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말을 거네…'일희일비'말고 뚜벅뚜벅 나아가소
머물던 기억들 하나씩 기차를 타고 떠나던 그곳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

거제 장평동에 최근 입주를 시작한 주상복합 건물이 보인다.

49층짜리 건물은 조선업 경기 악화 흐름과 무관하다는 듯 하늘을 찌르고 섰다. 주변 풍경은 거대한 마천루에 눈길을 빼앗겨 더욱 생기를 잃는다.

장평동에서 다시 차로 20분가량을 달렸을까. 마을을 품은 동산(141.7m)이 보이고, 정상에는 살며시 솟은 정자 하나가 객을 반긴다. 거제면 동상리다.

동상리에는 옛 거제현 관아 흔적이 남아있다.

거제현 관아 건물 하나인 '동헌'은 헐리고 그 자리에 면사무소가 들어섰지만, 부속 건물이었던 '질청'과 '기성관'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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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청 담벼락을 따라 마을을 찾은 손님 발길이 이어진다. / 최환석 기자

옛 거제는 왜구 침략이 잦았다. 조선 초기 7곳에 군사기지를 세운 까닭이다.

1470년 거제현은 부로 승격했다. 몸집이 커지면서 일반 행정과 군사 업무를 함께 보게 됐다. 그때 고현성에 세운 건물이 기성관이다. 행정·군사를 함께 책임지는 거제부 관아 중심 건물이었던 셈이다.

시간이 지나 1593년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생겼고, 기성관은 본래 목적을 잃었다. 대신 객사로 모습을 달리했다.

우여곡절도 겪었다. 임진왜란 당시 고현성이 함락되자 기성관은 불타버렸다. 1663년 현재 위치로 옮겨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기성관은 다시 1976년 완전히 해체했다가 복원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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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성관. / 최환석 기자

기성관 뒤로는 화강석 벽면이 독특한 석조 건물이 자리한다. 등록 문화재 제356호 거제초등학교 본관 건물이다.

건축면적 886.8㎡, 전체면적 1764.7㎡ 규모. 지난 1956년 6월 다 지어졌고, 만으로 60년 세월을 품었다.

거제초교는 지난 1907년 개교했다. 110년, 켜켜이 쌓인 시간의 숨결은 가늠하기도 어렵다.

처음에는 가정집 온돌방이 학교로 쓰였다. 1911년부터는 기성관을 교사로 수리해 사용했다. 그러다 1956년 정부지원금 얼마와 지역주민의 헌금을 합쳐 비로소 본관을 세우게 된다.

주민들은 학교를 세우는 데도 함께 했다. 화강석을 채석하고, 가공하고, 옮겼다. 붉은벽돌을 찍어내고, 마찬가지로 실어날랐다.

말없이 아늑한 석조 건물에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역공동체가 함께 학교를 세웠다는 깊은 의미가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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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초등학교 본관 건물. / 최환석 기자

기성관 내부를 돌아 다시 문을 나서면, 왼쪽 비스듬한 정면에 질청 건물이 있다. 지방 관청 하급 관리가 사무실·서재로 썼던 건물이다.

현재는 'ㄷ' 자 형태이나, 옛 거제현 지도에는 'ㅁ' 자 형으로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로와 맞닿은 부분이 사라진 듯하다고 전해진다.

질청과 기성관, 거제초교 본관처럼 동상리는 과거와 근현대의 모습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양귀비꽃이 정원 한쪽을 장식한 천주교 마산교구 거제성당이 있고, 그 뒤로는 반쯤 허물어진 건물이 자리한다.

거제성당은 고즈넉한 모습과 넓은 품에서 포근한 기운이 전해진다. 폐건물은 언뜻 생을 다한 외양이지만, 그 앞에 누군가 작물을 기르고 외벽을 덩굴이 따뜻하게 품어 고른 숨을 이어가는 모습이 평온하기만 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양쪽으로 나무가 지켜선 길이 나 있다. 길가에 놓인 비석에 빨간 글씨로 '향학로'라 쓰여 있다. 나무가 내어준 시원한 그늘을 따라 끝에 다다르면, 거제여자상업고교가 있다.

