청에 소송 끝에 1999년 철거됐다.

아직도 이곳에는 학교터와 화전민이 살았음을 짐작할 만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동안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축복의 땅이었던 사자평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전국 최대 억새밭은 조금씩 키 작은 나무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다소 실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 또한 자연의 순리다. 아낌없이 내어주고 상처 입은 몸을 스스로 회복해나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고마움과 자연이 주는 교훈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여전히 자신의 편익을 위해 작은 힘을 과신하면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며 살고 있다.

천황산 재약산에서도 안타깝게 그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멀리 산자락 사이로 연결된 흉물스러운 756㎸ 송전탑과 거추장스러운 얼음골 케이블카가 눈을 찌른다. 기사를 보고 사람이 산을 찾는 것 또한 훼손에 동참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하산하는 발걸음이 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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