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접공 석규 씨의 하루

태양은 하늘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하지를 지나고 있지만 새벽 5시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다. 아내가 깰까 봐 소리 없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너무 이른 아침이기도 하거니와 아침상을 몇 번씩 차려야 하는 아내의 수고를 덜기 위해 회사에서 아침을 해결한 지 오래 됐다. 우리 나이로 쉰둘인 조선소 35년 차 용접공 석규 씨는 대충 씻고 근무복과 안전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결혼하여 고향 남원에서 시집살이를 하다 거제에 신접살림을 차리면서 아내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단다. 출근과 퇴근 시간에 길거리를 메우는 근무복의 물결이었다. 조선소 사람들은 회사 내에서만 근무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근무복이 일상 외출복이었다. 회식하는 술집에서도, 2차 나간 노래 주점에서도 똑같은 근무복이었다. 심지어 결혼식장이나 돌잔치, 집들이에도 근무복을 입고 나타났다. 장례식장에서도 퇴근 무렵이면 안전화까지 신은 체 떼로 들이닥쳤다. 왜 근무복을 회사 바깥에서 일상복으로 입고 다니는지 궁금해하는 아내에게 석규 씨는 자긍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소 노가다니 공돌이 공순이 혹은 땜장이로 불리며 멸시받던 시절이 있었다. 87년 6·10항쟁과 노동자 대투쟁기를 겪으면서 달라진 시선과 나라 경제의 주역이라는 자긍심이 생겼고 양대 조선소를 안채와 사랑채로 둔 거대한 저택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거제도는 내 집안이었고 부딪히는 이들은 모두 한솥밥 먹는 식구였다. 통근 버스가 옥포 사거리를 지난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찔레꽃 향기가 그에게는 매캐하다. 오랫동안 앓아온 가슴앓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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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인도 땀을 흘리는 듯 하다. / 박보근 노동자

업무는 8시부터 시작하지만 아침 식사를 하고 현장 정리와 작업 준비를 하려면 이렇게 꼭두새벽에 나서야 한다. 줄을 맞춰 서서 국민체조를 하고 작업 지시와 안전사고에 대한 주의와 지적을 하는 현장 조회(Tool Box Meeting)를 한 뒤 비로소 작업장에 들어간다. 지금이야 많이 부드러워진 일상이지만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절차였다. 병역 특례 5년을 의무 근무하는 조건으로 입사한 조선소는 그들에게 회사라기보다 군대에 가까웠다. 작은 안전사고라도 나는 날엔 그 조직 전원이 야드를 구보로 뛰면서 재발 방지 다짐을 하고 정신교육을 했다. 상명하복의 군대식 체제에 익숙해질 무렵 첫 월급을 받았다. 월 244시간 기본 근무에 13만 4천 원이었다. 고향 친구 비닐하우스 풋고추 한 상자가 4만~5만 원 했을 때였다. 그렇다고 임금이 적다고 불평하다 해고라도 당하면 당장 군대에 끌려가야 했다. 군대에 가는 건 겁나지 않으나 당장 그의 벌이가 없으면 동생들 학비 등 집안 살림살이가 거덜 날 판이었다. 그나마 조금 저축이라도 하려면 일을 많이 하여 근무시간을 늘이는 수밖에 없었다. 야간 교대 근무를 하고 특근, 잔업, 철야를 닥치는 대로 하면 30만 원 가까이 손에 쥘 수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용접을 하다 보니 툭하면 용접 불꽃에 눈이 익어 쓰라린 눈물을 쏟았다.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저 아래서 안전요원이 뭐라 수신호를 보내고 있다. 아차! 옛날 생각하느라 안전 벨트 고리를 걸지 않았나 보다. 조선소는 3D 업종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힘들고 쾌적하지 못한 업종이다. 배의 구조상 높은 곳에서 고소차나 발판 위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자칫 추락이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다. 밀폐 구역에서도 종종 가스 질식이나 화재로 금방 커피 나누고 돌아선 동료를 잃기도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 늘 조심하지만 사고는 아차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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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 시간에도 작업복을 입고 있는 조선소 노동자들. / 박보근 노동자