학교와 맞닿은 곳에 '반곡서원'과 암자 '세진암'이 있다. 거제초교·기성관·질청이 가까이 있듯, 이곳 또한 어울림이 유사하다.

향학로가 나 있는 까닭을 반곡서원에서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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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귀비꽃이 정원 한쪽을 장식한 거제성당. / 최환석 기자

반곡서원은 1704년(숙종 30년) 거제 유림 윤도원·옥삼헌·김일채·윤명한·허유일·신수오 등이 문정공(文政公) 우암 송시열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뒤를 이어 죽천 김진규, 몽와 김창집, 학공 이중협, 민진원, 김수근이 추가로 배향됐다.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부침을 겪었으나, 1906년 거제 유림에서 서원 옛터에 제단과 반곡서원유허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 단제를 봉행하면서 맥을 이었다.

1971년 거제향교 전교 윤병재가 복원을 발의, 유림총회 찬성을 얻으면서 다시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1974년 우암사를 중건하고 인접 지역 고택 3채를 철거하면서 나온 부재로 강당을 보수했다. 지금 모습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한 복원 사업 영향을 받았다.

바로 옆 세진암은 거제 유일 전통사찰로 지정된 곳이다. 1902년 창건했다 전해지나, 전신은 더 오래전 계룡산 뒤 '뒷메'라는 마을에 있었다고 구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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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진암 대웅전. / 최환석 기자

규모는 소박하나, 정취는 깊이를 이루 말할 수 없다. 대웅전 불단에 경남 문화재 자료 제325호로 지정된 '목조여래삼존불좌상'을 모시고 있어서다. 300년가량 전 고성군 하이면 옛 절터에서 옮겨왔다. 높이는 1m가 채 안 되지만, 영롱함은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문득 장평동에서 만난 마천루를 떠올린다. 주변을 잠식하는 풍경은 아무런 감정도 전하지 못했다.

옛것과 지금의 것이 한 데 어울리는 동상리 풍경은, 하늘에 도전하는 인간의 욕심 앞에 소중한 물음을 던진다. 또한, 오르락내리락하는 경제 지표에 '일희일비' 말고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으라고 다독인다.

이날 걸은 거리 1.6㎞. 1777보.

밀양 삼랑진읍

휘슬소리 끊으며/전라행 막차는 가고/목이 긴 내 그리움도 그때/창백한 진주로 간다//상좌처럼 기다리던 사람이 개찰을 하면/마가목 우듬지 저녁별 머리 이고/머물던 기억들 하나씩 기차를 타고 떠난다//허물어져 먼 거리의/아름다운 사랑들아/나는 또 눈뜨고 꿈꾸는 사공이 되어/도요새 발자국 찾아 모래 강을 저어간다

경전선 철도역 하나인 밀양 삼랑진읍 낙동강역은 푸른 젖줄을 목전에 끼고 1906년 12월 12일 영업을 시작했다.

저마다 소망을 이고 달리는 기차가 숨을 고르던 역은 2004년 이후 가까운 삼랑진역 정차 횟수가 증가하면서 역할이 퇴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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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에서야 온전한 모습을 갖춘 옛 낙동강철교. 지금은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 최환석 기자

2010년 1월 4일을 기점으로 낙동강역에 기차는 서지 않았고, 그해 11월 12일 퇴역한 역사 또한 사라졌다.

역이 있던 자리에는 시인 문희숙이 쓴 '낙동강역에서'가 새겨진 철판만 덩그러니 남았다.

둔치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철교 여럿을 아로새긴 모습이다. 긴 다리로 강을 성큼 건너는 철교의 덩치가 새삼 놀랍기만 하다.

언덕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바람개비가 비틀거린다. 색색의 바람개비는 자신이 누구를 반기려는지도 모르고 고개만 무심히 돌리고 있다.

강변을 따라 놓인 나무 갑판은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 흔한 모습이다. 나무 갑판과 바람개비를 시선에서 떼어놓자 자연 그대로의 낙동강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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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저 낙동강철교로 불렸던 다리. 1905년 준공됐다. 철도 역할을 마친 철교는 지금도 차도로 사용된다. / 최환석 기자

철교 아래에 자연스레 그늘이 생기자 집 떠난 오리 한 마리가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한다. 유유자적한 자태를 조용히 감상하다 먼발치에서 눈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뽕나무에 열린 오디가 목을 축이라고 손짓한다. 한 움큼 따서는 입에 털어 넣고 고개를 돌리니 첫 번째 낙동강철교가 보인다.

길이 996.6m, 한강철교 다음으로 한국에서 두 번째로 긴 철교였던 다리다. 새 철교가 들어서기 전까지 경전선 기차가 내달렸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트러스 형 단선철교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9월 착공했다. 하부구조는 1940년 4월 준공했으나, 상부구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광복을 맞았다.

정부 수립 후 1950년 착공했으나, 다시 6·25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1962년 12월 22일에서야 온전한 모습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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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뽕나무에 열린 오디 한 움큼. / 최환석 기자

새 철교가 생기면서 지금은 폐선 된 철로 위로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평일 한낮인데도 이따금 이용자가 있다. 본래 역할을 잃은 철교에 제2의 삶을 제공한 셈이다.

200m가량 떨어진 곳에 가장 먼저 낙동강철교로 불렸던 다리가 있다. 1905년 5월 25일 준공된 다리다.

철교는 경전선 개통과 함께 1962년 말까지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철도 일부로 활약했다.

철도로서 역할을 마친 철교는 현재 차도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폭이 4.3m여서 차 2대가 마주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가장 최근에 들어선 낙동강철교는 KTX 운행을 목적으로, 경전선 복선 전철화와 부산신항 배후철도 기반시설을 구축하려는 사업 하나로 건설됐다.

지난 2009년 단선으로, 2010년 복선 전철화를 마치면서 마산역까지 KTX 운행을 시작했다. 낙동강역이 업무를 마친 바로 그해다.

삼랑진 행정지명은 조선 시대에 하동이었다. 한자로 '아래 하(下)', '동녘 동(東)'을 쓴 지명은 단순한 방위 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삼랑진이라는 이름은 지리적 특성이 잘 묻어난다. '세 갈래 물결이 일렁이는 나루'라는 이름은 1928년 비로소 공식 행정지명으로 쓰였다.

밀양강과 낙동강, 바닷물이 만나는 삼랑진읍은 전통적인 교통의 요충지다. 조선 후기에는 낙동강 가장 큰 포구 중 하나였다.

1765년 삼랑창 설치로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고을 전세와 대동미를 수납, 운송하는 집산지였다.

삼랑진역이 들어서고, 철교가 세워지면서는 철도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배와 기차가 오가던 교통의 요충지는 만남의 장소이자, 또한 이별의 공간이었다. 삼랑진이 가사에 등장하는 가요마다 구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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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밀양 삼랑진읍 구간 풍경. / 최환석 기자

연보라빛 코스모스 눈물젖은 푸랫트홈. 옷소매를 부여잡고 한없이 우는 고운 낭자여. 구름다리 넘어갈때 기적소리 목이메여. 잘있거라 한마디로 떠나가는 삼량진

- 노래 '울리는 경부선' 가사 중 - 

'비 내리는 삼랑진에 정거장도 외로운데, 소리치는 기관차는 북쪽으로 달려간다. 사나이의 가는 길에 비 온들 눈이 온들, 어머님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을란다.

- 노래 '비 내리는 삼랑진' 가사 중 -

이날 걸은 거리 2.5㎞. 2361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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