석규 씨가 일하는 공장은 뱃머리 이물 부분과 고물, 즉 배의 뒷부분을 제작하는 공장이다. 길이가 3~400m가 넘고 면적이 축구장 몇 개가 들어간다는 큰 선박도 선수와 선미 부분은 사람이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협소하고 복잡한 구조다. 구상 선수라는 블록 구조물이 있다. 세월호 참사 때 가장 늦게 수면 위로 남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부분이다. 마주 오는 파도를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용접 작업을 한다. 부재 사이 간격이 좁아 모로 누워 들어간다. 협소하니 용접 토치가 코앞이다. 아크를 일으킨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온몸이 땀으로 멱을 감는다. 콤프레셔 압축 공기가 몸에 두른 에어 자켓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지만 한여름 달궈진 무쇠 철통과 3000도로 발생하는 용접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87년 여름도 이렇게 뜨거웠다. 뜨거운 옥포 사거리에서 타는 듯이 뜨거운 가슴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쫓겨 나왔는데 사람들은 석규 씨더러 노동조합을 바로 세운 영웅이라 했다. 노동조합이 바로 서니 회사가 오히려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노동자들의 권리와 처우도 크게 나아졌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석규 씨의 조선소에 다시금 먹구름이 몰려왔다. 97년 외환위기에 겹쳐 방만한 문어발식 경영을 하다 분식 회계로 철퇴를 맞은 모그룹이 공중분해 돼버렸다. 독자 생존의 길로 들어선 석규 씨의 조선소는 워크아웃을 졸업하기 위해 또다시 강력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살아남기 위해 다시 임금이 동결되고 복지가 축소되었다. 인력 구조조정으로 본사 직영 인력이 줄고 하청 인력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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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형 유조선 블럭. / 박보근 노동자

사람들은 속울음을 삼키면서 살아남기 위해 숨을 죽였다.

점심시간, 다른 부서로 간 오랜 옛 친구를 만났다. 휴식 시간임에도 현장에 돌아다니며 뭔가 확인하고 있다. 안전모 사이로 성성한 백발이 보이고 만년 청년의 얼굴에 굵게 주름이 패었다. 땀소금 하얗게 얼룩진 등을 쓰다듬고 돌아서며 석규 씨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나도 이렇게 늙어가고 있겠지….

오후 작업은 용접 불량으로 용접 부위에 금이 간 곳을 고압의 아크를 일으켜 녹이면서 압축 공기로 불어내고 다시 용접하는 작업이다. 흔히들 용접을 조선소의 꽃이라고 한다. 그만큼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밤에 이 가우징(Gouging) 작업을 보면 정말 조선소의 꽃이다. 녹은 쇳물이 압축 공기에 날려 허공으로 비산하여 떨어지는 광경은 그 어느 불꽃 쇼보다도 화려하다. 분진과 소음으로 작업자는 괴롭지만 눈으로 보이는 꽃이다.

지난 명절 고향을 찾은 석규 씨는 기가 막히는 소리를 들었다. 차례상 앞으로 그를 부른 형은 향을 피우며 말했다.

"니가 들으면 섭할랑가 몰라도 나 생각에는 너그 조선소 인자 확 망해부렸으면 좋겄어."

"왐마? 거 무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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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소 최고 불꽃쇼. / 박보근 노동자

"이건 무신 세금 묵는 하마도 아니고 몇 번째냐. 그 2~3만 명 먹여 살리자고 나랏돈을 이래 허투루 해야 쓰겄냐."

"회사가 어렵다는디 넘들보다 돈도 마이 받음서 귀족 소리 듣는 아재들 탓도 크지라."

제주를 따르던 형수가 옆에서 거든다. 다친 왼쪽 가슴이 또 뜨거워졌다.

"그곳에 명줄 대고 사는 사람과 그 식구가 2~3만 명이 아니라 수십, 수백 만이오. 새끼들 얼굴 잊아 뿔도록 삼시 세끼 회사 밥 묵어서 귀족 소리 듣는 그 사람들 연봉이… 최저시급 근처 도리뱅뱅인건 아시오? 그 사람들 탓으로 이 지경이 됐나요?"

오후 작업이 끝났다. 퇴근하면서 막 불이 밝혀지는 야드를 바라본다. 이곳은 거제의 심장이다. 저 불꽃과 망치 소리는 심장이 뛰는 박동이다. 관상 동맥에 문제가 있다고 부정맥이 뛴다고 당장 심장이 멎는 건 아니다. 거기에 매착없이 수술 메스를 막 들이대다가는 에나로 심장이 멎을 수 있다.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하면 심장은 힘차게 다시 뛸 것이다. 거제의 심장이 제대로 뛰는 날까지 석규 씨는 오늘도 출근할 것이다. 

편집자 주) 이 글은 '1987년 8월 22일 22살의 나이로 옥포 사거리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왼쪽 가슴을 맞고 사망한 이석규 씨가 살아계셨다면' 을 가정해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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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이 몰려오지만 조선소의 불은 밝다. / 박보근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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